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한꺼번에 듣기를 추천해드립니다♡)
혜선이에게 받은 은방울꽃을 놓아버리고 일부러 영주각에 들어가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그 고백도 받아주지 않은 나를 한 장소에서 본다면 저 마음이 더 미어질 것만 같아서. 혜선이가 조금 추스러질 때까지 밖에 있기로 한 것이었다.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은 내 마음 같아보여 한숨만 짓게 만들었다.
'이틀 남았구나.'
"... 이틀."
이틀.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웃는 얼굴도, 목소리도 이틀 후면 듣지 못하는 것인데.
한이 쌓여 머무는 지상의 망령들은 천상도 안타까워 크게 손을 대지 못하는거지만, 보통의 망령들은 죽고나면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망령들이 천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지상에 떠돌면 어느날 악귀로 변해버릴 수 있음에 그런 망령들을 올바르게 천상으로 보내는 사신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된 한빈은, 차라리 혜선이가 한이 쌓여 지상에 머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그 웃는 얼굴, 목소리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테니까.
"절대 그럴 리 없다 했던 일인데."
한 사신이 명을 받고 지상에 내려갔대.
지상에 내려가 동네 한바퀴를 대충 둘러보는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더래.
익숙하다는게 이상하긴 했지만 여차저차해서 며칠 후 데리고 갈 사람 집에 도착했는데,
"... ..."
그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이 사신이 아무 말을 못하는거야.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슴 한 켠이 숨통을 죄여오면서 머리가 핑 돌더래.
그러면서 기억이 난거야.
자기가 데리고 가야 할, 그 여자가.
다름아닌 전생에 자기가 너무나도 사랑하던 여자 였다는걸.
그 기억이 나자마자 급히 다시 천상으로 올라와 사황제님께 빌고 또 빌었대.
차라리 내가 여기서 두번 죽겠다고.
그러니 지금 그 사람 만큼은, 제발 지켜달라고.
얼마나 울며불며 빌던지, 그 주변에 있던 사신들도 마음이 아파 제대로 볼 수도 없었대.
언젠가 어깨너머 들은 얘기다. 그 때는 그런 일이 있기는, 무슨. 하며 웃으며 지나쳤는데. 나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거냐. 주변을 한번 바라보다 아무도 없는 것에 발 앞에 돌멩이를 툭 차버렸다. 뭉툭한 돌멩이는 차자마자 데굴데굴 잘도 굴러가더니 누군가의 발 앞에 딱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흘깃 보니 대충 양반가 자제 정도 되는 듯 보였다. 곱상하게 생겼네. 자기 앞의 돌멩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돌멩이를 주워 한번 슥 만져보더니 찬 내 쪽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 그의 눈엔 내가 보이지도 않겠지만 이상하게 맞춰진 눈 초점에 느낌이 쎄해진다.
"... 지금 부는 바람이 돌멩이를 굴릴 정도는 아닌데."
역시, 내가 안보이니 그런 소리가 나오겠지.
"거기 나와요, 얼굴 좀 봅시다."
그 말에 내가 보이나 싶어 골목에서 나와 그의 앞까지 갔으나 역시 시선은 그 골목으로 향해있었다. 이게 안보이면서 어딜 보이는 척을 해.
"진환 선비님!"
"어, 월매 왔구나"
월매?
그 소리에 진환이라 불리는 이 양반의 눈길을 따라가니, 내가 아는 그 월매가 환히 웃으며 이리로 뛰어오고 있었다. 뭐야, 둘이.
"역시 오늘도 곱구나. 오는 길 무사했더냐."
"요 앞인걸요."
딱 달라붙어있는 그 둘을 보고 있자니 그냥 내 갈 길 가는게 낫겠다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좋을 때구나, 좋을 때야. 별 생각 없이 몇 걸음 떼었을 때,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잠시 멈추었다.
"오늘 또 우물에 빠질 뻔 했습니다. 진짜 ... 홍주 언니가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 ... 그럴리가 있겠느냐. 홍주는, ... 됐다. 이 말 하지 말고 얼른 가보자꾸나."
