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다시 만나길,
벚꽃 피는 날, 곱게 접은 손수건 꺼내 당신 땀 닦아주어
그대 네번째 손가락의 은반지에 짧게 입맞춤하고 나는 한송이 국화되어 저 바다에 떨어져..
[김현] 천일동안
달랑, 문을 열어 빼꼼 틈사이로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혹시 모를 바람소리가 이쪽을 지나갈까, 조용히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눈을 댕글댕글 굴려댔다. 아! 입으로 나오려는 탄식을 간신히 한 손으로 막고선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잡아 내렸다. 연갈색 셔츠를 입은 부스스한 머리의 사내는 키가 큰편인지 키큰저도 손을 뻗어야 닿을 선반위의 책을 가뿐히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얇은 유리틈 사이로는 남자의 책넘기는 소리가 사르륵,사르륵 났고 소녀의 목에선 꿀꺽하고 침이 목울대를 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나, 두울, 셋. 하고 혼자 셈을 센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리지 않았던 종소리가 기분좋게 딸랑딸랑 하고 소리를 냈고 책에 눈을 파묻고 있던 남자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고 웃는다.
"정연아 안녕"
중3때, 잘생긴 사람이 미술학원에 다닌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선 애들과 쫄래쫄래 따라간적이 있었고, 얼마나 잘생겼을까, 하는마음으로 가볍게 향한 미술학원에서 정연은 그만 충격을 받았다. 미술학원 밖의 유리에 삼삼오오 까치발로 얼굴만 빼꼼 껴들은 친구들속에서 정연은 눈을 떼지 못했다. 끝이 탄건지 자고일어난듯한 부스스한 머리에 남자는 흰색 체크남방을 입은채 아이의 손을 잡은채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웅성대며 잘생겼는지에 대해 재촉을 하는 친구들 탓에 그 얇은 유리를 통해 소녀들의 까르륵 대는 소리가 스며들어간건지 남자가 같이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소녀들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고개를 들지 못할 때 정연은 얼이 빠진것처럼 멍-하니 유리에 얼굴을 대고 떨어질 생각을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씩, 웃었고 아이들은 몰래 슬금슬금 보더니, 모두 저에게 한 웃음이라고 난리판을 칠때 정연만이 알고있었다. 저 웃음은 나한테 해준것이라고.
결국 엄마를 조르고 조르던 정연은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소질도 있는것 같고 꿈도 없는데 아예진로로 정하자는 마음에 엄마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살짝 양심에 찔리는 딸이였지만 학원을 다니게되었다는 생각에 엄마생각도 깜빡 잊은채 침대에서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벌써 남자의 얼굴이 아른거리는듯 했다. 다른 선생님들과 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미술을 잘하면 더 눈에 띄게 된다는걸 알고있었다. 오로지 진로와 학업이 아닌 남자의 눈에 들어오기 위해 그림만 죽어라 그려댔다. 그런 탓에 정연은 공모전에 수상된적도 많았고 교내상도 거의 싹쓸이를 하곤했다. 물론 상장과 수상목록들은 그저 까만그림과 종이쪼가리로만 정연에게 느껴졌다.
정연은 남자의 관심이 좋았다. 남자가 처음부터 좋았기 때문에 남자의 관심을 받을때면 마치 사랑을 하는듯 기분이 좋았다. 남자는 정연을 보고 항상 칭찬을 했고 남자또한 정연이 '그림을 잘그리기때문데' 좋아했다. 완벽한그림보다 가끔 일부로 실수를 내 남자가 정연의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히 말할때면 정연은 그만 심장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이보다 달콤하겠는가? 탄식이 꿀떡꿀떡 넘어가는듯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관심은 전보다는 덜했지만 그대신 정연과 남자의 사이는 예전보다 가까워졌다. 정연이 "현쌤," 하고 부르면 남자는 "국화야" 라고 가끔 부르기도 했다. "왜 국화에요?" 하고 물으면 남자는 웃으면서 몰라도 된다고 정연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웃곤 했다. 학원에서 둘이 장난을 칠때면 모두들 사귀냐고 한번씩 물어보긴 했지만 둘은 그저 웃으며 넘어갔다. 남자는 어떨진 몰라도, 정연은 너무 설레였다. 남자의 마음도 저랑같기를, 하며 정연이 한번쯤은 그랬으면... 하고 항상 생각하기도 했다.
소녀는 이미 여자가 되있었다. 교복을 입을땐 다름 없는 소녀였지만 교복을 갈아입고 묶었던 머리를 풀었을땐 이미 그녀는 여자였다. 숨겨놨던 립스틱을 몰래 옅게 바르고,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거리를 나서다 소녀는 남자를 봤다. 무슨일이 있는건지 하늘색셔츠에 넥타이를 한 그는 정연을 못봤지만 정연은 그를 보고 애써 머리를 넘기면서 남자를 불렀다. "김현쌤!" 자기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남자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정연을 보고선 멍-해있더니 사람좋은 웃음을 하며 허허 웃었다. "와, 정연이야? 이쁘네"
남자의 말에 정연은 다시 소녀처럼 몸을 배배꼬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결혼식장이라도 갔다오는지 남자의 옷은 딱 차려 입었지만 머리는 일상과 같이 부스스 하게 파마끼가 남아있었다. "쌤은 어디가요?" 정연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입을 떼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곤 뻔한대답을 하고 정연과 헤어졌다. 정연혼자일진 몰라도, 지금 정연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듯한 기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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