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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른/줄로] 에덴, 캘리포니아 1 | 인스티즈

비정상회담 멤버 아닌 사람이 등장합니다. 민감하신분들은 피해주세요.





“줄리안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로빈이 줄리안의 배 위로 느리게 손바닥을 미끄러트리며 물었다. 천정을 바로 보고 누운 자세로 눈만 끔뻑이던 줄리안은 어느새 담배에 불을 붙여 제 입술에 끼워 물었다. 줄리안은 2년 넘게 끊었던 담배를 최근에 다시 피기 시작했다. 줄리안이 아무 대답 없이 천정에 매달린 백열등을 응시하며 동그란 뺨이 움푹 패도록 담배를 빨아 들였다. 


“줄리안.”

“…….”

“나한테 잘 해주지 마.”


야트막한 두 입술 새로 웅얼대는 로빈의 말은 마치 첫 입을 뗀 갓난아이의 그것처럼 미숙하고 옅었다. 지지직, 하고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소리에 줄리안은 멍해졌던 정신을 퍼뜩 붙잡고 고개를 돌려 로빈을 바라보았다. 


“응?”

“차라리 그냥 멀리 간다고 해.”

“줄리안.”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찾으러는 가야 되니까……. 순간 팟, 하고 꺼진 조명등의 잔상에 뿌옇게 흐려진 담배연기가 둘의 시야로 흩어졌다. 로빈은 팔꿈치를 침대에 짚고 상박을 일으켜 줄리안의 잿빛 금발이 흩어져 드러난 이마로 짧게 입술을 찍었다. 판판한 이마에 닫은 입술은 이상하게도 뜨거웠다.







에덴, 캘리포니아
Eden, California






1




“빅D는 아직도 연락 안돼요? 영화제도 두 개나 있고, 그 사이에 인터뷰까지 잡혔는데 언제 다 피팅하게요? 아시잖아요. 로빈 까다로운 거.”

“베르사체는 선댄스 때 한 번 맞췄었구요. 지금 피팅 해본 건 지방시 뿐인데, 로빈이 별로 맘에 안 들어하더라구요. 아니, 회색은 아예 가져오지도 마세요. 나 지금 로빈 자서 통화 길게 못해. 빅D 연락 받자마자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요.“


B는 수화기 너머 담당자에게 다다다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에어컨 때문에 깨질 듯 한 두통이 밀려와 잠시 환기라도 시키려 창문을 내렸지만 곧 다시 버튼을 눌러 닫아버린다. 뒷좌석에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선잠을 자던 로빈도 낮은 투정을 읊조리며 막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로빈이 괜한 잠투정이라도 할까 백미러로 눈치를 보던 B는 깜빡 잊고 있었던 로빈 옆 창문의 선바이저를 내려주었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이 후덥지근한 날씨는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최근 절정을 찍은 로빈의 히스테리까지, B도 거의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얼마 전 옮겨온 LA저택은 로빈의 취향답게 그리 크지 않고 적당히 심플했지만, 어차피 LA라는 도시의 모든 것이 로빈의 기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다 로빈이야 어차피 뭘 해도 볼멘소리를 할 게 분명했으니, B는 집을 고르는 데에는 그리 큰 신경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B가 매끄럽게 핸들을 돌려 차고에 아우디를 주차하자마자,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로빈은 밤샘 촬영에 까칠해진 목덜미 피부로 감싸듯이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B가 잰걸음으로 로빈을 앞질러 다가와, 패스워드와 이중 잠금용 전자키로 도어를 해제하고 문을 열어주자 로빈은 그제야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힘이 탁 하고 풀려버린 다리를 억지로 옮겨 소파로 쓰러지듯 기대앉는다.


별 거 아닌 짜증스런 행동마저도 마치 춤추는 듯 매끄럽기만 한 로빈을 뒤에서 흘겨보던 B는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다. 까다롭고 지랄 맞은 프랑스 꼬맹이에게 어떤 부정적 경계를 부수는 힘이 있다는 것은 B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일로 다가왔으니까. 


인형처럼 천정을 보던 로빈이 앉은 자세로 느리게 꾸물거리며 재킷을 벗어 내밀자 B는 자연스레 재킷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로빈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소파의 헤드로 머리를 기댔다.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새 가구의 가죽냄새는 그다지 개운하지 않았다.


