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해주세요!
굿바이 써머
Goodbye Summer
이동혁
/ deep.
6
초여름이라더니 어딜가도 한여름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귀엽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하지 마. 내 마음이야 그거.’
그래, 네 마음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심지어 이동혁한테만 관대해지다 못해 성인 군자가 되는 난데. 까만 줄무늬 티 입고 흑청바지에다 후드집업 눌러쓰고 우산 들고 나 데리러 온 이동혁에게 나는 찍소리 하나 못했다. 그 날의 공기는 지독하게도 어색했는데 이동혁은 다음 날이 되자마자 어색했던 우리 거리를 성큼 좁혀 놓았다. 그러니까 장난치고, 또 장난치고 또 장난치고 또 장난쳤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내가 녀석에게 감정이 단 일퍼센트도 없었을때는 싸우고 나서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방금방 싸우기 전 지점으로 돌아갔었는데. 지금은 내가 녀석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면 다 져주게 된다는 몇몇의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딴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지 몰라도 난 그랬다. 이동혁은 옛날과 같은데 내 마음만 180도 바껴버렸다. 나 혼자 어색해 죽든말든 지 말마따나 이동혁은 녀석의 말 그대로 날 계속 귀여워했다. 언행불일치란 단어는 입 밖에 꺼내지도 생각의 도마 위에 올리지도 못할 만큼 철저하게 날 귀여워했다. 여전히 귀여워서 그랬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내 기준점에선 설레는 행동들도 계속했다. 그리고 또 반복하자면 난 여전히 이동혁에게 약했다.
그때 그 비 오던 날의 계절은 영락없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아 문이란 문은 꽉 닫은 교실 안으로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낑겨 들어오는 그런 한여름이었다. 5월 말에서부터 바로 어제였던 6월 4일까지 허용되던 춘추복 혼재 기간도 지나 이제 모든 학생들이 하복을 입고 다녔다. 이동혁도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의 스타일은 좀 달랐다. 춘추복 혼용 기간이던 뭐던 간에 꼬박꼬박 교복 안에 반팔티 입는 나와는 달리 이동혁은 교복 셔츠 등교 하자마자 벗어놓고 안에 받쳐입은 반팔티 위에 어쩌다 걸치지도 않았다. 가끔가다 구시대적 교칙에 걸맞는 구시대적인 선생님들이 무어라 꾸지람을 해도 특유의 넉살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곤 했다. 교칙에 허용되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선 위를 노니는 발걸음은 가벼운듯 조심스러웠다. 달리 말하자면 이동혁은 선을 꼭 지킨단 소리다.
나와 녀석 사이에 선도, 넘을 듯, 말 듯. 이동혁은 그렇게 행동했다. 앞에 서술했던 것처럼 19년 불알친구인 나를 귀여워하는 건 맞는데 선은 꼭 지켰다. 그리고 그 지킨 선은 날카롭게도 나를 짓눌렀다. 어항 속 물고기가 물 밖으로 고개를 오래 내밀고 있을 때의 공기처럼. 에어컨 바람에도 쓸려 날아갈 것 같은 작은 내 마음에 이동혁이 지키고야 마는 그 한 줄에 불과한 선은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곤 했다. 숱한 여름을 지나 또 하나의 여름을 맞은 우리는 여전히, 엿같게도 친구를 하고 있었다. 그 선 하나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 두 명 덕분에. 이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이동혁은 가끔가다 우리 사이 놓여진 그 선을 지켜 친구 사이란 단어를 더 짙게 덧칠하고 나는 멍청하게 그 짙게 그여진 발치의 선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이 시도때도 없이 보수공사를 해대는 덕에 난 그 선이 내 발에 묻어날까 넘어갈 생각도 않고 시선으로 그 선 너머를 탐냈다. 선 넘고 싶어하면서 멍청히 서 있기만 하는 나를 스친 햇빛이 따갑게도 그 선을 비춰 아지랑이는 늘 짙게 피어올랐다. 스쳤다 생각한 햇빛은 멍청한 나를 긁고 지나갔다. 햇빛이 긁고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았다. 그래서 난 어지러울때가 많았다. 어지러워서 문득 토악질이 올라왔다.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영어 듣기를 위한 방송 점검 진행합니다. 각반 실장들은 볼륨 체크해주시고, 방송실에 와서 알려주세요.」
