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nk-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집에 도착한 경수는 두려움에 떨며 컴퓨터를 켰다. 아직까지 기사가 안 올라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새로고침을 거듭할수록 이유 없이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대략 104번째 새로고침을 마쳤을 땐 검색어 1위에 '재벌2세 동성애자'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클릭한 한 기사는 현장의 생생함을 다 전달해주는 것 같아 이게 부디 꿈이길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었다. 경수의 전화는 불통이 됐다. 발신인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찬열, 진훈, 윤조, 종대, 민규, 심지어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때 동창들까지 앞다투어 경수의 전화기를 불통으로 만들었다. 배터리를 뽑은 뒤 망연자실하게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데 승수가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으며 경수의 방에 들어왔다.
"경수야!!!! SPX그룹 후계자 동성애자로 밝혀져. 한국도 이젠 동성애 자유 국가? 지난 주말 코엑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SPX와 백청의 합병 간담회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SPX그룹을 이끌 유일한 후계자 김종인 씨가 커밍아웃을 감행한 것이다. 여기 도승수 기자가 도경수 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집 앞에 찾아오던 페라리는 그 남자 것이었군요?"
"야!! 도승수 나가!!!"
Maid In Korea
w. 아우디
"이로 인해 그날 SPX의 주가가 급락했다. 그룹 오너 일가에서는 바닥을 친 주가를 시장가로 저가 매입하려는 수습의 움직임을 보였다. 어쩌구 저쩌구, 해서 재벌 2세의 용기 있는 사랑을 가능케 한 의문의 남자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밝혀져 대다수 네티즌들은 의외라는 반응이다. 이야, 사진 잘 나왔다. 잘생겼다 도경수. 우리 동생 남자 잘 물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아이디 gay1004gay의 한 네티즌은 둘은 결단코 세기의 커플이 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아이디 fuckinghomo의 네티즌은 저런 녀석들은 추방시켜야 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디 보소. 난 찬성인데 이 새끼가 맞을라고.. 형도 이제 인생 피는 거지?"
"아무 말도 하기 싫으니까 나가줘..."
경수는 센터를 빠져나와 종인과 나눈 대화가 아직 생생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으로 종인에게 악을 쓴 경수였다. 하지만 뻔뻔스러운 종인은 오히려 협박하는 태도를 밀고 나왔다.
"미쳤어요?"
"시끄러워."
"이제 나 어떡할 건데요!!!!"
"어떡하긴. 내 약혼 파토날 때까지 이렇게 지내는 거지."
"죽어도 이렇게 못 지내요. 빨리 다시 가서 깜짝 이벤트였다고 거짓말이었다고 해요. 빨리! 엄마, 나 장가 다 갔어 엄마..."
"너 입만 열어봐. 육백만원이고 뭐고 없어."
그놈의 돈이 뭐길래 저 약오르는 도승수에게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게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23년간 관찰한 승수는 입이 무겁긴 커녕 새털처럼 가벼웠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그나마 믿음직한 찬열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할까 해서 휴대폰을 다시 켰다. 쌓인 문자 20통 중 대부분은 '국민게이 도경수 한 턱 쏴라 마', '난 너가 골든벨 울릴 때부터 눈치챘지 복권을 탔구나! 그 복권이 재벌남이라니' 등등 남의 속도 모르고 신경을 박박 긁는 문자였다. 하나하나 읽는 걸 포기하고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열은 경직된 목소리였다.
- 야. 도경수. 너 도대체 그 새끼랑 어떻게 된 거냐?
"찬열아 그게.."
- 효진이랑 붕가뜬 새끼가 왜 대체 너랑.. 난 좀 이해가 안 된다. 배신감 들었어.
"내가 다 설명할게. 지금 만날래?"
- 오늘은 됐다. 나중에 연락할게.
경수는 찬열과 전화를 끊은 뒤에 우울해졌다. 믿었던 찬열도 게이 친구라면 질색인 것이 분명했다. 이제 친구 잃는 건 시간 문제인 거다.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승수가 다시 알짱거리며 한 술 더 떴다.
"동생. 연애담 좀 풀어봐. 남자끼리 하면 무슨 느낌이야?"
"나가라고! 나가! 나가!!"
"생각해 보니까 친구들이 니 동생 게이라고 놀리겠네.. 뭐, 괜찮아. 나도 재벌가 아가씨들 소개 가능한 거지?"
