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의 등교 시간이 자신의 등교시간보다 조금 이르다는 것을 깨달은 찬열은 아침밥을 거르는 것이 습관이 됐다. 찬열은 자신의 행동에 별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그 남자애를 보지 않고 학교에 가면 재수가 없더라, 같은 징크스로 여길뿐이었다. 벗꽃은 만발했지만 중간 고사 기간인 게 흠이었던 어느 봄날, 찬열은 평소처럼 소년의 뒷통수를 빤히 바라보다 슬쩍 뒤를 돌아본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명찰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변백현. 그 세 글자는 뇌리에 깊게 기억됐다. 학교에서 할 게 없거나 수업이 무료해질 때면 백현의 뒷통수를 상상하거나 백현의 이름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 외에는 무료할 틈이 없었다. 학창 시절 찬열은 여자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은 여자친구를 만났었다. 그렇지만 점심 시간마다 찾아오는 예쁜 여자친구들의 재잘거림과 선물 공세가 지겹다고 느껴질 때 즈음이면 다시 백현이 생각났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삼 년간 등교 버스를 백현과 함께 탔다. 졸업하던 날엔 아쉬운 마음에 말이라도 붙일까 했지만 같은 동네라면 언젠가 다시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결심을 관뒀다. 찬열의 생각대로 우연은 일어났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백현을 만난 것이다. 열아홉의 소년이 어느덧 성년이 돼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얼떨결에 백현의 대학 동기가 된 찬열은 마음대로 백현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고, 백현과 마주볼 수도 있었다. 가장 즐거운 일은 자신 때문에 씩씩대는 백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찬열은 지난 육 년을 아로새기며 아까 백현과 나눈 키스를 떠올렸다. 막무가내로 한 키스였지만 백현의 혀가 자신의 혀가 맞닿았을 때 분명히 머릿속엔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당황스러웠다. 야동도 쭉쭉빵빵 누나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보지 않았던 찬열인데 백현에게 반응하다니. 말이 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생각에 새벽이 지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일이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경수는 경쾌한 알람에 맞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종인과 함께 종인의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샤워를 마치고 구석탱이에 처박아뒀던 쇼핑백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신상 청바지와 브이넥을 골라 입었다. 머리를 말리는데 큰 하품이 나왔다. 어제는 영국에 관한 검색을 하느라 늦게 잠들었다. 완벽한 연기를 위한 작업-사실상 얻어낸 건 쥐뿔도 없는-이었다. 천이백이라는 보수를 받아먹으면서 그 정도는 해야지 싶었다. 종인은 어제 전화로 경수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 아버지 앞에서 존댓말 쓰면 죽어. 호칭은 그냥 종인아라고 해.
"네."
- 저번에 말한 것처럼 영국 유학 중에 만났다고 해야 돼. 학교 이름 잘 들어. Bur-ming-ham University.
"뭐요? 버린햄?"
- 버, 밍, 햄. 도대체 영어를 어디서 배운 거야?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같잖은 영어 사용은 금지야.
버밍햄 대학교는 종인이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기 전까지 재학 중이던 영국의 대학교였다. 몇 달 전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러 오느라 지금은 휴학을 냈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들어갈 학교였다.
"영어 못한다고 말했잖아요. 전 대신 수학을 잘해요."
- 필요없어. 넌 작년 여름 버밍햄에 교환 학생으로 온 거야. 사실 한국이랑 그딴 거 안 하는 명문 대학이지만 아버진 모르니까 상관없어. 집안은 그냥 너 원래 사는 대로만 말해. 서민적이고 궁핍한..
"궁피입? 우리 집 무시해요?"
- 어. 아무튼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보여아 한다는 게 중요해. 알아들었어?
"장담은 못해요. 제가 사실은 여자 친구도 제대로 사귄 적이 없어서 연인 연기라는 게,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이 싸가지가 전화를 끊어?"
종인은 경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은 지 오래였다. 미운 정이 쌓이는 줄 알았는데 그 싸가지 어디 안 가서 참 다행이었다. 정오가 지난 시각 종인이 경수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던 승수가 차를 목격하곤 호들갑을 떨며 경수를 불렀다.
"야야야. 와서 저기 좀 봐봐. 우리 동네에 웬 페라리? 저거 얼말까? 간지 폭발이다."
"저거 내 친구 차야. 부럽지? 안 믿기지? 나 갔다올게 빨래 열심히 널어~"
경수가 혀를 낼름 내밀며 형 약올리기를 성공하고 집을 나섰다.
"일찍도 나오네."
"겨우 오 분 늦었거든요."
"빨리 해봐. 연습."
"연습이요?"
"연기 연습 좀 해보라고."
"아 그래도 지금은 좀.."
가끔 거울을 보며 종인의 아버지 앞에서 할 말과 행동을 연습했었지만 막상 종인에게 하려니 쑥쓰러워졌다. 경수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운전을 하던 종인이 한쪽 손으로 경수의 손을 덥썩 잡았다. 경수는 깜짝놀란 마음에 종인을 쳐다봤다.