홍주, 홍주라. 그 우물가 말하는 것 같은데. 이름이 홍주 였나보네.
"선비님, 그래도 ... 아무리 생각해도 홍주 언니 같아요. 저번엔 제 노리개 빌려간 동생도 빠질 뻔 했어요. 오죽하면 기녀들 사이에서 제 물건, 제 향만 나도 빠진다는 소문이 돈다구요."
그러기도 하지. 매일같이 우물 안에서 사는 앤데. 냄새만 났다하면 잡아먹을라 하겠지. 우물가한테 전해줘야겠네, 사람 봐가면서 잡아넣던하라고.
"... 조금 더 있을까."
그러고보면 참 이상했다. 나는 분명 죽은 사람인데. 죽고서 이렇게 사신으로 부활한건데. 그래도 별에 별 감정을 느낀다는 것 보면, 죽어도 죽은게 아니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확 와닿는것만 같다. 발걸음은 조금씩, 조금씩 영주각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달음에 갈 수도 있는 것을 일부러 한 발, 한 발 느리게 움직였다. 불이 다 꺼진 영주각. 문을 가볍게 통과해 달빛에 비춰지는 나뭇가지 전경을 바라보다, 우물가에 걸터 앉았다. 손가락 뼈를 부딪히며 몇 번 소리를 내니, 곧바로 위로 쑥 올라와 내 옆에 앉는 우물가다.
"어딜 그렇게 다녀오셔요? 안그래도 혜선이 아까까지 울다 들어갔는데."
"방금 들어갔어?"
"방금까지는 아니고, 조금 됐어요. 그나저나. 진짜 무슨 일있었어요?"
"아, 뭐. 그냥 그런 일 있었어."
"뭐야 뭐야. 그냥 그런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홧김에 말해버리려다, 이 녀석이 내게 무슨 도움을 준다고 그냥 입을 닫았다. 손사래를 치다, 주머니에서 좋다고 받아먹던 과자를 꺼내었다. 또 보자마자 헤벌쭉 해져서는 눈이 반짝반짝 해진다. 내가 이걸 그냥 줄 것 같냐?
"약조해. 그러면 줄테니."
"무엇을요."
"월매 향만 맡고 죄없는 자들까지 끌어당기지 말 것."
"...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네 눈을 똑바로 뜨는 것."
"... 에이."
"또 하나는 아예 그 누구도 끌어당기지 않는 것."
"그런게 어딨...!!!"
그런게 어디있냐며 버럭하는 것에 싫음 말던가. 하며 과자를 주머니에 넣으려하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해보겠단다. 도대체 이게 뭐길래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지.
"약조 한거다?"
"아 글쎄, 알았다니까요."
하나를 던져주니 곧바로 받아먹고는 좋은지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와.
"홍주야."
"예, ... ... 뭐야. 내 이름, ... 알아요?"
"들리길래 들었지. 진환 선비랑 월매한테."
"... ... 진, ... 진환 선비님.."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언제고, 진환. 그 자 이름이 나오자마자 차갑게 표정이 굳어버린다. 톡 건드렸다간 금방이라도 툭 하고 울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멀뚱히 땅바닥만 바라본다.
"네 한이 그 사람의 사랑을 못 받은것이라면, 월매 대신 그 사람을 죽여야 마땅한 것 아니더냐."
"... 어떻게 그래요. ... 못해요 그건."
"... 왜?"
"날 사랑해주지 않은건 밉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직까지 사랑하는 사람또한 나처럼 만들 순 없잖아요. ... 선비님은 오래오래 행복하셔야죠. 죽으면서도 그걸 바랬어요. 선비님은 행복하시라고. 선비님한테 닥치는 사악한 것들 내가 다 받아낼테니, 선비님은 행복하시라고."
"... ..."
그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났다. 어깨너머 들었던 그 얘기가 겹쳐보였던걸까.
차라리 내가 여기서 두번 죽겠다고.
그러니 지금 그 사람 만큼은, 제발 지켜달라고.
사신
'... 나는 망령을 보살피기 위해 온 것이지, 인간과 연정을 쌓으려 온 것이 아니야.'
"... ..."