“나 주스 안 마실래.” B가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에, 로빈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커피?”


“아니. 그만 들어가. 혼자 있고 싶어.”

로빈은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 끝으로 소파 가죽의 울퉁불퉁한 겉면을 긁으며 다소 히스테리컬하게 말했다. B가 컵에 얼음을 넣고 막 주스를 따르려던 찰나였다. 로빈의 갑작스런 변덕에 B의 얼굴로 옅은 피곤함이 지나갔다. 그냥 프랑스인이라서 그렇다 생각하는 쪽이 더 편하다는 걸, B는 로빈의 성미를 다루는 법을 최근에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곧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얼음을 싱크에 버리고 뒤돌아선 B는 아무 인사도 없이 콘솔에 놓여있던 여러 대의 스마트폰을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널찍한 집 안에 비로소 혼자가 되자마자 로빈은 감았던 눈을 깜빡이며 떴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들고, 꼭 처음 보는 장소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집 안을 몇 번 두리번대다 금세 흥미를 잃고는 커피테이블에 놓여있던 유비쿼터스 리모컨을 쥐고 살피기 시작했다. 이사하고 나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직접 다뤄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B가 사용방법을 일러줬던 기억이 뜸하게나마 나기 시작했다. 작게 블라인드 표시가 된 버튼을 누르자 정원 쪽으로 난 전면창의 블라인드가 닫히며 집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배쓰터브 버튼을 눌러볼까 고민하며 고무 패킹 위로 엄지를 문지르던 로빈은 그냥 스마트TV를 켰다. 얼마 만에 TV를 켜보는 건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켜자마자 시끌벅적한 야구중계 화면이 나타났다. 저마다 손을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관중석을 비추던 카메라는 전광판을 비추다 다시 필드로 포커스를 맞추었다. 


-밀어 친 타구, 공이 라인 안 쪽으로 들어갑니다! 타구 라인을 따라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3루 주자 조쉬 배스, 여유 있게 홈으로, 2루 주자도 3루를 이어 홈으로 들어옵니다.


-말린스의 노아 콜린스, 연속 안타에 연이은 실점입니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적시 2루타, 자이언츠가 이어서 두 점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요. 지난 시즌의 부진은 완전히 털어버렸습니다. 타자로 재활에 성공했다는 신호로 봐도 되겠습니까? 


화면 속 알렉산더는 흥분한 관중석의 팬들을 향해 긴 팔을 뻗어 흔들며 화답했다. 곧 암담한 표정의 상대팀 감독의 얼굴을 교차편집 해 보여주고는, 피곤한 얼굴로 땀을 닦으며 웃고 있는 알렉산더로 다시 포커스를 맞춘다. 


로빈은 당황스럽거나 슬프기보다는 그냥 얼떨떨했다. 야구하는 모습을 본 건 거의 1년도 더 된 일이지만, 화면 너머로 더러워진 유니폼을 입은 알렉산더의 모습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아마 1년 동안 수십 번도 넘게 그가 야구하는 모습을 그려왔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은 게 자존심 밖에 없었던 로빈은 그걸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꺼버려야겠다 생각하고 버튼 위로 다시 손가락을 맞춰보지만 굳이 힘을 주어 누르지 않고 멍하니 TV를 응시했다. 전광판에 잡힌 열광하는 여성 팬에게 손키스를 날리는 알렉산더가 어째 로빈의 눈에는 1년 새 많이 지쳐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사실 그냥 그러기를 바랬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 사람이 많이 지쳐있었기를. 헤어진 걸 후회하고 있기를. 밤마다 전화를 걸까 고민하고 있기를.

결국 로빈은 TV를 껐다. 알렉산더의 이름을 연호하던 관중들의 목소리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로빈은 다시 텅 빈 집안에 혼자가 되었다.




2
용담
나는 당신이 슬플 때의 모습을 사랑한다 




줄리안은 신경종양외과 세미나가 한창인 강연장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 한 구석에 주차되어있던 크림색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시동을 켜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짓눌려있던 두통이 밀려왔다. 상황은 B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줄리안, 나 자꾸 이런 일로 전화해서 미안한데요. 지금 시간 있어요?