내 잡념 주 원동력인 이동혁 목소리가 3학년 건물을 울렸다. 고상한 클래식이 흐른다 싶더니 영어 듣기 전 으레 나오곤 하는 안내방송이 자습하느라 조용한 교실을 채웠다. 그 방송 하나에 실장인 황인준이 일어나 음량 괜찮은지 묻고 반 애들 대부분이 고개 주억거리자 빠르게 교실 문을 열고 나선다. 드르륵, 쿵. 교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풀고있던 영어 모의고사 문제로 되돌아왔다. 41번. -길게도 늘어진- 이 글에 알맞은 제목을 고르시오. 망설임 없이 아까 글을 읽은 뒤 마음속으로 점찍었던 4번에 체크 표시를 했다. 45번 문제까지 끝내고 답을 매기기 위해 빨간 색 색연필을 들고 하나씩 동그라미 쳤다. 혹여나 이동혁 목소리 한번 더 나올까 귀는 쫑긋 세운 채였다. 악, 소리 뭐야. 방송 음량 작다는 소리가 있었는지 갑자기 소리가 훅 커졌다. 여기저기서 치고들어온 다소 큰 방송 음량에 놀란 소리가 났다.
「엔지니어 실수로 음량이 너무 커져 다시 조절했습니다. 각반 실장들 다시 와서 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럴줄 알았다. 이동혁 음성이 한번 더 울렸다. 방송실 뛰어갔다온건지 땀 뻘뻘 흘리며 교실 들어온 황인준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이동혁의 말에 고개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문을 열었다. 난 개의치 않고 푼 문제들을 매겨나갔다. 머지않아 되풀이되던 영어듣기 점검 방송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또 몇분 지나지 않아 방송실을 짧은 시간 내에 두번이나 갔다온 황인준이 도착했다. 또 뛰어갔다온건지 이번에는 헉헉대면서 자기 자리 가앉았다. 점검 이후 멘트 하나 더 안할 모양인지 스피커는 잠잠했다. 그럼 이동혁은 왜 안 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도착할 것이 뻔해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의미없음을 깨닫고 펄럭펄럭 종이 넘기며 채점하는데 곧 마지막장이었다. 당연히 맞겠지, 란 심산으로 왼손에 쥐고 있던 답지와 문제지를 번갈아보는데-, 어라? 아까 그 41번 문제. 답이 3번이다. 뭐야. 이거 누가봐도 4번 아닌가? 잘 나가다 한번 미끌린 것 가지고 상심이 꽤나 컸다. 왜? 이게 왜 4번이야? 고딩들 특히 고삼 급식들 단골 멘트. 이게 왜? 이거 이게 정답 아니야? 어김없이 내 위에도 물음표 하나 떨어졌다. 이게 왜 3번인데?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45번까지 착실하게 붉은 동그라미 쳤다.
다 매겼다. 2018학년도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영어. 다 풀고 다 매겼다. 파란색 볼펜으로 푸는데 몇분 걸렸는지 적고 그 옆에 빨간 색연필로 총점 적었다. 98점. 2점짜리 문제 그래 그 41번 하나 틀렸다. 1등급. 그당시에도 1등급이고 지금에도 1등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1등급이라지만 고작 하나 틀린 것 가지고 기분 더러웠다. 이게 왜 틀린거지. 하나 틀리면, 심지어 맞다고 생각한게 틀리면 더 빡치는 법이다. 성난 마음 차분히 가다듬고 긴 줄글 다시 읽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며 해석하고 모르는 단어 찾아가며 하니 3번이 정답 맞았다. 그래. 뭐든 깊게 들여봐야 하는 법이다. 얕게 보고 정의내렸다간 큰 코 다치는거지. 내가 바보였네 더 봤어야지 2점짜리를 틀리냐 하고 문제집 덮고 그 위에 엎드려 자학할때쯤 교실 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더운 열기가 교실 안으로 들어와 시원한 공기에 엉겨붙는다. 문 열린건 몇십초 전의 일인데 빠르게 형성된 그 후텁지근한 공기에 문에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재민이 고개도 안돌리고 말한다. 야.