혜선은 어젯일로 하룻밤을 꼬박 샜다. 한 해전에 좋아하는 선비님이 미안하다는 연서 한 통 남기고 떠나버렸을 때도 그 당일날 하루종일 울기만 했지, 밤을 샐 정도로 슬퍼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혜선이, 밤을 샜다. 떠나버린 선비님도 아니고, 아주 가버린 부모님 때문도 아닌, 다른 누구의 눈도 아닌 오로지 자기 눈에만 보이는 그 사람 때문이었다.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귀신이라고 해야 하나. 호칭도 모호한 그 사람한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밤새 흘린 눈물때문에 퀭해진 눈은 초점없이 아슬아슬해보였다. 그런 혜선을 보고 다른 기녀들은 어제 월매한테 옷을 빌린 것을 후회하고 있어서 그렇다며 갖가지 억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혜선아, 오늘은 뜰에 안 가?"
"아, 아 가야지. 갈거야."
한참을 멍하니 있던 혜선이 옷을 갖춰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미 눈길은 익숙해졌는지 우물부터 찾았다. 물 뜨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또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었다. 또 다시 혜선의 가슴 한 켠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진정시켜 보려해도 안되는 것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던 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한 번의 눈깜빡임 없이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정신을 차리고 혜선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급히 계단을 내려와 바구니를 들었다. 최대한 그 몰래 뜰에 갈 심산이였다.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 들려오는 목소리.
"... 오늘은 뜰에 가는 날인가 보구나."
"... ..."
그 목소리에 잠깐 주춤하다, 애써 모른체하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물론, 소용은 없겠지만. 혜선의 빠른 발걸음에 혹시나 넘어져 다칠까 한빈은 계속 땅 쪽을 주시했다. 혜선은 그런 한빈도 모른 채, 앞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이 땅만 바라보다 잠깐 혜선의 얼굴을 보는데, 그 사이에 혜선이 돌부리에 발이 걸려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 조심!"
".....!"
아무도 없어서일까, 한빈은 넘어지려는 혜선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처음으로 둘의 얼굴 사이가 가까워졌다. 둘 다 놀란 모양인지 그대로 얼마간 서로를 바라보다 황급히 혜선이 먼저 그 품을 빠져나왔다. 안그래도 어색한 공기가 단숨에 더 어색해지는 것에 혜선은 아까보다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한빈은 저멀리 먼저 가버리는 혜선을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짓고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도와줄까?"
"... ... 아뇨."
"... 무거워보이는데."
"괜찮아요."
"......"
심심하거나 우울하거나 힘이 들 때면 홀로 뜰에 나가 쑥이며, 꽃이며 한아름 캐오는게 습관이 되서 그런지, 이번에도 역시나 바구니 한가득 채우고 돌아가는 길이다. 꽤나 무거워보이는 것에 한빈이 도와주려하면, 괜찮다며 한빈에게서 한걸음 옆으로 떨어진다. 한빈이 한마디를 더 할 때마다 한걸음씩. 혜선의 행동에 한빈은 그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바엔 그냥 혜선이 뒤를 걷는게 낫겠다 싶어 뒤로 물러나는데, 혜선이 발걸음을 멈추며 한빈을 불렀다.
"나리."
"... ..."
"... 나리께서는. 제가 싫으십니까?"
"... 아니."
"그러면 왜, ... 왜 그 때 제 말을 끝까지 안들으려하셨던 것입니까."
그건, ... 그건.
"... ... ... 너랑 이루어질 수가 없으니까."
이루어지고 싶어도,
"... 그럴 수 없으니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
무지개 하나가 놓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것은
미처 몰랐다
이정하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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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후 더워라. 독자님들 이 더위 어떻게 견디시나요 ㅠㅠ 저는 조만간 반건조 오징어가 될 것 같은데 말이죠 (ㅋㅋㅋㅋㅋ
아마 과거편은 다음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5편 후반, 6편 쯤에 본격적으로 현재가 나올 것 같네용. (이렇게 과거가 길게 될 줄은 저도 몰랐... 하.)
오늘도 역시나 글 봐주신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해요 정말로 ㅠㅠ
암호닉! (암호닉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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