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퓨전입니다. 거부감 있으신 분들 뒤로!
※ 5화까지 연재합니다.
무서운 익숙함 3/5
배게가 축축히 젖었다. 때 아닌 눈물바람이 돌아 배게커버를 몰래 세탁기에 넣어놓는 것도 일상이 됐다. 핸드폰에 저장된 같이 찍은 사진들은 여전히 지우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괜한 마음아픈 티 내지 않으려 카톡 프사도 바꾸고 상태메세지도 좋다! 라는 기운있는 단어로 바꿨는데 두준은 그런 사소한것은 절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이 맴돌았다. 밤이라 정면으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여자가 두준의 귀 부근에 손을 올리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이 일상이었던 순간은 이미 영화 중 한 장면 마냥 빠르게 흘렀다. 더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는 형 방이라고 밀고 들어온지 벌써 2주가 흘러갔다. 강의를 들을때 집에있고, 밤에 일을 나가는 형이라 우는 모습을 들킬일은 없었지만 혼자있는 것은 더 외롭다. 두준과 같이 살던 집에는 항상 누가 없으면 전화해서 빨리 들어오라고 할 수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공허한 집이 이렇게 쓸쓸한 건지 처음 알았다. 성규는 또 배게를 잡고, 눈물을 쏟아내었다. 또 보고싶어, 쇼파에 엎드려 누워 한가하게 티비를 보던 성규가 배게에 얼굴을 묻고서는 다른 한손으로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 음량을 높였다. 우는 소리가 울리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 더 비참했다. 분명히 잘못은 저쪽에서 했는데 내가 더 피해보는거 같아. 억울함에 또 다시 엉엉 소리내어 눈물을 흘려댄다. 순식간에 배게는 물들었다. 몇 초 마다 몸을 떨며 꺽꺽 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더 서러워 보였다. 그래, 성규는 생각보다 많이 비참했다.
ㅡ 야 윤두준 여친 생긴거 아냐? 기념으로 오늘도 술 콜?
진동이 울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한 문자는 일상단어로는 개같은 내용이었다.
너무 억울한 것은, 두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거였다. 평범하게 여자를 사귀고, 키스도 하며, 연애를 하고 있었다. 3년의 정은 잘라내듯이 끊어졌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다시 보고싶은건 성규만 그런 것 같았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도 다 하는데, 두준은 그런것을 일절히 배제하고, 자신의 일상에만 신경쓰고 있는것 같았다. 나만 이러는 거 같아, 나만 보고싶은거 같아.
ㅡ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성열을 불렀다. 극도로 우울할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지만 여자를 많이 아는 친구로서는 1등이었다. 밥을 사준다고 미끼를 던진 후, 요 앞 햄버거 가게로 불렀다. 어제부터 새로 출시된 상품이 있다고 하던데, 뭐더라? 성규는 세트메뉴 하나를 미리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아 성열을 기다렸다. 문자로 늦게오면 내가 햄버거 두개 다 먹는다, 라고 보내놨지만 실상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럴리가 없었다. 곧, 매장에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나타난 키 큰 청년은 매장을 심하게 둘러보다가 성규를 발견하고는 뛰듯이 걸어오며 앞에 자리했다.
" 야! 햄버거는! "
" 호들갑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 "
" 아 왜 낚고 그래!, 진짜 뛰어 왔네 "
" 강의는? 끝남? "
성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보나마나 또 여자랑 연락할게 분명했다. 실용음악과에서는 유명하게도 여자 킬러로 통했으니까 그닥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곧 햄버거가 나온다는 부저가 울리고, 성규는 허겁지겁 카운터로 향해 쟁반을 받아들었다. 빨간 쟁반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종종걸음으로 성규는 성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약간은 조그마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자, 성열이 곧 환호를 질렀다.
