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불쑥 찾아온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와 관련된 물건을 보거나 그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나갈 때면 그는 조용히 내 옆으로 오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는 나를 떠나버렸고, 나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이 편지들이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것이었다. 째깍대는 초침소리와 함께 기억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와의 에피소드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나의 가정사까지 끄집어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외동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는 흔히들 말하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고 와 주는 오빠와 동생 덕에 비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학교가 마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데리러 오셨던 부모님 덕에 어두운 밤길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권리와 의무는 상응한다. 나는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만큼 엄하게 자랐다. 단 한 번도 부모님 말씀을 거른 적이 없었고, 남들 다 겪는다는 질풍노도의 시기 따위도 나에게는 오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께서 내게 무리한 요구나 부탁을 하지 않으셨던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 키우는 정성으로는 어디 가서도 뒤지실 분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 중에서도 딸 사랑은 제일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묶는 게 유행이었는데,-그렇다고 말괄량이 삐삐처럼 높게 묶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그 긴 머리를 빗고 땋는 것이 귀찮았을 법도 한데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거르신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외부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어머니의 욕심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애정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만큼 보수적이고 고집이 강하셨던 게 흠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여고에 다녔다. 나름 학구열이 높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가까운 학교라 다행이라며 좋아하셨지만, 나는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셨다. 다른 건 몰라도 그날의 기억만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나를 신문지 위에 앉히시더니 그대로 가위를 드셨다. 내 생에 첫 단발이었다. 순식간에 신문지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과 허전해진 뒤통수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수년간 길러온 머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과감한 일을 저질러버린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70년대에나 유행했을 몽실 언니 같은 머리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작품은 남자만큼 짧고 층이 많은, 단발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머리였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이나 된 애가 그깟 머리 하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느냐는 질책과 함께 내 등을 때리셨다. 그날 이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때문인지 어머니께서는 저녁 식사 도중 졸업 전까지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하라는 뜻에서 하신 일이라며 변명 같은 사과를 하셨다. 그 이후로 머리가 자라 목선에 닿을 때마다 어머니는 다시 가위를 드셨다.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그 머리로 지냈다.
나는 대학조차 내 마음대로 가지 못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했다’기보단 ‘안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었다. 빠른 취업을 원하셨던 어머니는 회계학과에 원서를 넣으셨다. 한 마디의 상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출 직전 한 마디의 통보만 있을 뿐이었다.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수준 높은 학교였지만 한눈팔지 않고 공부만 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교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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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이번 달 안으로 편지를 읽어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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