-메디컬 센터 와 있어요. 세미나 때문에.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가깝네. 다행이다. 아니 다른 건 아니고, 로빈이 또 뭐가 꼬였는지 한 나절 내내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해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먹지도 않고 하루를 꼬박 저러고 있다니까요. 오늘 새로 들어가는 영화감독이랑 미팅 있던 거 대충 아프다고 둘러대고 캔슬 했는데, 내일 오전 촬영은 미루지도 못해요. 근데 나 쟤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를 모르니까…….

-어디 아픈 거 아니구요?

-어제만 해도 멀쩡하게 파티 다녀온 애가, 나 자리 좀 비운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틀어박혀서 저러니까 나 진짜 미친다니까. 

-로빈이 그냥 좀 예민해서 그래요. 걱정 마세요.

-허이구, 예민한 거야 뭐, 아주 두 번 예민했다가는 나 모가지가 남아나질 않겠어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와서 로빈 좀 만나줄래요? 또 로빈이 우리가 하는 말은 안 들어도 줄리안 말은 좀 듣잖아, 응?

-제가 간다고 되겠어요. 해결이. 자기 속상한 일 있어서 그러는 걸.

-그러니까 속상할 수는 있는데, 속상한 일이 뭔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녜요. 차라리 달을 따다 달래면 따다 주고 싶은 마음인데 왜 뿔이 났는지 입을 안 여니까, 얼굴 안 보여주니까 죽을 맛이라니까요. 잠수타고 어디 도망 안 간 게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에요.

-…….

-이사한 LA집 안 와봤죠? 뉴포트비치 근처인데 주소 보내 놓을 테니까 부탁 좀 할게요. 매번 고마워요. 와서 전화 줘요.


세미나가 끝나고 이어질 예정이었던 컨퍼러스 관련으로 받아두었던 브로셔들을 조수석으로 던져놓고, 줄리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려 용을 썼다. 내비게이션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이게 핸들을 돌려 차를 빼내 한적한 오후의 도로로 빠져 나온다.


대로를 따라 50여분 가량 운전해 러구나 비치와 뉴포트 비치 사이의 부촌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새 아스팔트위로 불그죽죽한 캘리포니아의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어차피 자신이 찾아가도 로빈이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로빈을 알아왔어도 변하지 않은 하나의 진실이었다. 문이야 열어주겠지, 어차피 로빈 맘을 열 수는 없었다. 그냥 겸사겸사 가는 거라고 생각 해 버리는 게 정신에 이로울 것이었다. 이사 갔다는 걸 듣지도 못 할 만큼 얼굴 못 본지도 오래된 데다, 로빈도 줄리안도 라스베이거스에서의 휴가 이후로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랬다.


전면 차창 너머로 두리번대며 번지수를 찾다 때마침 걸려온 B의 전화를 받은 줄리안은, 맞은편 회백색 콘크리트 외벽으로 디자인 한 건물 앞에 서서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고 차를 세웠다. 



“메디컬 센터면 헐리웃 근처 아니었어요? 엄청 빨리 와줬네.”
B는 차에서 내리는 줄리안에게로 다가와 인사하고는 팔짱을 꼈다.


“차가 별로 안 밀리더라고요. 로빈 안에 있어요?”


B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주었고, 줄리안은 사람 사는 냄새라고는 느껴지지가 않는 정갈한 인테리어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몰라요 나도. 아휴. 안에 있는지 없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2층 가 봐요. 마실 거 한 잔 올려다 줄게요.”

“아뇨. 괜찮아요.”

“내가 불러서 왔다고 하지 말고요. 또 난리나지 싶어.”


줄리안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옆의 벽면에는 파리에서 브루스 웨버와 작업했던 로빈의 흑백화보가 작은 크기로 인화되어 두 장씩 이어 붙여져 있었다. 
2층의 공기는 새 집인걸 감안하고서라도 유독 갑갑하고 텁텁했다. 로빈의 첫 커버화보로 꼴라주한 아트워크가 2층의 전면 창을 마주보는 방향에 큰 사이즈로 걸려있었고, 로빈의 방은 계단에서 올라오면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에 있었다. 줄리안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2층 로비를 둘러보다 로빈의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쥐고 망설이듯 엄지로 잠금쇠를 문질렀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뜸을 들이던 줄리안은 결국 소리내어 로빈의 이름을 불렀다.


