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연신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쭈욱 하고 폈다. 지난 한 달 간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야근은 물론이고 거의 에너지 드링크를 옆에 끼고 살았던 것 같다. 얼마 안된 신입인 나에게 그래도 초짜치고는 꽤나 좋은 퀄리티가 나왔다며 어깨를 한 번씩 치고 지나가는 팀장님의 말이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아직까지 내 이름으로 된 차 하나 마련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미련이 남아서 돈을 모으면 가장 사고 싶은 1순위가 될 것 같다. 이 나이에, 이 직급에, 라며 태클을 걸고 싶으면 나와보라고 해. 전부터 모아둔 게 얼만데. 픽픽 거리며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녀석에게 가는 통화 연결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네, 김태형입니다. 녀석은 집인지 소란스러운 잡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아마 소파 때문이겠지. 자취 시작할 때 새로 산 게 아니라 집에서 가져온 거라고 했었나, 감색 소파. 녀석의 응답에 다짜고짜 뭐해, 라고 물었다. 맨날 지겹도록 연락하는 사인데 안부같은 건 묻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이번엔 일때문에 한 달 동안 잠시 주춤했지만 그 정도야 뭐..미리 녀석에게 말해두었으니까. '나 이번에 큰 거 하나 맡았다.' '큰 거?' '어. 한 3주? 4주? 걸릴 것 같애.' '무슨 신입이..나도 해 본 적 없는 걸.' '참 나, 나는 능력있으면 안돼? 그것도 그렇지만 너는 나랑 하는 일이 다르잖아. 그래서 그렇지 뭐.' 오랜만에 막차나 첫차를 타지 않는 것이 되려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행복은 했다. 여름이라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준 버스의 내부는 정말로 시원했다. 잠이 솔솔 올 정도로. 2인석에 앉으면 나머지 비어있는 녀석의 자리 때문에 외로울 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며 그냥 혼자 앉는 자리에 엉덩이를 털썩 하고 붙여버렸다. 때가 끼어있는 차창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며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니 도시의 바쁜 불빛들이 이리저리 퍼져서 보이는 게 아찔했다. -그냥 쉬고 있어. 아 그래? 잘됐다, 그럼 술이나 한 잔 하자, 선임들과도 이미 몇 번 가진 술자리 탓에 간이 남아날 것 같진 않았지만..녀석과 축하주 한 잔 정도는 마셔도 괜찮겠지, 벌써부터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피식 피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녀석이 바로 눈 앞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마음껏 웃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한 편으로 우울해지는 건 너무 욕심이 많은 거겠지. 뒷목을 긁적이다가 앞머리로 손을 옮겼다.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이 비치는 유리창을 빤히 쳐다보다 앞머리를 대충 정리한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네." 귀로 피가 쏠리는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하차벨로 시선을 옮겼다. 누가 곧 내릴건지 빨갛게 불이 들어와있는 벨을 보고 있자니 더 당황스러웠다. 결국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나, 참. -알았어. 녀석의 망설임없는 시원한 대답이 좋았다. 옅은 미소를 띄운 채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앉아있는 상태라 그런지 생각보다 잘 들어가지 않아서 잠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살짝 일어났다. 이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타는구나..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내려야 돼, 하고서 급하게 벨을 눌렀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는 훌쩍 넘기고 있었다. 피부로 스며드는 시원한 밤공기가 녀석을 만나러 가는 길을 그다지 외롭지 않게 만들었다. '야, 너 김태ㅎ,ㅈ..?'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마. 만지지마. 제발. "아....멍청이." 어디에서 만날지 얘기를 안 해 줬네. 그래도 뭐 대충 알겠지만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를 위해서 급하게 타자를 쳤다. 요즘 녀석의 이름으로 자꾸만 떠오르는 찝찝한 기억에 기분이 왔다갔다 한다. 가끔은 구역질이 난 적도 있어서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은 적도 있었고. 뭐,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면서도 녀석이 보고싶은 마음에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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