"아니. 나가. 제발 나가."
사단의 주범인 종인은 경수와 다르게 태연하게 룸에서 쉬고 있었다. 더이상 세훈은 믿을 만한 게 못 됐기에 계속해서 걸려오는 세훈의 전화를 모조리 씹고 칩거 중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버지의 당황하는 표정은 종인에게 행복으로 다가왔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프론트에서 종종 본 여직원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객실비 계산 안 하실 거면 내일 체크아웃 해주셔야겠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애초에 여긴 빌려서 쓰는 건데."
"전하라는 지시만 받아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럼 쉬세요."
여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갔다. 종인은 뭔가 착오가 있겠지 싶어서 세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깔렸다. 오래도록 받지 않고 뜸들이던 세훈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세훈아. 내일 방을 나가라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 야 넌 정말.. 뭔놈의 사고를 그렇게 치냐. 이것도 절대 내 뜻이 아니었어.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직접 전화까지 넣으셨다고. 아까 그래서 전화 건 거였는데 왜 안 받았어. 나 진짜 면목 없어서 끊는다. 미안하다...
오세훈 이게 정말 인연을 끊고 싶나보다. 아버지가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을 거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치사할 줄은 몰랐다. 종인은 화를 누르고 침착하게 호텔 프론트로 내려가 현금카드를 내밀었다.
"스위트룸 말고 스탠다드룸으로 바꿔주고 계산하기 귀찮으니까 한 달치 일시불로 긁으세요."
"손님, 죄송한데 카드에 현금이 없다는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십 년을 먹고 살아도 될 돈이 있는데. 다시 해보세요."
"다시 긁어도 똑같은데.."
급하게 애용하는 은행 VIP실 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하지만 실장은 아까 예치금 전액이 빠져나갔다면서 고객님은 이제 VIP실 이용객이 아니라고 했다. 그동안 이용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신용카드를 꺼내 건넸다. 여직원이 수차례 카드를 긁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용카드도 정지세요."
아버지가 술수를 쓴 것이었다. 종인은 급히 지갑에 현금이 얼마 있나 확인했다. 만 원 몇 장 말고는 다 무용지물인 멤버쉽 카드나 에어 마일리지 카드뿐이었다. 이 막막한 상황은 예전에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데스크의 직원들이 종인을 보며 수군거렸다.
"어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게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 사람 게이야?"
"다 들리겠어.. 조용."
종인이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꾹 다물고 방으로 돌아갔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캐리어에 눌러담고 한국에서 구입한 나머지 명품 잡화들을 넣으려는데 자리가 부족해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짜증 지수는 한도를 넘어섰고 점점 상황 정리가 됐다. 지갑엔 돈이 삼 만원 있었다. 이건 밥 몇 끼 먹으면 쫑날 돈이었다. 이미 아버지에게 매수당한 세훈이 돈을 빌려줄 리 없었고 먼 친구들에게 연락하기엔 자존심이 용납을 안 했다. 중요한 점은 당장 내일 잘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출근 당일엔 경수의 어깨가 무거웠다. 종대랑 민규는 어떻게 보지? 일은 오늘 바로 그만둬야 하는 건가? 갖가지 고민 덕에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보다 늦게 들어선 의무실에서 종대가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경수의 미소는 평소의 그것이 아니었다. 종대는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지 몇 번이나 뜸을 들였다. 결국 꺼낸 질문은 별다른 질문이 아니었다.
"일은 계속 하는 거야?"
"나 싫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주라. 다음 주면 개강이라 알바 그만두니까.."
"싫다니 무슨 소리야. 어떤 인간이 싫대? 이 형이 패줄게."
"종대야.."
경수가 주먹쥔 손으로 우는 시늉을 하며 종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지금 제일 원망스러운 종인도 수모를 당하고 있길 빌었다. 경수의 바람대로 종인은 호텔에서 강제 체크아웃을 한 뒤 유일하게 남은 자산 페라리를 끌고 드라이브 중이었다. 말이 좋아 드라이브지 목적지가 없어서 그냥 떠도는 거였다. 저녁이 됐을 때 즈음 기름은 거의 바닥이 났고 배는 고파왔다. 이렇게 위가 쓰라리는 배고픔은 자존심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습관적으로 다시 호텔 주차장으로 돌아왔지만 여긴 돌아올 곳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살아 생전 한 번도 느낄 기회가 없던 돈 없는 자의 설움을 느끼고 있는 종인이었다.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호텔 입구에서 버틴 지 한 시간 쯤 되었을까, 마침 종대와 함께 퇴근하는 경수가 눈에 들어왔다. 경수를 보자마자 해결책을 강구해낸 종인이 급하게 차에서 내려 둘을 따라잡았다.