“문 닫아. 더워.”
“어어.”
이동혁 목소리였다. 짧디 짧은 대답에도 녀석인건 여실히도 드러났다. 난 고개 들 생각도 않고 퍼질러져있었다. 5교시 시작하기 전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었다. 얘는 또 왜이렇게 누워있어. 3분단 뒤쪽 앉아있던 나에게 가까워지는 녀석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서도 난 일어나지 않았다. 2017년에 친 영어 모의고사에 기빨려서 못일어나. 속으로 대답은 하면서도 눈 꾹 감고 입 꾹 닫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나 만끽했다. 아무 대답 없는 나 대신 오늘은 한국 지리 붙잡고 끙끙대던 나재민이 김여주 몇분 전에 엎드렸다며 한 마디 던진다. 아 그래, 하고 자기 자리 가 앉으려나 싶었는데 이동혁은 대뜸 엎어진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프냐?”
“…….”
“열은 없는데?”
그야 안아프니까. 우리 엄마가 머리 아프다고만 하면 하는 행동들을 이동혁은 내가 아무 말 않았는데도 하고 있었다. 이동혁의 손이 가볍게 머리카락에 가린 이마를 덮었다. 그 작은 행동에 비로소 열이 날것만 같았다. 야 얘 어디 아프냐? 자칫하다간 반 애들 모두한테 물어볼 것 같은, 이어진 녀석의 말에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아픈데 없어. 그냥 기빨려서 그래. 잔뜩 시들거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가자마자 이마에 위치해있던 이동혁의 손이 내 뒷통수로 옮겨간다. 맞닿아만 있어도 열 확 오르게 하는 그 손이 뒷통수에 올려지더니 부드럽게 쓱쓱, 이리저리 흩어져있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아프면 안돼. 동혁이 속상해. 낯간지러운 삼인칭까지 써가면서 이동혁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같이 등하교 할 친구 없어지면 외로울까봐? 그렇게 비꼬아 생각할 필요도 없는데. 난 그걸 꽈배기처럼 배배 꼬아 들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섣부르게 내뱉었다 녀석이 혹여나 수긍하기라도 한다면, 뒤에 내가 받을 상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크기일 걸 빤히 알아서.
그저 그 순간을, 그 찰나의 다정을 오래 느끼고 싶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
오늘 기온은 27도. 날은 갈수록 더워졌다. 해를 더하면 더할수록 여름의 기온은 저 위로 치솟는 것 같다. 더워지는 날씨에 따라 교복 재질도 좀 얇아졌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능 따위는 탑재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애들은 조금이라도 체감 온도를 낮출 수 있는 것들을 들고 다녔다. 휴대용 선풍기라던지 얼린 물이라던지 아이스크림이라던지. 이동혁도 마찬가지였다. 아 오늘 왜이렇게 덥냐. 매점 갔다온 이동혁이 가슴팍 덮고 있는 티셔츠 펄럭이며 중얼거렸다. 안덥냐? 질문 하나 툭 던지며 어김없이 내 앞에 앉는 녀석의 손에는 몇 입 베어물어 짧아진 하드 하나 덜렁 들려있었다. 차고 단거 좋아하는 이동혁은 여름만 되면 습관적으로 그런 성질의 것들을 찾았다. 어떤 여름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컵 달고 다녀서 이동혁 어머니의 걱정을 한아름 샀던 적도 있다. 얼음 자주 먹으면 이빨 상한다던데, 그런 류의 걱정들. 하도 걱정하시길래 나까지 녀석한테 잔소리 했더니 그 다음부턴 편의점 들리는 빈도수가 확연히 줄었다. 대신 요즘은 아이스크림인 모양이었다. 나도 아이스크림 좋아라하지만 하루에 두 번 먹을 정도는 아닌데. 그래, 이동혁은 두번째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내 앞에 앉았던 것이다. 이쯤되면 내 앞자리 이동혁 줘야되는데. 그건 너무 욕심인가. 너무 갔다 싶어 바로 지워냈다.
“아까 등굣길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엉. 뭔데?”
“오늘 미역국 먹었어?”