“로빈.”


한 동안의 텀을 두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줄리안은 한 번 더 말했다.

“로빈.”


“나야.”


“줄리안.”



잠에 든 건지, 아니면 깨어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여전히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줄리안은 노크를 하며 말했다.



“문 좀 열어봐. 로빈.”


줄리안이 눈을 내리깔고 로빈의 대답을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문이 열리고 문틈 사이로 로빈의 하얀 얼굴과 헐렁한 옷자락, 그리고 삐죽한 맨발이 나타났다.


“……줄리안?”


“꼴이 이게 뭐야. 나 들어가도 돼?”

로빈은 부스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를 내내 뒹굴었던 치고, 흐트러진 시트 외에 방 안은 정갈했다. 
로빈은 줄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로빈은 재킷이 없는 수트 차림인 줄리안을 아래위로 훑어보다,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입고 있으니 정말 의사선생님 같네.”

“그럼 정말 의사선생님이지. 가짜겠어?”


“오늘 사람도 많이 살리고, 아픈 사람들도 많이 도와줬어?”


도와주러 왔잖아. 너. 마음이 아픈 사람. 줄리안이 침대 근처로 다가오자 로빈은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어주었다. 줄리안이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로빈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하더니 이불의 홑청을 쥐고 들어올렸다. 제 옆에 누우라는 뜻이었다. 이럴 때는 로빈이 원하는 대로 뭐든 해줘서 나쁠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줄리안은 말없이 다리를 펴고 로빈의 옆에 비스듬히 기대 누웠다.


손을 뻗어 줄리안의 허리께를 더듬대던 로빈은 벨트와 바지 주머니 사이 무언가 손에 걸리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손에 힘을 주어 떼어냈다. 호출기였다.


“이건 뭐야?”


“환자들 있을 때 나 호출 하는 거. 오라고.”

“나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다. 내가 호출하면 삐삑 하고 신호가 가는 거지. 어때?”


얼굴로 벌어먹고 사는 주제에, 못 본 새에 까칠하게 또 살이 빠져버린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로빈을 빤히 바라보던 줄리안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아 참, 재킷에 있었지. 차에 재킷을 두고 내렸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B가 불렀지?”

“…….”

“거짓말 못하긴.”


내 착한 줄리안. 로빈은 호출기에 흥미를 잃고는 팔을 길게 뻗어 줄리안의 배를 끌어안았다. 납작한 배 위로 뺨을 대고 눈을 깜빡이다 이내 눈을 아주 감아버린다.

책임 못 질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줬으면, 줄리안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B의 말대로 어디 도망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슬펐어.”
줄리안은 로빈의 삐쭉해진 머리칼이 엉킨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


“…….”


“사는 거…….”



사는 게 다 슬펐어.




3




줄리안이 로빈을 달래 재우고 나서야 겨우 거실로 나왔을 때 B는 소파에 앉아 깜빡 졸고 있었다. 줄리안이 정수기에서 탄산수 한 잔을 뽑는 동안 B는 까무룩 잠에서 깨어났다.


“하암, 로빈은요?”

“자요. 졸리대요.”

“하루 종일 잠도 안 자고 방에서 뭘 했대……. 무슨 일인지는, 말 안 하죠?”

“우울한가 봐요 좀. 내일 스케줄은 꼭 하겠다고, 말썽 안 피겠다 약속했으니까 걱정 말고 좀 쉬세요. 잠 못 주무신 거 같은데.”


줄리안은 텁텁한 목구멍 안으로 탄산수 한 모금을 어렵게 삼켰다. 씁쓰름한 뒷맛에 입 안이 까끌거렸다.


“응. 이제 자야지. 줄리안은?”

“가봐야죠. 내일 새벽부터 클리닉 나가봐야 하거든요.”

“자고 가요. 로빈 일어나서 줄리안 가고 없는 거 알면 또 난리칠 거 눈에 선한데…….”


줄리안은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컵을 마저 비우고 걷었던 소매를 다시 내려 정리하며 차키를 챙겼다.


