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처럼 맑고 투명해? 내가?"
"시끄러워, 새끼야."
등굣길에도 여전히 순영을 놀리기 바쁜 석민이 킬킬 거리자, 그의 뒷통수를 퍽 소리 나게 세게 때린 후 걸음을 재빨리하며 석민을 앞질러 갔다. 그러나 석민은 길쭉한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금방 순영을 따라잡았다. 그러자 또다시 순영이 보란 듯이 그를 앞질러 갔고, 석민은 순영을 금방 따라갔다. 이상한 기 싸움으로 시작된 빨리 앞질러 걷기는 석민이 순영의 가방끈을 쥐고 멈춰 서면서 끝이 났다.
"야, 놔라?"
"놓을게, 그대신..."
순영의 두발이 공중에 붕 뜨더니 팔은 자연스럽게 석민의 어깨를 감쌌다. 아니, 감싸야했다 라는 표현이 맞았다.
석민은 일명 '공주님 안기' 를 하고 있는 것 이다.
기겁을 한 순영이 내려달라며 허공에 두발을 동동 거리며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때렸지만, 좀처럼 내려 줄 기색이 없어 보였다.
길 한복판에 교복을 바르게 차려입은 남자 한명이 안겨있고 한명은 안고있는 꼴이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였다. 길을 걸어가던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지나가기도, 심지어는 "응원할게요." 하며 순영의 머리를 더 어지럽게 하는 말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귀 까지 빨개진 순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세게 깨물며 석민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 얼른 내려라.."
"뭐라고?"
이미 학교 교문 코 앞까지 온 석민이 태연한 연기를 하며 순영의 말을 모른 척 했다.
"병신아, 얼른 내려달라고!!!"
결국 순영이 소리를 빽빽 지르자, 교문을 향해 가던 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둘을 쳐다보더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히히덕덕 거리며 다시 교문을 향해 갔다.
순영이 목소리를 높혀야만 그의 말을 듣는 석민이 순영을 가볍게 내려줬다.
그리고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이석민이 아니다.
"어휴, 우리 형 그렇게 나 한테 안기고 싶었..."
"이제 그만해라?"
순영이 석민의 입을 다급하게 막더니 계속 터져나올 것 같은 화를 겨우 식히며, 석민을 향해 먼저 등 지더니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같은 예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석민과 순영은 한살 차이로 학년이 나뉘어졌다. 순영은 이제 졸업반이고 석민은 입시반이였다. 물론 나뉘어진건 학년만이 아니였다. 석민은 보컬과였고, 순영은 댄스과 였다.
이 둘은 학년과 과 도 다른지만 다른사람 입에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둘은 서로의 수식어가 된 것 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 이유를 순영은 전적으로 석민 때문이라고 지극히 생각한다.
그가 없었던 1학년 생활은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춤 출때 터져나오는 남자다움에 동급생과 선배 누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심지어 고백도 한달에 몇번씩 받았다.
그러나 2학년이 된 후, 석민이 보컬과로 오자마자 순영에게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여자를 안 좋아한다.' '석민과 사귄다. '라는 딱 들어도 순영이 싫어할만한 소문 말이다. 그래서 2학년때는 그 소문을 해명 하느라 바빴다면, 지금은 그 소문이 이제는 소문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렸다. 작년에 고생하며 해명 한 것은 몽땅 물거품이 된 셈이였다.
"석민이랑 계속 잘 되고있는 거 맞지?"
교실에 들어와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자마자, 들려오는 석민의 이름 두글자에 순영이 크게 한숨을 쉬더니 "어어." 하며 답을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걸 알기에 순영은 결국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인정했다.
순영은 어쩌면 그 소문을 더욱더 사실화 한 건 자신아닐까 하고 가끔 깨닫곤 한다.
"요즘 석민이 한테 여자 붙는 것 같은데~"
눈치도 없는 친구녀석이 순영의 어깨를 툭툭 건들이며 질투를 유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질투는 커녕 무심하게 친구를 바라보는 순영이였다.
여자? 그거 잘됐네.
"아 그래?"
영혼없는 대답을 하고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바짓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은 순영이 눈을 감았다.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자 마치 교실 안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돌았다.