굿바이 써머
Goodbye Summer
이동혁
/ deep.
6
초여름이라더니 어딜가도 한여름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귀엽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하지 마. 내 마음이야 그거.’
그래, 네 마음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심지어 이동혁한테만 관대해지다 못해 성인 군자가 되는 난데. 까만 줄무늬 티 입고 흑청바지에다 후드집업 눌러쓰고 우산 들고 나 데리러 온 이동혁에게 나는 찍소리 하나 못했다. 그 날의 공기는 지독하게도 어색했는데 이동혁은 다음 날이 되자마자 어색했던 우리 거리를 성큼 좁혀 놓았다. 그러니까 장난치고, 또 장난치고 또 장난치고 또 장난쳤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내가 녀석에게 감정이 단 일퍼센트도 없었을때는 싸우고 나서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방금방 싸우기 전 지점으로 돌아갔었는데. 지금은 내가 녀석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좋아하면 다 져주게 된다는 몇몇의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딴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지 몰라도 난 그랬다. 이동혁은 옛날과 같은데 내 마음만 180도 바껴버렸다. 나 혼자 어색해 죽든말든 지 말마따나 이동혁은 녀석의 말 그대로 날 계속 귀여워했다. 언행불일치란 단어는 입 밖에 꺼내지도 생각의 도마 위에 올리지도 못할 만큼 철저하게 날 귀여워했다. 여전히 귀여워서 그랬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내 기준점에선 설레는 행동들도 계속했다. 그리고 또 반복하자면 난 여전히 이동혁에게 약했다.
그때 그 비 오던 날의 계절은 영락없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아 문이란 문은 꽉 닫은 교실 안으로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낑겨 들어오는 그런 한여름이었다. 5월 말에서부터 바로 어제였던 6월 4일까지 허용되던 춘추복 혼재 기간도 지나 이제 모든 학생들이 하복을 입고 다녔다. 이동혁도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의 스타일은 좀 달랐다. 춘추복 혼용 기간이던 뭐던 간에 꼬박꼬박 교복 안에 반팔티 입는 나와는 달리 이동혁은 교복 셔츠 등교 하자마자 벗어놓고 안에 받쳐입은 반팔티 위에 어쩌다 걸치지도 않았다. 가끔가다 구시대적 교칙에 걸맞는 구시대적인 선생님들이 무어라 꾸지람을 해도 특유의 넉살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곤 했다. 교칙에 허용되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선 위를 노니는 발걸음은 가벼운듯 조심스러웠다. 달리 말하자면 이동혁은 선을 꼭 지킨단 소리다.
나와 녀석 사이에 선도, 넘을 듯, 말 듯. 이동혁은 그렇게 행동했다. 앞에 서술했던 것처럼 19년 불알친구인 나를 귀여워하는 건 맞는데 선은 꼭 지켰다. 그리고 그 지킨 선은 날카롭게도 나를 짓눌렀다. 어항 속 물고기가 물 밖으로 고개를 오래 내밀고 있을 때의 공기처럼. 에어컨 바람에도 쓸려 날아갈 것 같은 작은 내 마음에 이동혁이 지키고야 마는 그 한 줄에 불과한 선은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곤 했다. 숱한 여름을 지나 또 하나의 여름을 맞은 우리는 여전히, 엿같게도 친구를 하고 있었다. 그 선 하나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 두 명 덕분에. 이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이동혁은 가끔가다 우리 사이 놓여진 그 선을 지켜 친구 사이란 단어를 더 짙게 덧칠하고 나는 멍청하게 그 짙게 그여진 발치의 선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이 시도때도 없이 보수공사를 해대는 덕에 난 그 선이 내 발에 묻어날까 넘어갈 생각도 않고 시선으로 그 선 너머를 탐냈다. 선 넘고 싶어하면서 멍청히 서 있기만 하는 나를 스친 햇빛이 따갑게도 그 선을 비춰 아지랑이는 늘 짙게 피어올랐다. 스쳤다 생각한 햇빛은 멍청한 나를 긁고 지나갔다. 햇빛이 긁고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았다. 그래서 난 어지러울때가 많았다. 어지러워서 문득 토악질이 올라왔다.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영어 듣기를 위한 방송 점검 진행합니다. 각반 실장들은 볼륨 체크해주시고, 방송실에 와서 알려주세요.」