" 오예! 햄버거! "
" 너 뭐 먹을거야? 내가 돈내니까 비싼거 먹는다? "
" 치사하기는, 됐고, 부른 본론이 뭐냐? 뭔 일 났어? "
무슨 일은 아니고... 성규는 말을 꺼내기 복잡해 입을 달싹거릴 뿐 성열이 원하는 본론은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성질 급한 성열이 그런것을 봐줄리가 없었다. 당연히 몇 초 지나지 않아 큰 소리가 들려왔다.
" 아, 빨리 말해! "
" 아, 아니 기다려 봐,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야, 내가 심호흡 좀 하고 말해야 할 거 같다고. 지금. 나 심각해 임마 "
" 심각은 개뿔.. "
성열은 입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벗겨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전히 망설이며 천천히 햄버거 포장지를 뜯어내는 성규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성열은 아직까지 말을 하지 않는 성규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 푸른 햄버거 포장지를 아래로 밀고서는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우걱우걱, 네글자로 표현하면 그런 느낌일까, 성규는 성열의 눈치를 한번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한번도 여자를 소개해달라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너 게이냐?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성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성열과는 고등학교 친구였지만 고등학교때도 인기가 많았던 성열과는 다르게 성규는 여자와 있으면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여자를 보냈다. 그런 성규를 어지간히 답답히 여기는 것이 성열이었다. 급작스럽게 이런말을 꺼내면 분명히 놀릴게 뻔했지만, 성규는 한번 더 어제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괘씸한 새끼.
" ...나 여자좀 소개시켜줘 "
" 푸훕 "
볼것없이 성열은 먼저 입에 넣고 쪽 빨던 콜라를 뿜어냈다. 성규가 야이씨! 하면서 역정을 내도 성열은 기침만 해댈 뿐 확답을 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청결함을 챙기는 성규는 같이 나온 휴지로 주위를 닦아댔다. 여전히 성열의 기침소리는 크게 가게를 울렸다. 이럴 줄 알았지, 성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 켈록, 큭, 야, 너가 웬일이냐? 나 진짜 깜짝 놀랬어 "
" 그냥.. "
" 맨날 허구헌날 윤두준이랑만 쳐놀더니, 걔가 여친생겨서 너도 질수 없다 이거냐? "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지, 성규는 대충 대답하며 콜라에 꽂혀있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성열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전화기를 집어들더니, 큰 맘 먹었다는 듯이 헛기침을 해댔다.
" 그래, 해준다! "
" 진짜?, 진짜로? "
" 그래, 임마. 친구가 여자친구 한번 만들어보겠다는데, 누구 해줄까? 성희? 현아? 은경이? 지수? "
아는 애도 많다. 성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성열은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화번호부를 손으로 스크롤 해가며 여자란 여자의 이름은 다 불러대고 있었다. 여자 킬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정도로 심할줄은 몰랐네, 성규는 햄스터마냥 햄버거를 한 입 물고서는 입 안에 음미해가며 누가 좋을까, 대충 불러대는 이름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여태껏 여자를 만나온 성열의 클래스를 보아하면 얼굴은 전혀 고려할 것이 되지 않았다. 성규보다 수준이 한참 높은 아이들 밖에 없을 테니까, 성규는 다시 빨대에 입을 물고, 쪽 들이킨 후 결정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은경이 "
" 오케이!, 강은경 당첨. 야, 너 근데 소개팅이면 잘해야 한다, 어? 옷도 좀 이런 츄리닝 같은거 그만 입고, 약간 캐주얼한 정장 있잖아, 그런거 입고, 어? 알아들어? 데이트 할때 이런데로 오면 안돼, 임마. 친구로 착각하는거 아니지? 그러니까 약간 깔쌈한 카페같은데를 가라고 "
어휴, 알았어 알았어, 성규는 성열의 잔소리의 손사래를 쳐대며 답했다. 그래도 성열은 걱정되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처럼 존나 소심해서 말도 한번 못 꺼내면 완전히 꽝인거 알지? 성열의 말에 아픈 과거가 떠올랐다. 한번도 말 걸지 못한 채 여자를 배제시켜야 했던 아픔. 성규는 굳은 의지라도 다진 모양인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ㅡ
민트색 마이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당장 혼잡한 색의 머리를 교정하려면 염색부터 해야한다며 햄버거 가게에서 손을 끌고 나간 성열이 떠올랐다. 검정색 염색약을 두개나 사서 거의 탈색정도로 머리를 물들인 검정머리가 핸드폰 액정화면에 빛나며 비춰졌다. 곧 나타난 여자가 밝은 웃음을 띄며 인사를 건넸고, 성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손을 건넸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긴 생머리에 큰 눈을 가진 여자는 성규가 보았던 웬만한 여자보다 매력있고 예쁜 사람이었다. 이성열 이자식, 신경 좀 썼군. 성규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 주문해놓은 허니브레드와 카페모카를 여자쪽으로 슬쩍 밀었다. 드세요, 라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여자가 포크를 들어 생크림을 퍼서 입에 넣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규는 성규 인생의 첫 소개팅을 시작해나갔다.