“조심히 가요. 다음 주에 영화제 레드카펫도 모니터 해 주고요. 참 진짜……, 줄리안 같은 사람 또 없을 거야.”


B는 문을 열고 막 나서려는 줄리안을 보며 난처한 표정의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운전석으로 올라탄 줄리안은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조수석으로 팔을 뻗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뱃갑부터 더듬어 찾았다.


로빈과 알렉산더와의 이별 직후 B는 어제처럼 줄리안에게 전화를 했었다. 헤어지고도 내리 삼일을 멀쩡하더니, 별안간 일주일 쯤 됐을 무렵부터 매일 밤을 울며불며 알렉산더를 찾는 로빈 때문에 다들 죽을 맛이었다고 했다. 그 때 B가 했었던 말을 줄리안은 기억하고 있었다.


-손 붙잡고 세 걸음 같이 걸어줬으면, 한 걸음은 혼자 걸어야 할 거 아녜요. 손만 떼면 넘어지고, 손만 떼면 넘어지고, 쟤 어쩌려고 저러는지……. 내가 쓰러져 울고 싶은 마음인데. 그 남자는 전화 아예 받지도 않아요. 수배도 안 되고, 아주 잠수 타 버린 것 같아요. 


술에 취한 B의 전화를 싫은 기색 없이 모두 받아주고 나서,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출근한 줄리안이 인턴 시험 직전 참관해야 할 마지막 수술은 바로 수배조차 되지 않는다던 로빈의 ‘그 남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어깨 수술이었다.


이게 벌써 1년도 넘어가는 일이라는 게 참 우스웠다. 세상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지만,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정교하게 진부했다. 


줄리안은 어둑한 고속도로로 진입해 라디오를 켰다. 종일 인기 팝 차트를 트는 채널, 코미디언들이 나와 시답잖은 저질 농담을 하는 채널……. 한참 버튼을 눌러 주파수를 넘기다 스포츠 채널에 멈추고 다시 손을 핸들로 가져왔다. 앵커는 한 주 동안 있었던 경기소식을 모아 정리해주고 있었다. 


-NBA 황제의 귀환도 볼 만 했지만, 이번에는 야구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단연 압권이었던 경기라면 역시 말린스 파크에서 그저께 치러진 말린스와 자이언츠의 경기 아니었을까요? 자이언츠가 8대 2로 시원하게 승리를 거두고 지난 두 경기의 설욕전을 펼쳤는데요.

-올 시즌 섬머 리그에서 처음으로 선발 타자로 나선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눈부신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부상 이후 재활이 길어지며 은퇴설까지 돌았던 선수였습니다만, 이번 경기를 통해 멋ㅈ……,


줄리안이 재차 버튼을 눌러 라디오 전원을 끄자, 격앙된 앵커의 목소리는 중간에 뚝 하고 끊겨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피곤에 따가워진 눈을 끔뻑이며 막 다다른 S자 코너 구간에서 힘겹게 핸들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슬펐어?
사는 거……. 사는 게 다 슬펐어.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 위에, 정면으로 마주본 이정표만이 마치 앞 창문을 들이받을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속도를 올리자, 창문 바깥의 풍경들은 속도에 녹아나 흐물흐물하게 뒤섞여 흐려졌다.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고 엑셀레이터를 밟고 가드레일에 돌진해 박살이 난 채로, 마치 코마상태처럼 의식도 영혼도 없었다. 며칠 밤낮을 울며 그 사람을 찾았다는 로빈도, 일 년 간 크고 작은 세 번의 수술 이후 샌프란시스코 센터로 옮겨 재활을 시작했던 알렉산더도, 그리고 앵커가 떠들어대는 어제의 경기 소식도, 이 모든 활극 어디에도 줄리안은 없었다.




