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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편지 


 


 

 학창시절 교우관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탓인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에는 서툴렀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입학 첫 주에 앓았던 몸살감기는 동기들과 친해지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친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별과제에서 처음 만났던 친구인 혜정은 성격부터 옷 입는 취향까지 비슷한 점을 찾기 어려웠다. 혜정은 단 하루도 치마를 입지 않는 날이 없었고, 나는 단 하루도 치마를 입는 날이 없었다. 청순한 옷차림을 하고 긴 생머리를 날리며 걷는 혜정의 모습에 나조차도 종종 입을 벌리곤 했다. 그에 비해 나는 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티셔츠에 펑퍼짐한 청바지를 고수했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옷은 안 그래도 작은 체구를 더 왜소해 보이게 만들었다. 짧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까지, 그 모습이 꼭 형의 옷을 빌려 입은 중학생 같았을 것이다. 딱히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짧은 머리 때문이었는지 나는 혜정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를 처음 본 건 교양수업에서였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던 그는 항상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두 살 선배였던 그는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대부분의 여학생은 그가 강의실에 들어오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혜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혜정이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정 또한 그것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혜정은 틈만 나면 그의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혜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쾌한 성격에 학점까지 완벽한 그는 장학금부터 교수님들의 관심까지 한몸에 받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은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 게 이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던 나에게는 그저 잘난 선배에 불과했다. 


 

 혜정은 아니었다. 그와 친해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던 혜정은 그와 자주 마주치기 위해 그가 있는 시사 동아리에 들어갔다. 피해자는 나였다. 얼떨결에 같이 동아리에 들게 되었고, 혜정의 손에 이끌려 매일같이 얼굴도장을 찍으러 가야 했다. 혜정은 동아리 활동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혜정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신문을 읽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대화를 할 때면 혜정에게 내 존재가 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혜정은 그 언제보다 행복해 보였기에 읽었던 칼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혜정을 기다리곤 했다. 


 


 


 

 그를 따라다니기 바쁘던 혜정이 그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선배, 얘가 방금 얘기했던 제 친구예요. 너 남준 선배는 굳이 소개 안 해 줘도 알지? 내가 평소에 선배 이야기 많이 했잖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는 건 처음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신문 너머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혜정은 그런 내 반응에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그도 내색은 안 했지만 당황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잘 부탁할게.”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손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올렸다 내린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더 가까이했다. 무서운 마음을 누르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그날처럼, 봄처럼 따뜻했다. 전해지는 온기에 굳어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어느새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선배, 저는 손 잡아준 적 없었잖아요.” 

악수랑 손잡는 건 다르지. 너는 안 해줘서 서운했어?” 


 

그들은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급하게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날 이후 우연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와 마주치는 날이 늘었다. 그와의 만남이 늘 반가운 건 아니었다. 짧은 머리와 옷차림 탓에 나는 그의 타깃이 되었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짓궂은 장난을 쳤다. 자주 했던 장난은 키가 너무 작아서 땅에 붙을 것 같다며 내 머리를 꾹 누르고 가거나 위쪽 공기를 마시게 해준답시고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는 것이었는데, 얼마나 자주 했던지 이게 그만의 인사법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팔로 머리를 감싸 옆구리에 끼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유치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가끔 남자 동기들끼리 유치한 장난을 하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오고는 했는데, 막상 당하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런 것들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했다. 한 번은 그가 내 머리와 옷차림을 빌미로 남자화장실에 밀어 넣은 적이 있었다. 내가 그런 곳에 들어가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가볍게 웃어넘길 해프닝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혹여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당장 행정실로 달려가 휴학 신청서를 낼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내린 내 모습에 그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진짜 웃긴다, . 왜 그렇게 급하게 나왔냐? 천천히 있다 와도 아무도 못 알아챌 것 같은데.”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혜정은 조바심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속에서 불이 났다. 조금씩 타들어 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대신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쳤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혜정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나니 겁이 났다. 가방을 고쳐 메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동안 잠시도 그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얼핏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섭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었다. 뒤늦게 몰아치는 걱정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애써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눈을 감으면 잔뜩 성이 난 그의 얼굴이 떠올라 눈도 감지 못했다. 그의 반응을 살필 수 있을 만한 방법도 없었고, 그에게 연락할 방법은 더욱 없었다. 그런 버릇없는 짓을 한 것에 대한 변명을 만들어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이렇다 싶은 변명은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거울을 통해 본 내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초췌했다. 눈동자는 죽은 지 일주일도 더 된 생선처럼 퀭했고, 핏기없는 입술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와 함께 듣는 수업은 1교시에 있었다. 기억에 오류가 있었길 바라며 다이어리를 펼쳐 시간표를 확인해 보았지만 내 기억은 완벽했다. 시간표 맨 윗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언어와 문학을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 하늘이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깨끗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천재지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도 좋으니 어떻게든 학교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어느새 학교 정문에 도착해있었다. 그를 만나게 될 강의실이 위치한 곳을 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어깨를 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만 겁이 나는 건 여전했다. 강의실까지 가는 내내 그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늘은 내 편이 아닌 게 분명했다. 강의실 문을 엶과 동시에 강의실 밖으로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무섭게 몸을 틀어 그를 지나쳤다. 뒤돌아볼 생각도 못 하고 그와 가장 떨어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발 오늘 하루만은 조용히 넘길 수 있기를 바랐다. 