"가서도 이렇게 놀랄 거야?"
"아뇨..."
경수가 무안해하자 종인은 손을 거둬 다시 핸들을 잡았다. 얼마 후 차는 고속도로로 빠져 쌩쌩 달리고 있는데 아침을 잘못 먹었는지 경수의 배가 아파왔다. 참아봐도 위기의 순간은 계속해서 닥쳤다. 경수는 아까 보였던 휴게소 표지판을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여기며 종인에게 휴게소에 좀 들리자고 부탁했다. 종인은 몇 일 전 꿈과 너무 흡사한 이 상황에서 그 꿈이 예지몽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옆에선 경수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 하나하나에 남자만이 가진 생리현상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반면 경수는 모든 인류가 가진 원초적인 생리현상이 일어날 것 같아 죽는 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휴게소에서 경수는 비로소 해방감을 맛봤다. 종인이 상쾌하게 볼일을 마치고 온 경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옷을 안 벗는 걸 보니 예지몽은 아니었나보다.
"왜 그렇게 봐요..? 출발 안 하세요?"
"아, 어. 해야지."
간간히 어색한 정적을 깨주는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가까워짐을 알릴수록 경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차는 공원부지처럼 보이는 곳의 정문에 다달았다. 석주에는 '(주)SPX선박 사택'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져 있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종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입구부터의 온 부지가 선박 회사 오너인 종인 아버지의 소유지였다. 대학 캠퍼스 하나를 만들어도 문제 없을 크기의 부지였다. 정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달린 후에야 큰 저택 앞에 도착했다. 경수는 태어나서 이런 관경을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운데에 길을 낸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었고 정원의 중앙엔 비너스의 조각상이 새겨진 분수가 있었다. 분수대를 지나쳐 그 길을 따라서 쭉 가면 저택의 입구였다. 큰 대리석 기둥이 양쪽에 세워져 있는 입구에선 호텔 아줌마들이 입는 메이드복과 비교도 안 되게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는 누나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복장에 걸맞게 얼굴도 예뻤다. 문이 열리자마자 검정색 나비넥타이를 한 늙은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도련님!"
"아버지는요?"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장례식 이후론 코빼기도 보이시질 않더니.."
"어머니 방 아직 그대로 있죠?"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치웠겠어요."
종인이 집사를 지나쳐 이층으로 올라갔다. 덕분에 경수 혼자 집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종인을 쫓았다. 종인은 이층에서 가장 구석진 방에 멈춰섰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방문에선 냉기가 느껴졌다. 생전에 종인의 친어머니가 머물던 방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앤틱 스타일 가구들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이상 어머니의 체취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종인의 마음을 애석하게 했다. 뒤늦게 따라온 경수가 한 액자를 들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종인을 발견했다.
"뭐 봐요?"
"어머니."
경수가 빼꼼히 액자 속의 여자를 바라봤다. 어디서 본 듯 한 그 여잔 인기 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중년 여배우였다. 종인의 아버지는 그녀가 잘 나가던 어린 시절 그녀의 외모를 보고 반했고, 헌신적인 연애 끝에 결혼까지 성공했다. 문제는 결혼 후에 180도 바뀐 그의 태도였다. 그는 금세 그녀에게 질렸고, 그녀는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삭막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종인이었다. 이혼을 원하는 그녀였지만 그룹의 이미지 때문에 이혼을 하면 악성 루머를 퍼뜨리겠단 협박을 당하며 살아왔다. 겉으론 화려한 삶을 살던 그녀는 결국 골병이 들어 얼마 전 숨을 거뒀다.
"저 이분 알아요. 티비에서 많이 봤는데! 오늘 같이 뵙는 거예요?"
"돌아가셨어."
"아..."
종인이 다시 액자를 엎어놓았다. 경수는 종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다른 곳을 구경하러갔다. 집이 너무 넓어서 미로찾기를 하는 줄 알았다.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복도 바닥은 온통 대리석으로 돼 있었다. 경수는 한참이나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니다 종인이 부르는 소리에 성급히 뛰어갔다.
"아버지 오셨대."
경수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 처음으로 동성애자 연기를 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려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았다. 무려 육백이 달린 연극이다. 꼭 해내야 했다. 일 층에 위치한 응접실엔 딱 봐도 부티기 좔좔 흐르는 유니크한 모양의 쇼파와 중앙에 활짝 핀 생화 바구니가 놓인 긴 테이블이 있었다. 소파 위에 앉은 종인의 아버지가 차를 홀짝이며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경수는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간이 쫄아 종인에게 살짝 꼈던 팔짱을 더 바짝 꼈다.
"아버지. 저희 왔는데요."
"앉아."
자리에 앉은 둘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계속 신문을 볼 뿐이었다. 경수는 속으로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드디어 종인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쇼 그만들 해."
"예?"
"아무리 생각해도 넌 같은 거 달린 사내 새낄 만날 놈이 아니야."