내 잡념 주 원동력인 이동혁 목소리가 3학년 건물을 울렸다. 고상한 클래식이 흐른다 싶더니 영어 듣기 전 으레 나오곤 하는 안내방송이 자습하느라 조용한 교실을 채웠다. 그 방송 하나에 실장인 황인준이 일어나 음량 괜찮은지 묻고 반 애들 대부분이 고개 주억거리자 빠르게 교실 문을 열고 나선다. 드르륵, 쿵. 교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풀고있던 영어 모의고사 문제로 되돌아왔다. 41번. -길게도 늘어진- 이 글에 알맞은 제목을 고르시오. 망설임 없이 아까 글을 읽은 뒤 마음속으로 점찍었던 4번에 체크 표시를 했다. 45번 문제까지 끝내고 답을 매기기 위해 빨간 색 색연필을 들고 하나씩 동그라미 쳤다. 혹여나 이동혁 목소리 한번 더 나올까 귀는 쫑긋 세운 채였다. 악, 소리 뭐야. 방송 음량 작다는 소리가 있었는지 갑자기 소리가 훅 커졌다. 여기저기서 치고들어온 다소 큰 방송 음량에 놀란 소리가 났다.
「엔지니어 실수로 음량이 너무 커져 다시 조절했습니다. 각반 실장들 다시 와서 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럴줄 알았다. 이동혁 음성이 한번 더 울렸다. 방송실 뛰어갔다온건지 땀 뻘뻘 흘리며 교실 들어온 황인준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이동혁의 말에 고개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문을 열었다. 난 개의치 않고 푼 문제들을 매겨나갔다. 머지않아 되풀이되던 영어듣기 점검 방송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또 몇분 지나지 않아 방송실을 짧은 시간 내에 두번이나 갔다온 황인준이 도착했다. 또 뛰어갔다온건지 이번에는 헉헉대면서 자기 자리 가앉았다. 점검 이후 멘트 하나 더 안할 모양인지 스피커는 잠잠했다. 그럼 이동혁은 왜 안 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도착할 것이 뻔해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의미없음을 깨닫고 펄럭펄럭 종이 넘기며 채점하는데 곧 마지막장이었다. 당연히 맞겠지, 란 심산으로 왼손에 쥐고 있던 답지와 문제지를 번갈아보는데-, 어라? 아까 그 41번 문제. 답이 3번이다. 뭐야. 이거 누가봐도 4번 아닌가? 잘 나가다 한번 미끌린 것 가지고 상심이 꽤나 컸다. 왜? 이게 왜 4번이야? 고딩들 특히 고삼 급식들 단골 멘트. 이게 왜? 이거 이게 정답 아니야? 어김없이 내 위에도 물음표 하나 떨어졌다. 이게 왜 3번인데?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45번까지 착실하게 붉은 동그라미 쳤다.
다 매겼다. 2018학년도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영어. 다 풀고 다 매겼다. 파란색 볼펜으로 푸는데 몇분 걸렸는지 적고 그 옆에 빨간 색연필로 총점 적었다. 98점. 2점짜리 문제 그래 그 41번 하나 틀렸다. 1등급. 그당시에도 1등급이고 지금에도 1등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1등급이라지만 고작 하나 틀린 것 가지고 기분 더러웠다. 이게 왜 틀린거지. 하나 틀리면, 심지어 맞다고 생각한게 틀리면 더 빡치는 법이다. 성난 마음 차분히 가다듬고 긴 줄글 다시 읽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며 해석하고 모르는 단어 찾아가며 하니 3번이 정답 맞았다. 그래. 뭐든 깊게 들여봐야 하는 법이다. 얕게 보고 정의내렸다간 큰 코 다치는거지. 내가 바보였네 더 봤어야지 2점짜리를 틀리냐 하고 문제집 덮고 그 위에 엎드려 자학할때쯤 교실 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더운 열기가 교실 안으로 들어와 시원한 공기에 엉겨붙는다. 문 열린건 몇십초 전의 일인데 빠르게 형성된 그 후텁지근한 공기에 문에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재민이 고개도 안돌리고 말한다. 야.