 


 


 

!”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콱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더 놀란 듯 토끼처럼 눈을 뜨고 있는 혜정이 있었다. 


 

놀랐잖아.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웃겨. 내가 저기서부터 너를 얼마나 불렀는데.” 

못 들었나 보지, .” 


 

밀려오는 민망함에 괜히 혜정의 눈을 피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평소와 다름을 알아챈 혜정이 몸을 가까이해 내 얼굴을 살폈다. 


 

어제부터 이상해, . 별거 아닌 일에 욱하고, 정신도 반쯤 나가 있고. 무슨 일이라도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니? 아니면 차였어? 혹시 너…….” 


 

혜정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이 요망한 계집애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사면 어쩌나 싶었다. 주변 눈치를 살핀 혜정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혜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그날이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에 헛웃음이 나왔다. 혜정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지? 그렇지?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 엄마가 견과류 챙겨줬는데, 이거 너 줄게. 생리할 땐 이런 게 좋다더라. 아무리 단 게 끌려도 많이 먹으면 안 좋대. 카페인도 안 좋다니까 커피도 많이 마시지 마.” 

나 원래 커피 안 좋아하잖아.” 

, 그렇지. 여하튼 배는 안 아프니? 담요라도 구해다 줄까?” 

됐네요.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혜정의 호들갑은 교수님의 등장 덕에 잠잠해졌다잠잠해진 건 혜정뿐만이 아니었다. 첫 시간에 듣는 교수님의 나른한 목소리는 자장가 같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혜정은 잠든 지 오래였다. 턱을 괴고 평화롭게 자고 있는 혜정을 보니 나까지 잠이 오는 것 같았다. 펜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펜으로 허벅지를 찔러도 보고 뺨도 때려 봤지만 한번 찾아온 잠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어제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이다. 내 수업을 망친 그를 원망하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강의는 이미 끝난 후였다. 깔끔하게 채워져 있어야 할 노트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필기만 남아있었다. 분주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혜정은 아예 엎드려 자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혜정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혜정은 잠에서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침까지 흘리며 숙면을 취하던 혜정은 등을 몇 대 맞고 나서야 꾸물거리며 일어났다. 


 

 혜정은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펜 자국을 걱정했지만 나는 못다 한 필기가 걱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음료수나 마실까 싶어 자판기로 향했다. 지갑을 꺼내려 가방에 손을 넣었다. 유리병 같은,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자판기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오렌지 주스였다. 주스가 있던 곳에 손바닥만 한 쪽지도 보였다. 노트 한쪽을 찢어 접어 만든 것이었다. 


 

어제는 미안. 

필요하면 필기 빌려줄게. 


 

 처음 보는 글씨체였지만 누구의 것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내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 그사이에 넣어두고 갔을 것이다. 내가 커피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커피 자판기 옆에 버려져 있는 종이컵이 눈에 들어왔다. 혜정도 모르는 내 취향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X자를 띄우고 있는 캔커피 대신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가방에 넣어두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오렌지 주스는 자판기의 한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가장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탄소년단/김남준] 스무 살의 봄, 첫 번째 편지 | 인스티즈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지 해제권은 징계 받은 날부터 열흘이 지나야 사용할 수 있더라고요. 오랜 시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번째 편지' 말고 '첫 번째 쪽지'로 제목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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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오셨군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서오세요, 반가워요 많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도 너무 예쁘고 먹먹한 그런 연한 남색빛의 분위기인 것 같아서 되게 좋아요. 너무 과하지도 않고 너무 연하지도 않아서 더 좋아요. 보고싶었습니다! 어서오세요!
8년 전
독자2
잔잔한 분위기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비회원247.208
정말 분위기가 은은해서 좋아요.
벌써 다음 글이 기대되요~~!!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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