"무슨 소리세요. 우리 귀염둥이 들으면 오해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럽에서 카드 긁으면서 돈 흥청망청 쓴 거 모를 줄 알아? 네 녀석이 클럽 가는 이유야 뻔하지. 쇼 그만하고 약혼할 여자나 만나봐."
버밍햄이고 뭐고 질문 따위는 없었다. 고단수 종인과 십 년 전부터 종인의 거짓말에 단련된 초고단수 아버지의 심리전이 시작됐다. 경수는 엄마의 어깨 너머로 봤던 연속극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도 같았다. 가련한 여주인공과 재벌 2세와 부모님의 삼자대면. 거기서 나온 대사가 뭐였더라? 문득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건 세훈이가 불러서 간 겁니다. 그리고 누누히 말하지만 약혼녀든 정혼녀든 안 만나요."
드디어 여주인공의 정확한 대사가 떠올랐다. 경수는 종인의 손을 잡으며 600만원이 파토났을 때 절망적일 심정을 상상하고 감정을 잡았다. 몇 초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기분은 이미 매우 절망적이었다.
"아버님.. 아버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저 종인이 사랑해요. 우리 절대 못 떨어져요. 절대. 이런 절 부디 이해해 주세요. 종인아, 네가 말 좀 해봐."
경수의 속마음은 다른 대사를 읊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아무리 제 고소득을 막으셔도 저 남은 육백만원 사랑해요. 우리 절대 못 떨어져요. 절대. 돈독 오른 절 부디 용서해 주세요. 싸가지, 이젠 네 차례다.
"저는 살아생전 경수처럼 귀여운 생명체를 본 적이 없어요. 꼭 경수랑 결혼할 겁니다."
"종인아.. 감동이야."
종인과 경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애정이 불타올라 피어오른 미소라기보단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기분이 좋은 거였다. 경수가 종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앞에 앉은 종인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저번처럼 쓰러지신다면 큰일이었다.
"나 피곤해. 우리 그만 가자. 웅?"
"우리 귀염둥이 피곤하면 큰일이지. 아버지,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있어봐. 둘이 언제 만난 거야?"
"종인이랑 전 작년에 버린햄 대학교에..."
버밍햄을 버린햄이라고 버젓이 발음을 틀려버린 경수 때문에 한참 잘 속아넘어가던 종인의 아버지는 둘 사이에 흐른 순간의 어색함을 캐치해냈다. 종인이 재빨리 경수의 말을 수습했다.
"하하. 우리 경수는 농담도 귀엽게 하네. 버린햄이라니. 귀여워서 죽겠네, 정말. 작년에 경수가 버밍햄에 교환학생 왔을 때 첫눈에 반했어요."
"그럼 자네한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지.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면 아들 녀석이 가진 알레르기 정도는 알겠구만."
순식간에 경수의 머리는 백지 상태가 됐다. 갑자기 웬 알레르기? 아저씨. 여기가 병원이에요? 변명할 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데 종인이 한 술 더 떴다.
"경수가 설마 그걸 모르겠어요. 경수야?"
"아아, 그럼. 어제까지만 해도 알았는데! 근데 잠깐 까먹은 것 같아."
"그래? 그만들 나가봐."
눈치 빠른 종인의 아버지가 서툰 경수의 변명에 속아넘어갈 리 없었다. 이 순간 종인은 최후의 보루를 써야 했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난 종인은 허리를 숙여 경수를 번쩍 들어올렸다. 동화책에서 왕자님이 공주님을 안아주는 것과 흡사한 포즈였다.
"우리 애기 피곤하니까 내가 차까지 데려다줄게?"
"너가 최고야."
경수는 종인의 위기 대처 능력에 감탄해 기립 박수를 칠 뻔 했다. 종인의 아버지는 난생 처음 보는 종인의 모습과 말투에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도 종인의 완승이었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있던 경수를 조수석에 내팽겨친 종인 때문에 경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곱게 좀 내려놓지, 좀!"
"너 때문에 들킬 뻔 했잖아."
"왜 나 때문이에요?
"영어를 도대체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제대로 안 가르쳐준 그쪽 탓이죠!!"
"됐어. 덕분에 내 팔만 아팠어."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말다툼은 끊이질 않았다. 달리는 차 안이라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아저씨 앞에서 얼마나 진땀을 뺐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없다니.
"절대 내 잘못 아니에요."
"맞아."
"아니야."
"맞아."
"아, 잘났어요. 내려주세요."
"뭐?"
"아 빨리 차 세우라고요. 내려줘요."
차가 달리는 곳은 지금 내린다면 집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고속도로였다. 종인이 곧 갓길로 차를 몰았다. 사과라도 듣자고 던져본 말이었는데 정말 내려줄 생각을 하다니, 몰상식한 싸가지가 틀림 없었다. 경수가 내리지 않고 우물쭈물하자 종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안 내려?"
그렇게 경수는 모래 바람 휘날리는 고속도로 위에 홀로 남겨졌다. 주머니엔 택시비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