나도 빨리 여자나 사겨야지.
순영과 같이 이상한 소문이 퍼진 석민은 별로 달라진게 없었다. 항상 여자들이 그를 따라다녔고, 가끔 그 여자무리에서 정말 예쁜 애도 있었다. 그러나 석민은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건지 그 여자애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항상 온갖 데이트란 데이트는 거절하기 바빴다.
6년동안 그와 가깝게 지냈다면 지낸 순영이인데도 한번도 석민이 여자랑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남자라도 좋아하는거 아니야...?
빠른 비트가 박히는 노랫소리와 함께 순영의 복잡한 생각이 엉키며 생각의 흐름을 방해했다. 결국 신경질적이게 이어폰을 뽑아낸 순영이 엎드린 몸을 일으키더니 작게 혼잣말을 했다.
"설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순영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 소리나게 때리더니 이마팍을 책상에 세게 박았다.
*
"덥다 더워..."
한창 대학 수시준비를 한다고 무용실에 혼자 남아 연습을 하고 있던 순영이 바닥에 몸을 쫙 펴고 누운 후, 빛나는 조명을 멍하니 쳐다봤다.
노래가 꺼진 무용실에서 불규칙적인 호흡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눈을 스르륵 감은 순영이, 무겁게 깔린 공기 속에 빠지려고 할때 쯤, 익숙한 목소리가 무용실에 작게 들려왔다.
리듬감이 있는 걸 보면 분명 노래를 부르는게 틀림없다.
"이석민 성량 하난 알아줘야 돼."
보컬연습실과 무용실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도 않지만, 그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릴 정도 이면, 석민의 노래실력이 어느정도라는 것 은 가늠할 수 있다.
"노래 좋네."
어느새 작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순영이, 그의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감았던 눈을 떴다.
"..뭐야."
눕힌 몸을 일으킨 순영이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무용실을 빠져나가 보컬연습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오늘은 더이상 연습을 해도 몸이 안 풀렸기에 평소보다 일찍 연습실을 비우는 순영이였다.
보컬연습실로 도착하자 살짝 열린 문틈으로는 여자한명이 석민과 마주 서 있는게 보였다.
그냥 문을 벌컥 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영이였지만, 괜히 열린 문틈으로 귀를 가져다대며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석민선배..내일 시간 되세요?"
"왜?"
"그,그게 가성이 잘 안되서 선배한테 배우고 싶어서요.."
"그럼 선생님한테 배워, 나 한테 이러지말고."
자신에게 말하는 말투와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에 순영이 눈썹을 씰룩 한번 움직였다. 그리고 문틈으로 그를 보았을때, 너무나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시키 정색도 할 줄 아네..?
더이상의 엿듣기는 못하겠던 순영이 문을 확 열며 "야 이석민, 가자." 라고 말 함과 동시에 아까 전 까지 굳었던 그 표정은 어디간건지 치열을 드러내며 밝게 웃은 석민이 그 여자후배를 뒤로 한 채 순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 끝났어? 나도 이제 끝났는데 가자."
그리고 그 여자 후배에게는 마지막 눈길 조차 주지도 않고 보컬연습실을 나왔다.
*
"야 근데 아까 그 여자후배 부탁은 왜 거절했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 순영은 아까 그 여자애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입밖으로 꺼냈다. 그러나 석민은 너무나도 단순하게 대답했다.
"그건 선생님이 가르쳐야지."
"멍청아, 그건 가성연습을 가정한 데이트 신청이잖아."
순영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 말을 이해한건지, 눈을 크게 뜬 석민이 "진짜?" 하고 묻자 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토끼눈을 금방 없애더니 석민이 피식 웃으며 흘리듯이 말했다.
"근데 어차피 예쁜 애는 따로 있어서."
"예쁜 애? 누구? 얼마나 예쁜데?"
처음으로 석민이 자신의 앞에서 이성의 얘기를 꺼낸 것 같아서, 순영이 질문을 연달아 했지만 석민은 웃으며 "나중에 다 말해줄게." 하며 대답을 넘겼다.
+) 오타 있으면 말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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