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1 : 사랑은 벚꽃을 타고~ |
"벚꽃구경 가자."
그 날따라 맛이 없는 학식을 앞에 두고 대뜸 말을 꺼낸 사람은 호원과 십년지기 죽마고우 장동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현재까지 호원과 끈덕진 우정을 이어 온 그는 호원에겐 볼꼴 못 볼 꼴 다 보여준 마누라 같은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동반 입대까지 했으니 어련할까. 하지만 거진 십 년을 함께 부대끼며 지낸 호원도 가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속내를 모를 친구이기도 했다. 알면 알수록 모를 놈이다, 둘의 또 다른 죽마고우 우현은 동우를 그렇게 정의했다.
"벚꽃구경?"
둘 중 호원이 가장 먼저 흥미를 보였다. 제대 후 처음 맞는 봄 풍경에 들뜬 것이다. 군생활 동안 가족 다음으로 친구들이 그리웠던 호원은 오랜만에 속된말로 부랄친구라는 둘과 함께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참이다. 하지만 호원의 그런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우현이 볼에 우겨넣은 밥을 채 씹지도 않고 찬물을 끼얹었다.
"누구, 우리끼리? 숫내 폴폴나는 놈들끼리 가서 뭐해, 장동우 또 술판벌이고 싶어서 그러지." "왜애, 꽃도 보고~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얼마나 재밌어, 호야는 가고 싶지?" "뭐야, 너 갈거야? 가지말자 이호원, 너 공부할거라며. 안 갈거지?" "아니, 갈건데."
뭐라고? 언제나 제 말에 토달지 않고 찬성하던 호원이 선뜻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우현은 단박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우현을 보고 호원 역시 미안한 마음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다시 결정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꽃구경이 가고 싶은 모양이다.
"으하학! 어쩔래, 너 밖에 안남았어! 갈 것이오, 말 것이오?" "와~ 이호원이, 나 배신했어?" "그냥 가, 우리 사이에 남자끼리면 어떤데. 어차피 데려갈 여친도 없잖아." "빨리정해~ 5,4,3,2 … …." "어~ 갈거야, 나. 누가 안간대, 어? 오랜만에 꽃구경도 하고, 와~ 진짜 재밌겠네."
저 과한 리액션은 뭐지. 어차피 갈 거였음 심통은 왜 부렸나 모르겠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호원이나 동우나 속으로 꼭 같은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우현을 씹었다. 작은 말다짐 후에 정해진 약속장소는 여의나루역이었다. 이구동성으로 벚꽃은 여의도지! 하고 외치며 골라잡긴 했지만, 사실 여자 손잡고 벚꽃구경을 가본 적이 없는 갓 제대한 남대생 삼인방이 아는 명소란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이다. 어쩐지 복받치는 설움과 눈물을 삼키는 세 명이었다.
"진짜 골 때리네. 약속을 당일에 파토내는게 어딨어, 새끼야!" - 그럼 어떡해, 누나가 나 놀래키겠다고 갑자기 오늘 귀국해버렸는데 … …. 여의도는 다음에, 응? 내일가도 벚꽃 안 져! "됐어 임마, 벌써 호원이랑 여의나루역이거든? 너 빼고 우리끼리 존나 재밌게 신나게 버라이어티하게 놀거니까 넌 오랜만에 누나랑 노가리나 까. 끊는다! - 아 남우현~!
야, 진짜 끊었네. 금방전까지만해도 노기등등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이 부서져라 전화를 걸던 우현은 전화를 끊자마자 호원의 손을 낚아채 잡아 끌고 '가자!' 외치며 여의도 공원으로 쿵쿵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 장동우, 남우현, 이호원 이 셋이서 가기로 했던 벚꽃구경에 왜 남우현, 이호원만 남겨지게 됐을까. 상황은 이렇다. 두 어시간 전까지만 해도 셋은 꽃구경(혹은 좋은경치에서 술파티)를 하러 문턱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동우가 재입대통지보다 뜬금없는 유학갔던 둘째누나의 귀국문자를 받게 됐고, 결국 공항으로 누나를 마중나간 동우는 먼저 꽃구경 약속을 잡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의나루역에 오지 못했다.
졸지에 단둘만 남겨진 우현과 호원은 허탈할 따름이다. 물론 볼 장 다 본 끈덕진 사이에 부랄 친구 타이틀이 그냥 딸린 게 아니니 둘이서만 남겨졌다고 해서 특별히 어색할 것도 없고 오히려 더 깊은 우정을 다질 수도 있는 기회였지만, 주위에 단내나는 남녀 커플들로만 가득한 여의도 공원에서 그런 상황은 굉장히, 아주, 끔찍한 미스테이크였다. 분홍빛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 아래 준수한 청년 둘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매우 바람직했지만 사방이 커플들로 가득한 장소에서 그들은 다른 커플들과 함께 커플로 묶여 지나가는 어르신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거나 여자들의 눈요깃감이나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치 못한 호원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하하하.' 멋쩍게 웃으며 열심히 가져온 맥주를 원 샷 했고, 처음부터 남자끼리 가는 꽃구경에 반대했던 우현 역시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연속해서 잔을 비워댔다. 해가 지고 별이 총총 뜨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정신을 놓은 쪽은 우현이 되었다. 둘의 주량은 엇비슷했는데, 아무래도 소맥으로 연거푸 독주한 우현이 먼저 나가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남우현 일어나, 집에 가야지."