“문 닫아. 더워.”
“어어.”
이동혁 목소리였다. 짧디 짧은 대답에도 녀석인건 여실히도 드러났다. 난 고개 들 생각도 않고 퍼질러져있었다. 5교시 시작하기 전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었다. 얘는 또 왜이렇게 누워있어. 3분단 뒤쪽 앉아있던 나에게 가까워지는 녀석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서도 난 일어나지 않았다. 2017년에 친 영어 모의고사에 기빨려서 못일어나. 속으로 대답은 하면서도 눈 꾹 감고 입 꾹 닫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나 만끽했다. 아무 대답 없는 나 대신 오늘은 한국 지리 붙잡고 끙끙대던 나재민이 김여주 몇분 전에 엎드렸다며 한 마디 던진다. 아 그래, 하고 자기 자리 가 앉으려나 싶었는데 이동혁은 대뜸 엎어진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프냐?”
“…….”
“열은 없는데?”
그야 안아프니까. 우리 엄마가 머리 아프다고만 하면 하는 행동들을 이동혁은 내가 아무 말 않았는데도 하고 있었다. 이동혁의 손이 가볍게 머리카락에 가린 이마를 덮었다. 그 작은 행동에 비로소 열이 날것만 같았다. 야 얘 어디 아프냐? 자칫하다간 반 애들 모두한테 물어볼 것 같은, 이어진 녀석의 말에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아픈데 없어. 그냥 기빨려서 그래. 잔뜩 시들거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가자마자 이마에 위치해있던 이동혁의 손이 내 뒷통수로 옮겨간다. 맞닿아만 있어도 열 확 오르게 하는 그 손이 뒷통수에 올려지더니 부드럽게 쓱쓱, 이리저리 흩어져있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아프면 안돼. 동혁이 속상해. 낯간지러운 삼인칭까지 써가면서 이동혁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같이 등하교 할 친구 없어지면 외로울까봐? 그렇게 비꼬아 생각할 필요도 없는데. 난 그걸 꽈배기처럼 배배 꼬아 들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섣부르게 내뱉었다 녀석이 혹여나 수긍하기라도 한다면, 뒤에 내가 받을 상처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크기일 걸 빤히 알아서.
그저 그 순간을, 그 찰나의 다정을 오래 느끼고 싶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
오늘 기온은 27도. 날은 갈수록 더워졌다. 해를 더하면 더할수록 여름의 기온은 저 위로 치솟는 것 같다. 더워지는 날씨에 따라 교복 재질도 좀 얇아졌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능 따위는 탑재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애들은 조금이라도 체감 온도를 낮출 수 있는 것들을 들고 다녔다. 휴대용 선풍기라던지 얼린 물이라던지 아이스크림이라던지. 이동혁도 마찬가지였다. 아 오늘 왜이렇게 덥냐. 매점 갔다온 이동혁이 가슴팍 덮고 있는 티셔츠 펄럭이며 중얼거렸다. 안덥냐? 질문 하나 툭 던지며 어김없이 내 앞에 앉는 녀석의 손에는 몇 입 베어물어 짧아진 하드 하나 덜렁 들려있었다. 차고 단거 좋아하는 이동혁은 여름만 되면 습관적으로 그런 성질의 것들을 찾았다. 어떤 여름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컵 달고 다녀서 이동혁 어머니의 걱정을 한아름 샀던 적도 있다. 얼음 자주 먹으면 이빨 상한다던데, 그런 류의 걱정들. 하도 걱정하시길래 나까지 녀석한테 잔소리 했더니 그 다음부턴 편의점 들리는 빈도수가 확연히 줄었다. 대신 요즘은 아이스크림인 모양이었다. 나도 아이스크림 좋아라하지만 하루에 두 번 먹을 정도는 아닌데. 그래, 이동혁은 두번째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내 앞에 앉았던 것이다. 이쯤되면 내 앞자리 이동혁 줘야되는데. 그건 너무 욕심인가. 너무 갔다 싶어 바로 지워냈다.
“아까 등굣길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엉. 뭔데?”
“오늘 미역국 먹었어?”
굿바이 써머
Goodbye Summer
이동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