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아저씨-김진표 feat. 제이레빗)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 들었다. 6살? 그래도 넌 미성년자잖아. 아저씨라 불러, 오빠 아니야.
*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학과 공부하랴 알바하랴 정신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들 놀 때 토 나올 정도로 열심히 산 덕인지, 성적도 꽤 괜찮게 나왔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교환학생에도 합격했다. 9월학기부터 1년간, 독일의 작은 소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게 됐다. 왜 하필 촌구석이야? 친구들은 서울 내의 꽤 이름있는 대학을 다니는 내가 뭐하러 교환유학까지 가면서 굳이 촌구석으로 기어들어가냐는 식으로 물었다. 서울은 너무 시끄럽잖아. 1년 동안은 좀 편하게 공부하고 외국 체험 같은 것 좀 하고 싶어서, 라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그게 7월 말의, 학교 앞 카페에서였다. * 내가 독일에 도착한 건 8월 중순이었다. 기숙사를 썼으면 하던 독일 대학 쪽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주변의 얼마 되지 않는 한인 분의 댁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말이 홈스테이지, 작은 별채를 혼자서 쓰는 거나 다름 없었다. 다만, 별채엔 방과 욕실만 있었다. 들은 바로는 시집간 딸이 쓰던 곳이라는 것 같았다. 서늘한 곳이었다. 오랜지색의 벽지가 인도풍인 듯, 근현대의 유럽풍인 듯, 애매했다.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짐을 정리하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저녁을 먹으라며 부르셨다. 그 곳 한인회 회장이셨댔나, 그랬다. 도움이 필요할 때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학기가 시작되고, 친구도 사귀고, 11월에 접어들었다. 그럭저럭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11월이 되는 동안 알게 된 거라곤, 별 생각없이 소도시 대학을 골라서 온 곳이 볼프스부르크의 홈그라운드였다는 것. 어렸을 때 축구에 환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내가 바빠지니까 취미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더더욱 이 곳은 타국이었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국. 그 날은 11월. 맑던 하늘이, 서점에서 책 서너 권을 사고, 베이커리에 들러 빵을 사서 품에 껴안고 돌아가는 길에는 구름이 껴었다. 낙엽이 뒹구는 거리가 쓸쓸해 보였다. 어휴, 나도 청승. 얼른 돌아가야지, 하며 고개를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집 앞에 차가 세워졌다. 아저씨 차는 아닌데, 하고 의아해하자, 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 구자철..."
남자가 내 쪽을 바라봤다. 아 헐. 엄마야. 엄마, 나 어떡해. 진짜 레알 구자철이 여기 있어요. 구자철은 나를 보고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나도 당황해서 뻣뻣하게 고개를 까딱이고 얼른 대문을 열려 몸으로 대문을 밀려고 했는데, 구자철이 "여기 사세요?" 하며 직접 밀어줬다. "아... 예. 여기 오신 거예요?" "예. 저녁 초대 받아서요."
웃으면서 뭔가 머쓱하기라기도 한 건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나올 때 보니까 아주머니 바쁘신 것 같더라니 그게 저녁식사 준비였나보다. "아, 혹시!"
내 품의 책을 들어주며 뭔가 떠오른 건지 좀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홈스테이하신다는 그 분?" "네."
그러고는 뭐하러 베를린이 아니라 여기까지 왔냐는 둥, 심심하진 않냐는 둥, 말이 갑자기 진짜 많아졌다. 그의 무수한 질문에 대충대충 대답하는데, 한 방 먹이고 싶어졌다. "아, 저 구자철 선수 짱 팬이었어요." "아... 진짜요...?"
내 생각대로 갑자기 조용해졌다. 뭐라고 말해야할 지를 모르는 듯 했다. 현관벨을 누르고, 아주머니께서 나오셔서 구자철을 반겨주셨다. 어머, 둘이 같이 들어온 거야? 그럼 내가 인사시켜줄 필요 없겠네.
화기애애한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구자철과 내 분위기는 화기애매였다. "아, 경기 잘 봤어요. 잘하시던데요?" "정말요? 어휴, 감사해요."
내가 대뜸 경기 잘 봤다고 말을 건내자, 젓가락도 내려놓고, 밥을 삼키고 대답했다. "근데, 몇 살이에요?" "한국에선 스물하나요." "어우, 어리네. 나랑... 6살? 얼마 전까지 완전 애기였네요." "안 그래도 고등학생 때 교복 입고 싸인회 갔더니 오빠 아니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자철 씨가." "진짜요? 제가 그랬어요?"
당연히 본인은 기억날 리가 없는 얘기였다. 그 와중에 아주머니께선, 그럼 아저씨라 불러야겠네, 본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라며 신이 나셨다. "예? 아저씨요? 저 아직 스물일곱인데 아저씨라뇨."
아주 난리가 났다. 구자철은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하고 있었고, 아주머니랑 아저씨께선 즐거우신 듯 웃고 계셨다. "아저씨."
얼음. 구자철 계속 얼음. 그리고 아주머니랑 아저씨 폭소. *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건, 친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시간이었지만, 저녁은 먹지 않고 헤졌고, 나는 코트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까맣지도, 푸르지도 않은 그 중간의 저녁시간이었다. 슬슬 가로등이 켜질 것 같았다. 아파트 앞을 지나는데, 저 앞에서 큰 형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거 뭐야, 이러고 그냥 돌아서 가려는데, 엄청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한국 억양으로. 어우, 쪽팔려.
"이 쪽 사세요?" "예. 생각보다 멀죠?" "예. 뭐..." "근데 걸어서 가는 거예요?" "예." "그 거리를 어떻게 걸어 가요. 내가 태워 줄게요. 얼른 따라와요." "아니예요."
거절하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몇 년이 지나도 무공해 청년 같은 건 여전했다. "엄마가 낯선 사람이 차 태워 준대도 타지 말랬어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얘기하자, 자신이 낯선 사람이냐며 울상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낯선 사람 아닌가. 어쩌면 내가 구자철에게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거고. "알았어요. 탈게요."
그제야 얼른 가자며 씨익, 웃었다. 저 아저씨 진짜 이상하다. 팬이었을 때도 느꼈지만, 좀 이상하긴 하다. 착한데, 이상해. "근데 진짜 애네. 엄마가 낯선 사람이 차 태워 준대도 타지 말랬다니." 혼자 웃으면서 운전을 했다. "앞 좀 제대로 봐요. 불안해서 간 쫄려요." "몇 살이랬죠? 스물둘?" "스물하나요. 아, 아저씨! 앞 좀 봐요!"
운전자가 앞을 안 보면 사고 날 것 같아서 불안하다. 내 얼굴 들여다 보며 나이를 묻는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섯살 차인데 아저씨라니..." "미성년자니까 아저씨라고 부르라면서요! 아, 빨리! 빨리 앞 좀 봐요!"
도로는 한산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빔에 돌아가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남의 나라 땅에서. 난 아직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봤고, 엄마 아빠랑 남동생이랑, 우리집 멍뭉이 코코볼한테 사랑한단 얘기도 못 했는데! "알았어요, 알았어!"
그제서야 앞으로며 운전했다. 그러더니, 내가 위니까 말 놓아도 되죠? 하더니 내 대답도 안 듣고 그 뒤로 쭈욱 말을 놓았다. 하여튼 이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