4




로빈의 꿈은 늘 비슷한 장면에서 시작되어, 비슷한 장면에서 끝났다.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 된 알렉산더는 샌프란시스코 바깥으로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데다, 로빈도 올로케 촬영으로 진행되는 영화 프로젝트 때문에 뉴질랜드와 아이슬란드를 오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꿈속의 로빈은 막바지 촬영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메이크업도 채 지우지 않은 채 침대에 등을 대고 쓰러져 누웠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일어나 TV를 켰다. 알렉산더와의 며칠 전 대화에서, 꼭 보고 응원해달라 신신당부했던 뉴욕 메츠와의 오프닝 매치가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삐딱하게 한 쪽 팔꿈치를 침대 위로 괴고 앉은 자세로 한참 채널을 돌리다 겨우 찾아낸 경기 화면으로부터는 시끄러운 중계진의 목소리도, 관중의 환호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들것에 실려 가고 있는 알렉산더의 고통에 이그러져 찌푸린 얼굴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로빈은 놀라 핸드폰을 쥐고 연신 알렉산더의 전화로 전화를 걸어댔지만,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알렉산더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듣고 말았을 뿐 다른 소득은 없었다.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을 무렵 투수가 교체되어 경기는 다시 재개되었고 로빈은 울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TV를 껐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나고, 까맣게 점멸된 머릿속은 일순간 팟 하고 스파크를 일으키며 로빈을 깨웠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물 먹은 솜같이 퍽퍽하게 무거워진 몸으로 잠에서 깨어난 로빈은 몸에 시트를 둘둘 감고 새우처럼 등을 구부렸다. 늘 같은 꿈을 꾸다보니 이제는 무덤덤한 심정으로 아침을 맞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아마도 줄리안은 그날 밤 그렇게 돌아가 버렸지 싶어서, 이불 속에서 팔만 쑥 꺼내 협탁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을 쥐고 시간을 확인했다. 줄리안으로부터 한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보나마나 스케줄 꼭 나가고, B 괴롭히지 말라는 잔소리일 게 뻔해 로빈은 메시지 확인은 당장 하지 않기로 했다.


차갑게 식은 맨발을 시트로 부비다 베개로 얼굴을 묻자, 줄리안 향수 냄새가 났다. 조말론 런던, 라임 바질. 

아마도 B가 곧 깨우러 올 텐데, 굳이 그 전에 미리 일어나있고 싶지는 않았다. 스케줄이 뭐였더라, 흐릿한 기억을 더듬더듬 거렸다. 

-로빈?

똑똑똑, 그새 깜빡 잠이 들었는지, 로빈은 B의 노크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문 열려있어.”


로빈의 말에 B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워낙 바빠 늘 곤해 보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십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을 보니 B가 이틀 간 얼마나 속을 썩었을 지는 로빈도 잘 알 것 같아서, 눈썹을 삐죽 세우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B의 얼굴에 대고 아무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

“으응…….”

“새 프로필 촬영하고 금요일 파티 가서 입을 의상 피팅 하러 가야되니까 얼른.”

“알았어, 알았어.”

“미안하다고 하면 덧나? 어디가?”


B는 또 다시 불이 나기 시작 한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꾸물대며 시트에서 빠져나오는 로빈을 보며 터지는 속을 삼키는 것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째 로빈은 매양 그대로인지.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로빈이 맘을 못되게 쓸 줄 모른다는 걸, B는 잘 알고 있었다. 제멋대로에 답이 없는 기분파, 하기 싫은 건 납득시켜주기 전에는 안 하려는 고집이 문제였지, 로빈은 솜사탕 같았다. 달콤하고 예쁜데, 손을 대면 안 된다. 


“빨리 씻고 나올게.”

“어여 들어가, 좀.”

“근데 무슨 파티?”

“베니티 페어. 헐리웃에서.”

“아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겨우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로빈은 보송보송한 회색 슬리퍼를 신고 고개를 숙여 물끄러미 발끝만 바라봤다. 아 증말 답답하게. B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얼른.”

“알았어어…….”


결국 로빈이 욕실로 사라지고 나서야, B는 닫힌 욕실문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로빈은 거울을 마주보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지루한 듯 루부탱의 슬립온을 신은 발을 연신 까딱였다. B는 앳된 얼굴의 보조 스타일리스트와 차트를 들고 나란히 서서 의상을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차피 남들이 다 해주는 일이라 생각해 버리고 나니, 로빈은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도 점차 흥미가 떨어졌다. 


“발렌티노에요.” 


제이가 말했다. 로빈씨 주려고 진즉 찜 해뒀다니까요. 제이는 거드름을 피우며 2단 옷걸이의 위층에서 톤다운 된 어두운 보랏빛의 체크패턴 수트를 꺼내 들고 다가왔다.