" 카페모카 좋아하세요? "
" 아, 네. 저는 딱 중간을 좋아해서요 "
" 저도인데, 취향에 안 맞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
감사해요. 또 여자의 예쁜 미소가 눈에 보였다. 분명히 어느 남성이라면 여자친구로 두고싶다는 느낌을 주게하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성규는 딱히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그런 마음도 잘 들지 않았다. 그냥 윤두준 자식이 여기와서,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고 빅엿이나 쳐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어디 대학교 다니냐, 뭘 좋아하느냐, 가수 좋아하는 사람있냐, 등의 성열이 가르쳐준 기본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좀 하고, 커피를 조금씩 들이키다, 조금 지루해졌는지 성규가 먼저 일어나자고 제안을 건넸다. 여자는 여전히 제 예의 미소를 지으며 성규의 건네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꽤나 매너가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전부 성열이에게 배운것이니, 성규는 손을 약하게 부여잡고 계산대로 향했다. 성규가 지갑을 열자 여자가 급작스럽게 지갑을 열며 말을 건넸다.
" 아, 저도 돈 낼게요 "
"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
" 아니, 제 신조가 그래서요, 저도 내면 안될까요? "
" 나중에 저한테 한번 사주세요, 그러면 되죠 "
더치페이 하나로 여자의 개념을 판단하는건 무고한 짓이지만, 그래도 기본 예의가 갖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규는 여자를 극구 말리며 돈을 건네어 계산했고, 훈훈한 분위기에 다음 코스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여자의 한층 업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아는 사람을 만난 모양이었다. 잘 되려면 그 친구한테도 잘 보여야겠지, 마치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듯 성규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장 보고싶지 않은 얼굴, 그리고 가장 보고싶은 얼굴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한편으로는 잘된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못된 일이었다. 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성규 자신 역시 두준이 잘 사는 모습을 보게될테니까.
" 성규씨, 제 친구 혜미에요. 혜미야, 인사 "
" 안녕하세요, "
" 아, 네.. 안녕하세요 "
성규는 민망한 듯 뒷 머리를 긁적거렸다. 은경은 혜미와 대화를 나누다가 혜미 뒤에 있던 두준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친구분이야? 혜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단어를 뱉어냈다. 역시나, 어젯밤 본 풍경은 절대 틀린것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마주친 눈은 흔들렸다. 세차게는 아니지만 미세하게, 감정의 변화는 마음 안 부터 서서히 일고 있었다. 지루했던 인사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다가올 시간이 왔다. 혜미가 인사를 건네며 먼저 성규에게 두준을 소개했다. 역시나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3년이나 알았던 시간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급작스레 1cm도 안되었던 감정의 거리가 100m로 멀어진 느낌이 매우 이질감이 들어 싫었다. 그러나 평범할거 같았던 인사는 두준에 의해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 어? 김성규 "
" ...어..? "
" 여자친구랑 데이트 나왔냐? "
아는사이였어요? 혜미의 물음이 들리고 두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는 그저 서서 어버버, 거리다가 얼떨결에 두준의 어깨동무를 받아내었다. 친근감 있는 표현이라지만 성규에게는 아직도 연인사이의 스킨십이라 착각될 정도로 다정했다. 그런김에 같이 놀자! 두준의 음성이 들리고, 여자들의 뒤따라오는 구두소리가 들리고, 성규의 심장소리도 은근하게 들려왔다.