"경수야."
경수를 부르는 소리에 경수와 종대가 일시에 뒤를 돌아봤다. 종인이었다. 경수는 이 인간이 왜 또 나타났나 싶어서 속히 꺼져달라는 뜻의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아, 음, 여기 왜 있어요..?"
"기다린다고 했잖아. 얼른 가자. 그럼 실례 좀."
종인이 종대에게 목례를 하고 경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엉겹결에 종인에게 끌려가게 된 경수는 쪽팔림에 종대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었다. 차에 가까워졌을 때 쯤 경수가 종인의 발을 콱 밟았다.
"아.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쪽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길 가잖아. 일단 타."
차에 타자마자 다른 질문을 할 새도 없이 종인이 차를 출발시켰다.
"진짜 어디 가는 거예요?"
"너네 집."
"바래다 주게요?"
"근데 있잖아."
"네."
"그, 아니다."
"뭔데요."
"아니야. 근데 혹시.."
"뭔데요.."
심상찮은 표정의 종인이 몇 번이나 말하기를 주저하자 경수는 속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종인의 침묵으로 대화가 끊기고 경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종인은 집 앞에 도착해서도 또 한 번 뜸을 들였다. 내려야 하는데 도통 하려던 말을 안 뱉으니 이젠 성질이 나는 거다.
"있잖아."
"지금 말 안 하면 나 내릴 거예요."
"오늘 좀 재워줄 수 있나?"
"아니, 멀쩡한 스위트룸을 두고 왜 우리 집에서 자요? 설마 쫓겨났어요..?"
"그렇게 됐어. 현찰도 없고 카드도 먹통에다. 아무튼 상황이 안 좋으니까 오늘만 도와주지."
머리를 갸우뚱하던 경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절차가 어떻게 됐든 하루 아침에 고용인 김종인이 빈털털이가 됐다는 건데 이 말은 즉슨..
"내 돈. 내 돈은요."
"안 떼어먹어."
"진짜죠..? 일단 내려요."
몇 일 내내 성가시게 굴던 찬열이 이젠 다른 방식으로 백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의식적으로 확인한 휴대폰엔 쌓인 문자 한 통 없었다. 부재중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휴대폰 전파가 끊긴 줄 알아 전원을 껐다 켰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슬슬 열이 받았다. 자신에게 절절매던 찬열이 무슨 생각으로 연락을 안 하는지 궁금했다. 책을 펼쳐도 박찬열이 괘씸하는 생각만 계속해서 들었다. 밥을 먹을 때도 옆에서 깐죽대던 박찬열이 없으니 괜히 허전했다. 찬열과 몇 달을 붙어있던 것도 아닌데.
저녁 때까지 제대로 마친 공부 하나 없었다. 찬열에게 먼저 전화를 걸까 말까 수십 번 고민을 했지만 뭐가 예쁘다고 먼저 전화를 걸겠는가? 백현은 집에 돌아가면서도 느림보 걸음으로 찬열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분이 아주 비참했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휴대폰 진동이 울려 바로 확인했지만 광고 문자였다. 그때 멀리서 찬열이 달려왔다. 두 시간 전부터 백현을 기다리고 있던 찬열이었다.
"너 뭐야?"
"어?"
"짜증나."
"내가 뭐 잘못했냐?"
"됐어. 가."
백현이 찬열을 지나쳐 가자 찬열이 다시 백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휴대폰이 갑자기 방전되는 바람에 하루종일 백현의 안부도 모르고 목소리도 듣지 못해서 우울했는데 정작 백현의 반응은 냉랭했다. 짝사랑의 아픔이란 이런 건가 보다.
"왜 이러는 건데. 말해라."
"너 때문에 오늘 공부 망쳤잖아."
"내가? 나 오늘 잠자코 집에만 있었는데?"
"너가 연락도.. 아, 됐어 새끼야."