“라펠에 그 브로치는 빼면 좋겠는데.”


B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 말에 제이는 로빈의 허락을 구하듯 재빨리 로빈에게로 고개를 돌려 묻는다. 뺄까?


“그냥 둬요.”

“그래, 예쁘다니까.”


제이는 괜히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B를 흘겼다. 이 쪽으로는 내가 전문가이니, 괜히 껴들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로빈은 제이가 양 팔에 재킷과 팬츠를 각각 손에 쥐고 자기 앞으로 다가오자, 팔짱을 풀고 옷을 아래위로 훑는다. 아주 맘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제이 자존심을 건드려 봐야 더 피곤해지기만 할 테고, 집에 가서 몸을 뉘일 수 있는 순간은 점점 더 멀어 질 테니, 적당히 타협을 보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는요?”


“같은 컬렉션에서 나온 것도 있는데, 그건 좀 화려하고, 내가 골라놓은 건 질 샌더. 잠시만요.”


제이가 행거 뒤쪽으로 사라지고, B가 스타일리스트와 뭐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로빈은 다시 옷걸이를 바라보았다. 열 벌 정도의 수트가 걸려있었는데, 대부분 올 시즌 유행대로 조그만 패턴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디자인이었다. 겹겹이 걸린 재킷 사이 게 중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차콜색 수트 소매로 눈길이 가서, 엄지로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던 로빈은 막 구두를 들고 뛰어오는 제이에게 말했다.


“저것도 보여줄래요?”

“뭐 말이야?”

“저기, 회색.”


“아, 잠시만.” 제이는 구두를 로빈의 발치에 내려놓고 얼른 옷걸이를 꺼내 옷을 집어 들려다, 옷깃 위의 작은 옷핀에 꽂힌 이름표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왜요?”

“아 이거, 벌써 누가 베니티 페어에 가져가기로 된 건데 내가 몰랐네. 여기 걸려있는 줄. 맘에 들어서 그래?”

로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됐어. 처음 보여준 걸로 입어볼게요.”

“내가 보여준 게 나아. 이거보다.”


로빈은 고개를 숙이고 제이가 놓아두고 간 구두를 바라보았다. 촘촘한 펀칭 디테일에 스티치가 들어가 있는 클래식한 옥스퍼드였다.
로빈이 구두에 정신을 빼앗긴 동안 B는 제이에게 말했다.


“그건 누구 건데?”


“누구? 잠시만, 으음, 알렉산더, S? 그 야구선수가 이틀 전에 피팅 하고 갔던 것 같네. 그러고보니. 당장 사이즈가 없어서 내일 다시 픽업해가기로 했을 거……에요…….”



제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일순간 로빈과 B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B의 야무진 입매를 바라보던 제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제이는 말끝을 흐렸다. 


B도 더러 로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로빈은 막 구두의 끈을 풀다 고개를 들었다. 왜,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진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B를 바라보는 로빈의 눈이 그렇게 말했다. 어색한 정적이 감도는 네 사람 사이의 공기가 막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해졌다.



“뭐, 그럼, 다른 것도 가져올까?” 제이는 뻣뻣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그냥 저걸로 맞춰줘요.”


로빈은 제이의 말에 곧장 대답했다. 제이는 손에 쥐고 있던 알렉산더 몫의 그 수트를 다시 옷걸이로 걸었다. 로빈의 시선이 수트의 어깨죽지에 머물렀다.


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네킨처럼 전신거울을 바라보고 피팅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제이는 여전히 로빈의 낌새를 살피며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핏에 맞춰 옷핀작업을 하고, 셔츠 색을 고를 때 까지 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선과 막 배달되어 올 셔츠의 픽업을 위해 스타일리스트는 의상실에 남겨두고, 로빈과 B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오전부터 촬영에 갑작스런 일간지 인터뷰로 시달린 로빈은 뒷좌석 시트를 최대한의 각도로 눕힌 뒤 바른 자세로 등을 기댔다. B가 습관처럼 뒷좌석의 선바이저를 내려준 뒤 시동을 걸었다. 


“알고 있었어?”


