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결혼 로맨스 上
W . 아이스티
" 요즘 이럴 시간도 없는거 알지? 면접보러 다니느라 나도 얘들도 난리야.
스트레스 받아서 죽겠다구. "
알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숨 섞인 친구의 말에 별빛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라고 한마디 해준 별빛이는 전화를 끊고 자신이 앉아있는 테라스로 넘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다.
취업이라는 명분이 거대한 골칫거리로 바뀌어버린 이 경쟁사회에서 일자리를 얻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자신의 친구들의 별빛이는 한편으로 부러웠다.
힘들어도.. 그래도 최소한 자신의 인생을 그리기 위한 한 과정일테니까.
이 시대에 정략결혼이 웬말이냐.
정략결혼은 드라마 안에서만 존재하는 시시하고 유치한 단어인줄 알았다.
그랬던 별빛이 정략결혼을 하다니.
물론, 보장된 미래와 걱정 불안함이 없는 이 생활이 마냥 싫지만은 않지만
택운과 정략결혼을 한 이후로 별빛이는 이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자, 현관문 비밀번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을 내려놓고 현관문으로 달려가자 술에 취한건지 택운이 몸을 가누지 못한채 비틀거렸다.
" 어.. 괜찮아요? "
" 별빛씨. 미안한데 욕실에 따뜻한 물 좀 받아줘요. "
택운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가자, 그런 별빛을 내려다보던 택운이 말했다.
" 아, 네.. "
택운의 말에 별빛이는 욕실로 쪼르르 달려가 수도꼭지를 틀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나도 바쁜 회사일과 잦은 외근으로 매일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택운이 오랜만에 일찍 집에 귀가했지만
택운과 별빛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욕조에 물을 받아달라는 부탁과 그게 대한 대답뿐이였으니 별빛이는 그저 그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유모를 아림이 느껴졌다.
별빛이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기대 누워있는 택운이 보였다.
택운은 그런 별빛이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감은채로 별빛에게 말했다.
" 고마워요. 들어가서 쉬어요 "
방이든 거실이든 택운과 함께 한 공간에 있으면 어색했던 별빛이는
별 대꾸 없이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
" 답답하다.."
커다란 자신의 방에서 오버 사이즈의 침대에 걸터 앉은 별빛이 나지막히 말했다.
*
오늘따라 몸이 무거웠다.
회사에 도착하자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오후 미팅이 끝나고 나서는 급기야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택운이 몸에 이상을 느끼자 바로 생각났던 사람은 별빛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별빛이의 이름을 검색하자 금세 전화번호가 떳다.
하지만 택운은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자신의 손을 제지했다.
병원까지 운전할 힘이 없는 택운은 힘겹게 택시를 잡아 올라탔고
택시에 몸을 싣는 순간 머리가 핑- 하고 어지러웠다.
" 손님, 괜찮으세요? 보호자 없으세요? 보호자 부르는게 나을거 같은데.. "
병원에 도착해도 쉽게 일어나질 못하는 택운을 바라보며 택시기사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택운에게 말했고,
보호자라는 말에 택운은 별빛이 생각났다.
택운은 이를 악물며 일어섰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가 끝난뒤에도 쉽게 가라앉질 않는 열 때문에 택운은 링거를 맞았고
병원침대에 누워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별빛을 떠올렸다.
택운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거칠게 부정할 뿐이였다.
그나마 열이 조금 가라앉은 상태로 택운은 집에 도착했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별빛에, 택운은 자신도 모를 안도감과 포근함을 느꼈다.
그런 별빛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택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별빛이의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런 자신의 말에 쪼르르 욕실로 달려가는 별빛이의 모습에
택운은 그날 하루 처음으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었다.
온통 복잡하고 바쁘고 힘겨웠던 자신의 하루에 택운은 지쳐있었다.
소파에 누운 택운은 자신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는 별빛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 기대고 싶어...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