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우리의 첫 통화이자 첫 만남의 시발점이었다.
솔직히 디자인북은 포기한 상태였다. 3일 내내 친구를 데리고 내가 잠깐이라도 스쳐 지나간 곳을 몇 번이고 훑어봤었지만 헛수고였다.
일주일이나 지났고 누군가가 발견했더라도 연락 여부는 미지수였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 또한 발견하지 못할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바닥에 굴러다녔을 디자인북을 생각하면 얼마나 망가졌을지 생생하지만 그래도 받아야 했다. 다 망가진 모습이라도 내가 간직해야 할 추억이었다.
디자인북을 가지고 있다는 젊어 보이는 음성의 남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내일 저녁 8시 버스 정류장 앞. 간단히 용건만 말하는 남자와의 통화를 끝내고 디자인북을 잃어버린 날 이후로 제일 마음 편하게 잠들었던 하루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말이 아닌 평일은 보통 디자인으로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기존에 쓰던 디자인북을 잃어버렸을뿐더러 남아있는 종이도 한 장 남짓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장만했다. 아침 9시부터 눈이 떠져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다 오후 4시쯤에야 새로운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을 찾게 되어서 그런 건지, 가슴 속 어딘가부터 올라오는 이유 모를 설렘 때문인지 그날 디자인한 구두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볼과 같은 핑크색의 아주 예쁜 구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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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는 조금 가벼운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다가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제과점에 들려 자그마한 쿠키세트를 하나 샀다. 왜인지 그 남자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담백한 버터쿠키로. 정확하다고 하기에는 2분이 모자라는 시간에 정류장에 도착했고 주변에 젊은 남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꽤 짧은 시간이라고 느꼈던 5분들이 모여 30분을 넘어가고 있을 때 저 멀리 새하얀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던 남자는 내 손에서 울리는 벨소리를 듣고 나에게 다가왔다.
"수첩 주인 맞으세요?"
"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좀 늦었죠. 여기요."
"감사합니다. 이거..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산 건데."
"이런 거 받으려고 연락드린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니요, 받아주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물물교환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고 나서 각자의 귀갓길에 올랐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부는 것 같은 따뜻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아마 그 해의 봄이 시작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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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살펴본 디자인 북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모퉁이 한 곳도 찢어진 곳이 없었다. 한두 장씩 넘기며 천천히 살펴보다 마지막 장을 보기 전에 잠이 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었다. 향긋한 버터 냄새가 가득한 꿈.
다음날,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 오후에 두 통의 문자를 받았다. 첫 문자를 확인했다.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 BTs
왈칵 눈물이 차오를 거 같았다.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고생한 일들과 묵묵히 지켜봐 주었던 부모님까지. 아마 아르바이트 중이 아니었다면 펑펑 울었을 것이다.
행복감에 취해서 다음 문자는 확인할 생각도 없이 하염없이 그 간단한 문장만 쳐다보다가 영구저장을 누른 후에 점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저 취직했어요. 이제 그만두어야 할 거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점장님은 고생이 많았다며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
짤막하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내고 아까 보지 못 했던 또 다른 문자를 확인했다.
[버터쿠키 말고, 다른 거요] - 010-1234-0309
덧붙임 같은 건 없는 문자에서 그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 민윤기 다웠다. 사실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을 일반화하자면 그 답례를 거절하는 사람은 있어도 '맘에 안 드니 바꿔달라'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뭐라고 답장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한 통의 문자가 내 당황함을 톡 하니 건드렸다.
[민윤기. 수첩 주운 사람. 모르실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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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한 회사의 인턴으로 일하는 중이라는 것과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 사람이 민윤기라는 것.
버터쿠키가 싫다면 무엇을 원하냐는 내 답장에 '밥이나 같이 먹어요'하고 전화가 왔었다. 낯선 남자와의 겸상은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불편한 기분은 느끼지 못 했다.
그 이후로도 이따금씩 같이 저녁을 먹곤 했다. 민윤기는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한 의대생이었고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좋은 감정을 가진 채로 서로에 대해 하나씩 알아갔다.
"주말에 벚꽃보러가자"
"너 나가는 거 귀찮아하잖아"
"귀찮지, 근데 꼭 보러 가야 해"
"나야 좋지. 몇 년 만에 하는 벚꽃 구경인데"
출퇴근길에 널린 게 벚꽃이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오로지 벚꽃을 보는 목적으로 간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개화시기가 한참이나 지난날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실컷 먹고 민윤기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어이없게도 우리 집 앞 빈약한 벚꽃나무 앞이었다.
벚꽃 구경을 저녁에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게다가 매일 봐서 감흥도 없는 우리 집 앞 작은 벚꽃 나무라니.
차려입은 나만 혼자 신나했던 것인지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그 민망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럽지만 조심스럽게 그가 내 손을 잡아왔기 때문에.
"난 이제 점점 더 바빠질 거야. 근데 지금 널 잡아두지 않으면 평생 놓칠 거 같아. 예쁜 벚꽃 못 보여줘서 미안해. 앞으로 맞을 봄에 이 손 꼭 잡고 같이 보러 가자"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 처럼 봄에 만났다.
사담 |
안녕하세요. 0901입니다! 좀 더 아련하게 쓰고 싶었는데 실패..ㅎㅎ 신알신과 암호닉을 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나고있네요ㅠㅠ감격스럽습니다ㅠㅠ 댓글은 사랑입니다♡ |
암호닉 |
슈 님, 민슈기 님, 웅비 님, 동글이 님, 민트 님, 카누 님, 생활과윤리 님, 헬로키티 님, 라 현 님, 가온 님, 복동 님, 버블버블 님, 민슈가 님, 민빠답없 님, 슈가탠 님, 윤기야 님, 침침 님
항상 감사드립니다.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