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9월 15일
부쩍 도련님이랑 붙어있는 시간이 늘었어.
이놈의 도련님은 공부를 언제 하는 건지 나를 졸졸 따라다녀.
"도련님! 이건 제가 할게요. 공부하세요"
"알겠어."
...
"도련님. 왜 자꾸..."
"다리가 그 마대걸레만큼 얇은 애가 자기 키만한 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닦는 모습이 신기해서."
"별게 다 신기하네요."
"나도 한번만 해보자"
"안돼요!!"
"줘."
더 말대꾸 안하고 그냥 드렸고, 덕분에 청소 처음부터 다시했어....부들부들
도련님은 수업에 들어가시고 나는 걸레를 빨러 화장실로 가고 있었는데,
"정ㄱ..!"
옛날처럼 크게 부르려다가 아차 싶어서 말을 줄이려는데 전정국이랑 눈이 마주쳤어.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더라구..
그래서 나도 잔뜩 울상이 되어서 걸레를 끌고 지나가는데...
"기숙사 계단으로 와."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말하고 전정국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버렸어.
나는 걸레를 빨아 청소도구함에 넣어두고 후다닥 기숙사계단으로 뛰어갔지.
지금이 주간시간이라 학생들은 기숙사 출입금지니까 그리로 오라고 한 것 같아.
.
.
계단에 전정국이 앉아있었어.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서 옆에 앉았고.
"이제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말했어. 처음에 어떻게 나한테 와서 지금까지 어떻게 됐는지.
내 말을 한번도 끊지 않고 전부 다 들은 전정국은 내 말이 끝나고 나서야 인상을 살짝 찌뿌렸어.
"내 의지가 아니었던 거 알지..."
"..."
"정말이야..너마저 등돌리면 나 정말 혼자 되잖아 지금처럼.."
사실 진짜로 내가 민윤기도련님이랑 사귄다고 소문이 나버린 후부터 다른 사환들은 나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어.
괜히 같이 있는 거 걸렸다가 험한꼴 당하기 싫으니까.
그리고 도련님이랑 계속 같이 있게 되어서 나 혼자 다닐 일도 없었고.
하지만 아무리 둘이 같이 있었다고 해도, 난 외로웠어.
"너가 그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거지?"
"응.."
"그럼 됐다."
"뭐가..?"
"그 마음 가지고 조금만 더 기다려."
"...?"
"내가 다시 데리고 올게."
울컥했어. 사실 요 며칠 계속 힘들었거든.
제멋대로인 민윤기 도련님 비위맞추랴.
교실에선 아가씨들 눈치, 숙소에선 다른 사환들 눈치보랴.
몸이 아니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지쳤는데,
전정국이 이렇게 먼저 다가와줘서 너무 고마웠어.
"흐흐흑..."
눈물이 안멈춰서 계속 우는데 전정국이 꼭 안아줬어.
그리고 살짝씩 토닥여주는데 이게 오히려 눈물을 못 멈추게했어.
결국 우리가 기숙사 건물을 나왔을 땐 난 눈이 부어있었고, 전정국은 와이셔츠가 젖어있었지.
20XX년 10월 12일
수능이 한 달 남았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지.
여느 날처럼, 나는 교실을 쓸고 닦고, 칠판을 닦고, 교탁에 다음 수업 때 쓸 교과서와 백묵을 준비해뒀어.
그리고 자리에 들어가려는데..
툭-
내가 발을 헛디뎌서 한 아가씨의 가방을 실수로 툭 차버렸어.
가방은 가방걸이에 매달려있기 때문에 특별히 상처가 난다거나 어디에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아가씨들이 굉장히 예민했다고 했잖아.
제대로 걸렸어.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사과하는게 되게 건방지다?"
"예..?"
"너 지금 유세떠니?"
"...?"
난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가씨가 코웃음을 쳤어.
"민윤기 여친이라고 막나가는거야? 그래봤자 넌 사환이야. 어디서 남의 가방을 뻥뻥 차대고 있어?"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그런거 아니예요 정말..."
"처신 똑바로 해. 거슬리게 하지말고."
"네..."
내 자리인 맨 뒤 구석자리로 돌아가는데 아가씨들이 찌릿하고 째려보는게 느껴졌어.
괜히 교실에 남아있다가 더 혼날까봐 청소하러 교실을 빠져나왔어.
그냥 혼날 걸 괜히 도련님 때문에 더 혼난 것 같아서 괜시리 섭섭했지.
.
.
"도련님, 제가 내일 찾아갈테니까 오늘은 기숙사 가셔서 공부하세요."
"지금 밤이 어두워. 너 데려다주고 가야지."
"저 되~게 오래걸려요! 그리고 제가 이 시간에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데요 ㅎㅎㅎ"
"내가 안 이상 너무 위험해."
"이제 곧 점호시간이거든요?! 안가시면 혼날텐데~"
"지금 몇신데?"
"10시 55분!"
"...뭐?"
"5분남았다~"
"헐 나 간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오늘따라 청소가 너무 밀려가지고 바로 체육관으로 갔지.
.
.
"전정국!!!"
"오늘은 내가 마무리할게. 가서 자라."
"됐어~ 수능이 얼마 남았다구. 너 빨리 가서 공부해."
"이정도는 해도 상관없..."
"나 데려간다며. 너 수능 못보면 내가 안따라갈건데?'
"이씨..."
"히히히..그러니까 빨리 가서 공부해. 난 너가 공부하는 모습이 제일 멋있더라"
전정국도 어쩔 수 없는 애인지 완전 자극했다가 또 달래주면 탄력받아서 열심히 하더라구.
방금도 뭐라고 하자마자 바로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공부하더라구.
내가 책도 얻어다주고, 단어시험도 봐주고, 모의고사 채점도 해주고 엄청 열심히 도와주거든~
전정국은 내가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지 ㅋㅋ
.
.
"휴...다 끝났어.너도 빨리 들어가 여기서 불편하게 공부하지 말구."
"........너 데려다 주고 갈거야."
공부하던 책에서 눈도 안떼고 얘기했어.
"빨리 들어가~ 나는 혼자 잘 들어가니까"
"내가 미쳤냐. 널 두고 혼자 들어가게."
"나 혼자 할 수 있어.."
"빨리 하기나 해. 너가 뭐라고 하든 니가 끝나야 일어날거니까"
결국 전정국은 끝까지 날 기다린 다음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고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