사람들 시선은 부담스러웠지만 원하던 대로 꽃도 보고 술판도 벌인 호원은 점점 올라오는 술기운과 얼굴로 몰리는 열을 느끼자 슬슬 갈 준비를 하며 돗자리 위에 엎어져 잠을 청하는 친구를 깨워 공원 밖으로 데리고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도 코를 골며 자는 우현이 웃겨 한 번은 손가락으로 코를 집었더니 금방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면서도 여전히 작은 소리로 코를 골아대는 탓에 호원은 연신 끅끅대며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해서 무겁기 짝이 없다. 여까지 끌고 온 게 용한 우현을 이불에 던지듯 눕혀놓고 뻘뻘 흘린 땀을 닦으며 냉장고에서 냉수부터 꺼내 들이켰다. 잠깐 정신은 차렸지만 이 상태로 집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평소처럼 우현네서 자고 가는 쪽을 택했다. 얼른 씻고 자야지. 호원이 갈아입을 옷을 찾으러 우현의 방문을 다시 여는데, 웬일로 우현이 혼자 깨어나 이불 위에 앉아 있다. 방금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에 눈은 계속 떠졌다, 감겼다를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벌써 깼어? 씻고 잘래, 그냥 잘래?"
항상 술판 뒤에 정신을 놓으면 자취방에 와서도 잠부터 자버리는 우현이었는데 웬일로 혼자서 일어나 깨어있으니 기특할 따름이다. 호원과 우현은 갑이지만 가끔 호원이 내심 우현을 동생 보듯 귀여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호원이 평소에 우현 편을 자주 들어주거나 더 마음 써주는 일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 방바닥에 누운 우현의 옆에 다리를 붙이고 앉아 친구된 도리로 옷이라도 갈아입혀주려 우현의 티셔츠 끝에 손을 댔을 때였다.
"야."
아, 깜짝아. 말도 할 정도로 정신이 들었는 줄은 몰랐던 호원이 푸드덕 놀란다. 하지만 완전히 깬 건 아니었는지 목소리는 잠기고 발음은 조금 어눌했다.
"에헤, 혀 꼬였다. 왜?" "야."
술김에 텐션도 업됐겠다, 장난끼 넘치는 투로 말을 잇던 호원은 갑자기 급변한 우현의 태도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다 불쑥 고개를 든 우현과 눈을 마주하자, 솜털이 쭈뼛서는듯 서늘해진 호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으나 금방 우현이 촛점없는 눈동자로 따라 붙었다. 뭐야, 이 끈적한 분위기는. 호원이 바로 우현을 멀리 떼어내버리려는데,
"… …!!"
그보다 한 발 빠른 입술이 턱, 하고 부딪혔다. 그러니까 우현의 도톰하니 부푼, 호원이 평소 붕어입술이라며 놀린 그 입술이, 호원의 하트모양 입술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다. 마우스 투 마우스. 남우현 주둥이가 이호원 입술에, 이호원 입술이 남우현 주둥이에. 오 마이 갓. 지져스! 보통 기습키스당한 여자애들이 사고회로가 정지된다고 하는데, 본인 스스로 상남자라 자부하는 호원쪽의 사고회로는 정지는 커녕 엉키고 꼬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호원이 이게 당최 무슨 상황인지 정신없이 이해하려는 사이에도, 아예 호원의 멘탈에 구멍을 내버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정신의 끈을 놓아버린 우현은 말캉한 그 혀끝을 순식간에 저가 입술을 붙이고 있는 호원의 입속으로 쑥,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
유례없는 낯선 침입에 호원은 오소소 돋는 소름과 뇌끝부터 하얗게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동시에 이 미친놈을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따위를 생각했다.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온 그놈의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 했건만, 얄밉게도 그놈은 금방 다시 제 주인 입 속으로 쏙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입술에 도장찍듯 꾸욱 누르고 있던 주둥이도 빠르게 떨어져 나가더니 호원을 짓누르던 몸뚱이와 함께 어느 순간 풀썩 이불위로 쓰러져 버렸다. 드르렁, 드르렁. 다시 코를 골며 잠에 빠진 우현을 한참이나 허탈한듯 바라보던 호원이 겨우 내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내 첫 키스… …."
돌려내,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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