로빈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막 차를 출발시킨 B에게 물었다.


“알고 나한테 말 안한 거냐구.”

“몰랐어. 나도.”

“명단 확인도 안 했어?”


로빈의 날카로워진, 살짝 격앙되어 오른 톤으로 말했다.


“다 일일이 어떻게 확인 해. 매니저팀 다 휴가 가서 나 숨 쉴 시간도 없는데.”

“…….”

“너 안 간다고 하기만 해.”

“……갈 거야. 왜 안 가.”


B는 꾸중하듯 로빈을 다그치면서도 걱정되는 얼굴로 자꾸만 백미러를 통해 로빈의 얼굴을 확인하려했다. 시트가 넘어간 각도 때문에 좀처럼 백미러로 로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바보같이 그건 왜 물어봤어. 그 옷은 왜 보여 달라고 했어. 속이 상해서 한숨이 나왔다. 둘이 얼마나 진창을 치며 끝을 맺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왔던 B의 심정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로빈이 행사장에서 이성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자신이 안 되기도 했고.


“한 숨 자.” 


B는 아무 말이 없는 로빈의 대답을 기다리다, 그냥 뒷좌석의 라이트를 껐다. 뜻밖의 트러블에 지끈지끈 울려대는 골을 붙잡는다. 내일은 명단을 받아와야겠다. 혹시라도 그 남자와 순서가 겹쳐서는 안 되니까. B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확률을 최대한으로 줄여보고자 발버둥 치는 것뿐이었다.


일 년 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알렉스는 왜 갑자기 어디에나 있는지, 로빈은 고약한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모든 게 음모처럼 느껴졌다. TV를 틀어도, 파티를 가도, 이렇게 어디에나 있을 거면서……. 
두 달 전이었나, 이미 주인이 바뀌어 남의 것이 된 번호로 몇 번이고 전화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로빈은 꿋꿋이 번호를 바꾸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알렉스였던 적은 없었다. 이제 와서 무엇하랴, 는 것이라곤 세상을 향한 냉소뿐이었다.


로빈은 눈을 감고 억지로 딴 생각을 하다 라이더 재킷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또 여러 통의 전화와 메시지가 도착해있었지만, 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아침에 확인하지 못했던 줄리안의 메시지를 확인하려 그의 이름을 눌렀다.


속 썩이지 좀 마. 



예상 가능했던 범주의 첫 번째 메시지였다. 하지만 다음 메시지는 달랐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메시지의 내용은,


나 연수 때문에 워싱턴 가. 한 달 뒤에 돌아 올 거야.


였다. 로빈은 핸드폰을 창문 바깥으로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됐다. 내가 가지 마라고 하면 안 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릴 거 같아서, 더 후회할 짓을 하기 전에 로빈은 핸드폰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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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제 기분이 다 눅눅해 지네요. 오늘 구름이 잔뜩 껴서 하늘도 회색빛을 띄는데, 이 글도 그러니.... 아직 그들의 자세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줄리안, 로빈 그리고 B의 지친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편 기다리면서 계속 복습하고 있어야 겠어요:)
9년 전
독자2
워................ 이런 금손을 글잡에서 보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절을 한다) 장르 구석구석 섬세한 정보와 묘사를 심어놓으면서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전개에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심정에 공감하게 되네요ㅠㅠ 다음 편 기다리겠습니다 잘 읽고 가요!
9년 전
독자3
와.. 진짜 대박이네요...... 신알신하고 갑니다.. 이렇게 몰입해서 읽어본 적은 오랜만이네요.
9년 전
독자4
대작이 하나 나타났네요ㅠㅠㅠㅠㅜ 근데 어디선가 본 문체인것 같기도 하고...? 제 예상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말로 이렇게 몰입해서 본건 오랜만인것 같아요...로빈에게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과거가 저렇게 퇴폐미 넘치게 나타나는것 같아서 줄로러는 좋아서 쥬금..ㅠㅠㅠㅜ신알신하고 갑니다! 다음화도 기대할게요!!
9년 전
독자5
와우 진짜 대작이다.....
9년 전
독자6
음악이랑 같이 들으니 너무 좋네요... 진짜 대작.. ㅠㅠㅠ 잘 읽고갑니다.
8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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