ㅡ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으나 더블데이트로 기정화 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성규의 입장에서는 여자둘, 남자둘 커플이었으면 좋겠지만 절대 그럴리가 없는 우리나라 사상으로써는 여전히 여자편을 들어줘야 했다. 그러나, 두준은 제 여자친구는 어디다가 내버려두고, 성규의 어깨에 팔을 올린채로 게임방에 들어서고 있었다. 약간은 어두운 조명에, 시끄러운 소음들이 귀를 강타했다. 들어서자마자 여자들은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하이톤의 소리를 내어댔고, 두준은 뒤돌아서 그럴까? 하고는 웃음을 내비쳤다. 항상 연애시절에는 스티커 사진이 싫다고 했던 성규였는데, 두준이 성규의 배려를 하나도 하지 않은 채 힘을 주어 스티커 사진기로 성규를 끌었다. 성규가 힘을 주어 가지 않으려 하자 두준이 왜? 하고 의문식의 물음을 건넸다. 알면서 모른척 하는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거야.
" 나, 나는 스티커 사진 별로 안 좋아해서 "
" 야, 그래도 예의지, 일루 와 "
결국 억지로 끌려간 성규가 우스꽝스러운 리본 머리띠를 한 채로 사진기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여자들이 좋다는 식으로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하고, 둘이 붙어 브이를 그려댔다. 성규보다 조금 키가 큰 두준은 성규를 내리 누르고 머리 위에 안착해 브이를 그렸다. 성규가 눈을 찌푸렸지만 곧 억지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 찍는 스티커 사진인데 나쁘게 나올 수는 없지. 곧 몇번의 추가촬영으로 사진 촬영이 끝나고, 꾸미는것이 끝나고, 조금 시간이 지나 사진기 아래에서는 스티커 사진이 배출되었다. 큼지막한 것 딱 4장으로 갈라진 스티커사진을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넣고, 그제야 성규는 테트리스 게임기로 발길을 돌렸다. 뒷모습을 보고 두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 어디가! "
" 테트리스 하러! "
두준은 곧 여자들을 다른 게임 하고 있으라며 보냈고, 별 불만이 없던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 게임기 앞으로 향했다. 곧 두준은 성규를 따라 테트리스 게임기 앞으로 향했다. 조그마한 철 의자에 앉아 조이스틱을 움직이는 예삿 모습에 두준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자리했다. 성규의 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두준은 미소지으며 제 자리에도 동전을 넣으며 익살스럽게 물었다.
" 오랜만에 실력 좀 볼까? "
" ..내가 그래도 넌 이겨 "
" 너가 어떻게 알아, 어! 시작했어 "
쓸데없는 대화에 날린 시간이 아까운 듯 성규는 아이! 진짜! 라는 호령을 뱉어냈고 곧 익숙하게 조이스틱과 버튼을 움직이며 블럭을 내렸다. 예삿 실력 죽지 않았네, 라는 중얼거림이 들리고, 성규는 꾸준하게 블럭을 내려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80% 정도 찬 성규의 블럭이 안타깝게 빠른 속도에 의해 굳은 블럭으로 변했다. 그에 반해 40% 정도 밖에 차지 않은 두준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분명히 내가 더 잘했는데! 성규의 마음 속 억울함이 비쳐지고, 두준은 여유롭게 만세를 외쳤다. 오기가 생긴 성규가 투덜거렸다.
" 아, 한판 더 해 "
" 좋아, 이번에는 벌칙. 오늘 밤 설거지 어때? "
" ...... "
" ...아, 맞다 "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구지 각인시켜 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런말을 뱉어서. 성규는 됐어, 하고서는 다시 조이스틱을 움직여 Restart 버튼을 눌렀다. 아까 투덜거림이나 장난식의 불만이 들린것과 다르게 이번판은 꽤나 조용했다.
