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정말 친구일까
태형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간이 뚝 하고 끊겨버린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그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눈만 뜨고 숨만 쉬고 있었다. 우습게도 태형이의 고백을 듣고 난 후 옆에 있는 피디님보다 오히려 태형이와 나의 관계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찼다.
눈물로 앞이 가로막혀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태형이의 얼굴,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아른거렸다. 보지 않아도 안다. 지금 태형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내게 고백했을지.
미안해 태형아. 그것도 모르고 난 친구라는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쳐버렸으니. 그 마음 얼마나 아픈 지 다 안다. 나도 겪었으니까. 그래서 선배랑 그 일, 니가 더 속상해했구나. 미안해 태형아.
친구로서 널 더 아프게 했다면 난 어쩌면 좋지 태형아.
“피디님.. 오늘은”
어지러운 머릴 붙잡고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피디님께 죄송하지만 지금은 절대적으로 혼자 있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금 피디님의 기분 어떨지 잘 알지만
지금 그 마저 내가 배려할 순 없었다.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으니까. 피디님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날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따스했지만 피디님의 손을 잡고
현관까지 배웅해주곤 우리 집을 나가는 피디님의 아픈 뒷모습을 보지 않고 재빨리 등을 돌려 방으로 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어쩌면 좋을까.. 이제부터 정말 어쩌면 좋을까 태형아.. 복잡했다.
아프면서 걱정되고 미안하고..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눈을 마주하고 만날 수 있을까.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볼 수 없겠지. 다신 너의 눈을 다정한 눈빛으로 장난스런 눈빛으로 볼 수 없겠지. 그 땐 친구였던 예전의 순수한 마음이 아닌 의심하는 마음으로 널 받아들일 지도 몰라.
그래도 이기적이게도 널 보고 싶었다. 울고 있을 너의 얼굴을 보고 안아주고 싶었다. 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후회로 남을 지도 몰라. 피디님도 너도 잃을 지도 모르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울고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그 순간 무슨 결심을 한 건지 너무 많이 울어 팅팅 부은 눈으로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서둘러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불안했다. 이대로 태형이를 잃기엔 너무 오랜 시간동안 널 만났고 널 많이 좋아하니까. 택시를 잡고 전화를 너에게 걸었지만 역시나 신호음만
수십번 받질 않는다. 불안한 마음에 어릴 적 고쳤던 손톱 물어뜯는 버릇, 김태형 니가 고쳐줬었는데 너 때문에 다시 물어뜯게 되었네. 다리까지 덜덜 떨면서 그냥 무작정 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룹 숙소 생활을 독립하고 처음으로 얻은 너만의 집. 이사하던 날 도와주고 자장면도 시켜먹고 했던 집. 오랜만에 찾아 왔지만 익숙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힘겨워
계단으로 달려가 니가 사는 9층으로 달려가 너의 집 문 앞에 서서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좋은 아파트답게 조명도 좋은 집. 미친 여자 마냥 산발로 된 머릴 한번 쓸어 넘기고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정도 두드렸을까.. 인기척도 안 들리는 고요한 너의 집 문 앞에서 다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태형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전화도 안받고 피디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 때,
넌 이런 거지같은 기분으로 내 연락을 기다렸을까.. 미안함에 애써 억눌렀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때 머릿속을 스쳐가는 번호가 생각났다. 너의 집 비밀 번호.
언젠가 너의 집에 놀러갔던 날, 문 열어주기 귀찮다며 내게 알려줬던 번호. 떨리는 손가락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눌러보니 역시나. 그 날 이후로 번호 안 바꿨구나.
생각해보니 그 땐 아무 감흥 없던 번호 네 자리는 잔인하게도 내 생일이었다. 짧은 삐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떨리는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음악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아까 시끄러웠던 이유가 이거구나. 신발을 벗고 긴 복도를 벗어나니 온 사방엔 술병들과 캔들이 나뒹굴고
창문을 꽉 닫고 있던 탓에 술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였다. 짙은 술 냄새에 코를 막고 서둘러 태형이를 찾아보니 자기 방 안 바닥에 누워 가만가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태형이를 보니 눈을 감고 잠이 든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옆에 앉아 태형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태형이를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지금 잠든 태형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왜 이럴까. 막상 태형이를 마주하니 감정이 복잡해졌다. 애써 외면하고 태형이의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고 한참 앉아있었다.
문득 아까 거실에 나뒹굴던 술병들의 잔해가 생각나 거실을 치워주고 얼굴도 봤으니 이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자 내 손을 덥석 잡은 태형이의 거친 힘에 다시 주저앉았다.