"연락도 뭐. 너 설마, 오늘 연락 안 했다고 삐쳤냐?"
다시 찬열을 피해 지나가려고 했으나 찬열은 백현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대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또 오른쪽대로 막아섰다. 백현이 고개를 들어 살벌하게 노려보자 찬열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휴대폰이 맛가서 연락 못했어. 아까부터 너 계속 기다렸는데?"
"아.."
"그럼 내가 너랑 밀당이라도 할까봐?"
찬열이 표정 관리를 위해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백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루하루를 거듭할수록 백현은 어제보다 더 사랑스럽고 귀여운, 경이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지금 같은 경우는 포옹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백현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변백현아. 왜 이렇게 귀엽냐."
"됐어. 떨어져."
"나는 니가 날 모레 좋아하든 내일 좋아하든 너 계속 좋아할란다."
사실 찬열은 사포마냥 까칠한 변백현이든 뭐든 다 좋아서 문제였다.
"아들!! 아들 어딨어. 승수야. 경수 얘 어딨니?"
"엄마 나 여기.."
"너 이게 뭐니? 엄만 있지, 아줌마들이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러 갔다가 얼마 안 돼 집에 뛰어들어온 경수의 엄마가 구겨진 신문을 펼쳐보이며 한 기사를 가르켰다. 종인과 경수의 얼굴이 선명하게 프린트된 기사였다. 엄마가 끝까지 알지 못하기를 바랬건만 아줌마들의 입방정, 아니 무시무시한 기자들이 그걸 가능케 할 리 없었다. 경수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있는데 마침 샤워를 마친 종인이 머리를 탈탈 털면서 나왔다.
"여기 수압이 왜 이래?"
"어머머머. 어머. 아들!!! 이게 무슨 일이라니!! 이게 진짜라는 거야?"
경수의 엄마는 자신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종인과 고개를 푹 숙인 경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자에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 되던 둘째 아들이 동성애자임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승수가 상황을 진정시키려 발벗고 나섰다.
"엄마 침착하세요.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손주는 제가 봐드릴 테니까.."
"얘는! 둘이 당장 방으로 들어와."
경수가 어떠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던 종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둘은 엄마를 따라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경수는 이제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떤 말부터 꺼낼까 심사숙고 중이었다.
"아들. 이 상황을 엄마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봐."
"엄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니 내가 할게."
종인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경수가 눈에 힘을 주고 그만두라는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종인은 오히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뒀던 경수의 손을 잡으며 말을 계속 해나갔다. 이 인간은 정녕 이중인격자가 아닐까 의심이 가게 할 정도의 연기력이었다.
"어머니. 아니, 장모님이시지. 기사에서 보신 대롭니다. 저희를 믿고 기다려주세요."
"뭐요? 엄마, 우리 절대 아니야."
"귀염둥이는 가만히 좀 있어. 내가 말한다고."
"그래 경수 넌 좀 조용히 있어."
경수가 엄마에게 애절한 눈빛으로 이건 엄청난 사기극이라는 걸 알리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엄마의 시선은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청년 종인에게 꽂혀 있었다.
"믿어주세요. 경수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경수 어디가 좋은 거예요?"
"말씀 편하게 하시죠. 일단 우리 경수는 키가 아주 도토리처럼 쪼오오오오그만해서 안기 편해요. 좁은 어깨도 한 몫 하고요. 맞는 옷이 거의 없더라니까요."
돌려까기의 귀재가 종인의 몸에 재림했다. 뭐? 키가 작고 어깨가 좁아? 순간 발끈한 경수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이는 악 물고 말했다.
"우리 종인이는 너어무~ 너무너무 이국적이게 생기고 피부색도 동남아 스타일이라 외국인 노동자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그거 뭐야. 맞아. 글로벌 시대 적합형 리더가 될 것 같아. 최고야."
"아들... 아들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엄마가 졌어. 둘이 정말 좋아하는 게 눈에 보여."
"그리고! 그리고 경수는 청소를 어디든 너무 잘합니다. 방청소는 그냥 껌이라니까요. 화장실이고 수영장이고 청소를 아주 그냥.."
"종인이는 성격이 너무 네가지가 없어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대쉬를 안 할 것 같아. 질투할 일도 없어. 아유~ 좋아라."