ㅡ
밥까지 먹은 든든한 배에 성규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엄청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성규의 맞은편에 앉은 두준이 이래저래 많이 챙겨주거나 과하게, 또는 부담스럽게 대화주제를 이끌어 냈던 것 빼고는 전부 어색한 분위기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혜미라는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앞 모습에 성규가 서운함을 뒤로 감췄다. 옆에서 걷는 은경이 미소를 지으며 오늘 재밌었어요, 라고 대화를 이끌어내자 성규 역시 아까와 같은 영업용 미소 비스무리하게 웃으며 맞아요, 하고서는 공감을 더했다. 곧 어둑어둑한 길거리 택시정류장에 멈춰섰고, 택시를 타고가려고 보이던 앞 커플이 이상하게도, 여자만 택시에 태웠다. 곧 두준이 은경을 부르는게 느껴지고, 은경은 안녕히 계세요! 오늘 재밌었어요! 라는 말만 남긴 채 옆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곧 택시문이 닫히고, 약간은 후덥지근한 밤 거리에, 두준과 성규 둘 만이 남았다.
" 걸어가자 "
" ..나 여기서 집 멀어 "
" 그럼 데려다 줘 "
막무가내로 성규의 팔을 이끄는 힘에 성규가 뿌리치려 팔을 흔들었지만 강단있는 힘에 곧 성규는 손을 내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성규가 불만스레 소리를 내며 걸었지만 두준은 여유롭게 예전마냥 성규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었다.
" 그 여자랑은 사귀냐? "
" 아니, 아직 "
" 소개팅? 김성규 많이 발전했다. 여자 소개 받는거 죽어도 싫어하더니 "
" 너가 알 바 아냐 "
그건 그렇지, 두준은 약간의 한숨섞인 대답을 보냈다. 성규 역시 아무말 없이 잡힌 손을 그대로 끌려가듯 걷기만 했다. 헤어진 사이에 더 무슨말이 필요할까? 그저 보도블럭을 밟은 잔잔한 소리만이 들리고, 골목에 들어선 성규는 익숙한 풍경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3년간 여기서 지낸 추억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흘러들어왔다. 잡힌 손은 놓을만도 했으나 절대 놓지 않았다. 아니, 성규 역시 별로 놓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후덥지근한 온도에, 조그맣게 바람이 불고, 성규의 앞머리가 얇게 휘날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만 걸으면 나타날 빌라가 오늘따라 빨리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에 성규가 아쉬움을 아까마냥 뒤로 감췄다. 두준이 어색함을 풀려는지 헛기침을 하다가 쌩뚱맞은 소리를 꺼내었다.
" 나 여자친구랑 100일때 케잌줘라 "
" ..꺼져, 너가 사먹어 "
항상 기념일때는 케잌을 1순위로 챙기는 성규를 두고 발언한 듯 싶었다. 퉁명스럽게 답하자 두준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약간 힘을 풀었다. 빌라가 눈에 보였다. 10m 남짓 안되는 거리였다. 두준이 아쉬움이 담긴 발언을 먼저 꺼냈다.
" 여기서 이 손 놓으면 "
" ...... "
" 가겠지? 너? "
오래 사귀다 헤어진 연인은 항상 잔재가 남는다고 했다. 미련? 미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적은 감정이고,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하기에는 조금 많은 감정. 딱 중간인 잔재들이 남아 괴롭힌다고, 그것이 바로 지내온 추억이라고 했다. 이것을 전부 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두준은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도 그런 감정이라 치부했다. 3년이나 같이 지냈으니 추억은 많았고 아는것도 많았고, 주위에 있으면 사실 눈에 조금 밟혔다.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 정의하기에는 두준은 아직 서툴렀다. 성규 역시, 서툴렀다.
" ....나 간다 "
" 잘 가. "
10m 남짓 되지 않는 거리에, 두 손이 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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