자는 거 아니었나? 놀란 표정으로 태형이를 보니 살며시 눈을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침대에 기대 누워있는 채로. 짙은 술 냄새가 태형이의 잠긴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어디가”
아까 전 나랑 통화할 때와는 다른 다정한 목소리에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디 안 갈게라고 걱정되서 왔다고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눈물이 앞을 가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린 애처럼 엉엉우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상체를 일으켜 내 어깰 감싸주었다. 근데 내 어깰 감싸는 태형이가 예전과는 달리 잠깐 주저하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에 더 많이 울어버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얼굴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태형이는 말없이 내 어깰 토닥여주었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넌데 미안해 태형아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무 도움도 못 되어줘서 미안해. 태형이의 한숨 소리와 나의 울음소리만 가득한 방과는 달리 거실에선 아직까지 큰 음악소리가 집 안을 둥둥 울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태형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니 아까부터 줄곧 나만 쳐다보던 눈을 내 눈과 마주치자 서둘러 피했다.
차라리 욕을 하지 당장 나가라고 왜 우냐고 뭐라고 소리라도 쳐버리지 그랬어. 난 등신같이 널 다 안다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너한테 상처만 줬잖아.
“태형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몰라줘서”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며 태형이는 대답했다.
“확실히 김탄소 눈치 하나는 영 없더라”
“......”
“벌써 몇 년짼 지는 아냐 너”
“.......”
“미안해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해서”
“...아냐 말 해줘서 고마워 계속 몰랐다면..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르잖아”
“모르겠다 나도 이젠 널 어쩌면 좋을지”
태형이는 내 어깰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침대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러게 태형아. 나도 널 어쩌면 좋을까. 이대로 정말 너랑 멀어지면 어떡하지?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기적이지만 난 하나뿐인 널 잃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태형이의 고백을 들었을 때 우습게도 느낌이 이상했다. 막 싫고 어쩔 줄 모르겠다라기 보단 묘했다.
눈물이 흐른 이유는 그 시린 고백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그게 미안해서.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섣불리 피디님께도 너에게도 말할 순 없었다. 단순한 혼돈일지도 모르니까.
나도 태형이의 옆에 앉아 가만히 태형이의 숨소릴 듣고 있었다. 아무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너무 많이 울어 눈이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괜시리 부은 눈을 비비며 너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 때 태형이의 큰 손이 내 머리 위에 올려졌다. 깊은 숨을 들이쉬더니 태형이는 날 향해 느리게 말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나도 살짝 긴장되었다.
“김탄소”
“응”
“이참에 말하련다. 그냥.. 지금 아니면 앞으로 영영 말 못 할지도 모르니까”
“......응”
“좋아해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짧은 단어들을 내뱉으며 태형이는 내 머리에 올린 손으로 내 머릴 살짝 쓰다듬었다. 태형이의 손길에 가만히 나도 숨을 고르고 태형이의 말을 기다렸다.
“나도 진짜 병신이다 맞지? 말도 못 하고 등신새끼”
“...아냐 나였어도 말 못 했을 거야 그러지마”
“그런 말 하지마 괜히 기대하게 되잖아”
“..태형아”
“나 이번에 콘서트가면 3일동안 없어. 그동안 생각이나 해봐 생각만”
“......”
“대답”
“알았어”
태형이는 그제야 살짝 웃으며 내 머릴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날 바라보았다. 태형이의 눈은 복잡한 듯 보였지만 어딘가 한 편으론 후련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애써 웃으며 응수했다.
“김탄소 나 때문에 눈 많이 부었네 미안해서 어떡하지”
“괜찮아”
태형이는 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날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깜짝 놀랐지만 뿌리칠 순 없었다. 그러기엔 내 마음도 태형이의 마음도 너무 아프니까.
잠시 동안만 이러고 있으면 괜찮겠지. 태형이의 심장소리가 들리고 내 목덜미엔 태형이의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러웠다. 술 냄새가 아까보단 덜 나는 것 같네.
“향기 좋다”
“내 향기? 그런 것도 있어?”
“어, 너랑 처음 친구한 날부터 나는 향기”
“뭐야 거짓말 치지마”
“진짠데 안 믿네”
“......어떤 향기인데?”
“...좋아 어딜 가도 생각날 만큼. 너랑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맴도는 그런 향기”
그런 향기가 나는 구나 나한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태형이가 얼마나 날 아끼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고.. 생각보다 훨씬 더 태형이는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좋아해주고 있었단 걸 왜 몰랐을까. 힘들 때마다 바쁜 스케줄에도 달려와 주고 늘 좋은 말만 듣게 하고 자기 힘든 일보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더 아파했던 걸 왜 대체 왜 몰랐을까..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태형이의 숨소리가 잔잔해질 즈음 날 감싸 안은 팔을 풀어주고 내 볼을 톡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피곤하지? 뭐라도 먹을래?”
“아니 괜찮은데”
“난 오랜만에 니가 사주는 치킨샐러드”
“알았어 알았어 우선 거실부터 치우고 사올게”
살짝 웃으며 치킨 샐러드라고 말하는데 안 사줄 수도 없고 우선 거실부터 치우고 사줘야겠다. 태형아 그래 지금처럼만 내 옆에서 웃어줘. 나도 많이 혼란스럽지만 정말 진심으로
내 감정이 뭔지 빨리 알아낼 테니까. 지금처럼만 웃어주라. 그까짓 치킨 샐러드 맨날 사줄테니까. 나도 모르게 거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걸으며 태형이의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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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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