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에게.
성하야. 네 이름을 여기에 적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후회가 필요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을 몇 컵이나 마셨는지도. 그러나 나는 끝내 네 이름을 이 종이에 적었다. 힘겹게 적고 나니, 네 이름을 부른 것이 이제는 힘들어질 만큼 우리는 멀리까지 온 걸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많은 것들을 버리면서 떠나온 길가에는 또 얼마나 많은, 우리와 관련된 것들이 놓여있을까.
내가 버리고 왔고, 내가 저지른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그러나 나는 돌아가기 위해 이 편지지에 네 이름을 적은 것은 아니다. 8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하루하루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던 건 너와 다른 아이들을 잊고 밀어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마을 사람들에게 밝은 척을 하고 당돌한 척, 기죽을게 없다는 티를 내고 다녔다. 그것이 악바리로 했던 짓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괜찮았던 건지 이제는 나조차도 구분이 안 된다. 그만큼 나는,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여기는 편지봉투의 주소지를 봤다 시피 남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이 말에 너는 많이 놀랄 것 같다. 너희는 내가 떠난 이유를 그 아이와 살기 위해서라고 여겼겠지. 그래서 배신감과 나라는 인간을 인연으로 여겼다는 것에 대한 후회를 번갈아 가면 느꼈겠지. 그러나 내가 적었듯이, 나는 혼자 살고 있다. 그 아이는 지금 내 곁에 없어. 너희가 기억하는 검은 머리색의 그 아이는, 내가 보내줬다.
왜 보내줬냐고? 너희를 포기하면서까지 잡았던 그 아이를, 그렇게 해서 마침내 곁에 두게 되었던 그 아이를 왜 보내줬냐고?
……사실 나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그 아이를 왜 보내줬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어쩌면,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너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는 그 아이를 나보다 잘 알지. 나한테 그 아이를 소개 시켜주었던 사람도 다름 아닌 너였으니. 나는 그 때까지 나의 변화를 너희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난 나는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너희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변했다고. 그리고 변한 내가, 그 아이를 잡아야겠다고.
그 아이는 해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조금 하얗고, 머리카락은 검었다. 조금 짧은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내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아이의 웃음에, 양쪽이 다 움푹 파이는 보조개에 가라앉고 있었다.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나는 너희에게 이별을 고했다. 정확히는 ‘변화’를 알렸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내 자신의 변화를 알리는 것이 곧 이별임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적중했다. 이 부분은 너희에게도 나에게도 아픈 부분이겠지. 그래서 적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야만 했다. 염치없음을 무릅쓰면서 까지 너에게 편지를 쓴 건, 그 아이에 관해 몇 가지 묻고 답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밉겠지. 밉다 못해 이곳까지 찾아와 당장이라도 바닷물에 빠트려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 그러나 나는 이미 가라앉고 있다. 너희도 없고 그 아이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이미 내 목을 스스로 조르고 있다. 제 목숨을 스스로 깎아먹고 있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음을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 너에게만 편지를 쓰는 건, 네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밉겠지. 10년이라는 세월을 버리고 도망친 내가 원망스럽고 증오스럽겠지.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터이니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너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미 너에게, 너희에게, 그 아이에게 죄인이니.
내가 8년 전 그 아이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을 먹고, 너희를 찾아갔을 때 너희는 나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만나고 있었다는 것도, 너희에게 말해야 했던 것도. 굳어가는 너희의 얼굴을 보며 심장을 통째로 도려내는 아픔이 느껴졌다. 너희는 내 심장 자체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잔인하게도 너희에게 말했다. 심장은 너희 것이나, 내 몸은 이제 그 아이의 것이라고. 내 말과 함께 그 때 까지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말리던 성하, 너의 손에서 힘이 툭 빠져버리던 것을 나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차마 네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내 몸을 그 아이의 것이었다. 그 아이를 위해 움직이고, 행동하고, 부서지는.
가능하다면, 내 심장을 그 자리에서 빼내어 그 곳에 두고 오고 싶었다. 그 때도 지금도 내 심장은 여전히 너희의 것이니 그래야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를 서둘러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쉴 새 없이 뛰기만 하는 덩어리였으니. 그리고 내 몸은 그 아이를 향해 갔다. 그런 내 뒷모습을 너희 셋은 지켜보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때, 주연이 나에게 외쳤다. 심장이 없으면, 넌 살 수 없어, 라고.
맞는 말이었다. 심장이 없는 지금, 나는 가라앉고 있으니까. 이런 나를 하찮고 우습게 여겨도 좋다. 너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더욱이 성하, 너에게는. 너에게 만큼은 나를 직접 짓밟고 죽일 자격이 있다. 그 손으로 나를 죽일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을 통해 나를 죽여도 된다. 예나 지금이나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혼자 죽어가고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내 목숨을 쥐고 있던 사람은 딱 두 사람. 너와 그 아이 뿐이었다. 알고 지낸지 10년이었던 너와, 알고 지낸지 1년밖에 안 되었던 그 아이. 너는 분노하겠지. 9년이라는 세월을 이겨버릴 정도로 그 아이의 존재가 나에게 강렬하고, 절대적임에 분노하겠지.
그런데 성하야, 그 아이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나는 너에게 말했듯이 그 아이에게도 나를 죽여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하얀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는 대신, 나를 떠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아이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와, 떠나는 순간 나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 내가 못 쫓아갈 거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쫓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너는, 성하야 너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니?
말이 길어졌구나. 다음 장에 더 쓰도록 할게. 부디 네가 끝까지 읽어주기를…. 답장을 하지 않더라도 좋으니, 읽어라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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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베라라고 합니다. 잠깐이라도, 끝까지 읽어준 독자분들과 끝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누군가의 반응을 얻고자 쓴 것도 아니고 제 글 실력을 과시하고자 쓰는 글도 아니오니 부디 편하게 읽으셨기를.(글 실력을 과시할 만큼 뛰어나지도 않고요...하하ㅠ)
이 글의 다음편은 이 번주 내로 올라옵니다. 저는 생각나는 대로, 쓰고싶을때 쓰는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ㅠ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을거란 보장도 없지만요ㅎㅎ그저 보관을 하는 정도로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댓글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는분들이 없으시기를.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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