"경수는 영어가 부족해서 모국어 말고 쓸 줄 아는 게 없더라고요. 애국심이 투철해 보입니다. 완벽한 제 이상형이죠."
"우리 종인이는!!"
"아들? 그만.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엄마 혼자 생각 좀 해야겠어. 둘이 그만 나가봐."
"피부가 어쩌고 저째?"
"키가 뭐 도토리요? 나 그렇게 안 작거든요? 그리고 우리 엄마한텐 거짓말 안 해도 됐잖아요!"
"뭐든 한 번 속이면 완벽하게 속여야 되는 법이야. 세상 아줌마들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몰라서 그래?"
경수가 제 방문을 쾅 닫고 종인에게 쏘아댔다. 종인이 더이상은 듣기 싫다는 듯이 경수의 말을 씹고 침대에 누워 옆에 놓여진 베개 하나를 경수에게 던졌다.
"나 침대 아니면 못 자니까 너가 아래에서 자."
"싫어요."
경수가 냉큼 침대를 비집고 들어왔다. 덕분에 종인은 벽에 바짝 붙어 불편한 자세가 됐다. 경수가 종인을 더 압박하며 몸을 움직이자 종인도 질세라 경수를 밀었다. 경수가 침대 커버를 움켜잡고 젖먹던 힘까지 사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승부는 나지 않고 이젠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싸움으로까지 번질 기세였다.
"아 비켜요!"
"비켜. 내려가서 자."
"우리 집이야!!"
"아오, 제발 좀 내려가."
바락바락 지지 않고 소리를 치던 경수가 종인의 몸 위에 떡하니 다리 한 짝을 올렸다. 종인이 몸을 일으켜 다시 역전을 이룩하려는 찰나 경수의 방에 선풍기를 놓아주려던 승수가 방문을 열었다. 묘한 자세로 누워있는 둘을 보고 당황한 승수였다.
"어.. 미안해. 하려던 거 계속해. 나 이거만 두고 나갈게."
"형. 그, 그게 아니야.."
승수가 선풍기 코드도 꽂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저기요. 휴전 신청할게요."
경수가 다리를 내려 다시 정자세로 누웠다. 둘은 그 상태로 나란히 누워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뽐냈다. 곧 불 꺼진 방 안엔 소근소근한 대화만이 들려왔다.
"언제까지 이래요?"
"될 때까지 속여."
"그 될 때가 언젠데요. 사람들이 나 알아볼까봐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겠다구요."
"내가 문제야. 넌 못생겨서 못 알아봐."
"야.."
"뭐야?"
"호. 근데 나 내일 아침에 출근하는데 집에 있게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집에 가야지. 절대 아버지한테 굴복하는 게 아니라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가는 거야."
"호랑이한테 잡아먹힌다에 50원."
"시끄러워."
종인이 경수의 입을 아프게 쥐어뜯었다. 늦은 밤 잠깐 물을 마시러 부엌에 왔던 승수는 경수의 외마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정력 한 번 좋은 녀석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수는 한 판 제대로 붙은 게 각성 효과가 됐는지 잠이 오지 않았다. 종인은 다른 이유로 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잠잠해진 것 같았던 배고픔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꼬르륵 소리를 막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배고파요..?"
"아니."
"에이~ 아님 말고."
"고파."
"고프면서 왜 아니래?"
경수는 종인 때문에 오밤중에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야 했다. 행여나 형이나 엄마가 깰까 조심조심 가스불을 켰다. 라면을 끓이는 도중에 소금을 들이부어 저번에 당한 지옥 같은 맛을 갚아줄까 고민했으나 쫄쫄 굶은 처지가 불쌍해 봐주기로 했다. 종인은 경수가 내온 라면을 순식간에 다 해치웠다. 배에 거지가 들어앉은 줄 알았다.
"이게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내가 좀 잘 끓여야지."
"니가 잘 끓여서가 아니라 내가 배고파서야."
"잘났어요."
종인이 싱크대에 그릇을 두고 올 동안 경수는 재빨리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자리를 사수했다. 하지만 곧 다시 돌아온 종인이 침대 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경수를 깔고 누웠다.
"침대가 좀 불편하네."
"에이씨! 이게 진짜. 안 비켜요?"
"어라. 거기 있었어?"
그렇게 둘의 투닥거림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
11편부터는 제 개인홈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