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훈] 자몽에이드
w. 열일곱청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사실 별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이성에 관심이 없는 취향이었고 그녀 역시 나에게 매달리는 등의 구질구질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때 나와 붙어있던 사람과 떨어지니 적적하기는 하네.
적적함을 달랠 곳을 찾아 한 카페로 들어섰다.
술보다는 커피가 좋았다. 뜨거운 커피가 혀를 감쌀 때 그 씁쓸함이 좋아서.
동성애자는 자신과 같은 취향의 사람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 있다면 이건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커피의 온도를 전해 받은 일회용 종이컵이 내 손을 따듯하게 데웠다.
나른하게 앉아 밝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다.
휴대폰을 들어 마땅히 연락할 사람도 없었고 할 짓도 없었다.
그냥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일만이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얼마나 있었을까.
눈앞이 햇빛으로 인해 하얗게 번져갈 때 즈음 두 남자가 나란히 들어왔다.
일전에 말했던 대로 우리는 같은 취향의 사람들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같네, 나랑.
진달래 빛의 머리를 한 남자에 눈이 꽂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담한 키에 캐주얼하게 입은 후드티와 오부 바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다. 자몽에이드 두 잔을 시키곤 맞은편에 앉은 낯선 이에게 웃어주는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다.
순수하고 또 해맑은 모습에 나는 기어코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야 말았다.
따뜻했던 커피는 차게 식어버렸다.
입 안이 쓴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히 텁텁해져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쓴 맛이 좋았는데 이제는 상큼한 자몽에이드가 좋아질 것 같다.
그는 자몽에이드 같은 사람이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그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요즘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 카페 주변의 길거리를 거닐면서 그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혹시 그의 애인과 헤어지지는 않았을까?
혹시 그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드는 기대감은 하루 온종일 하늘을 나는 것처럼 붕 뜨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의 얼굴과 목소리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불과 이틀 전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그가 좋은 거야? 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분명 아침에 나왔었는데 초저녁이 되어버렸다.
하염없이 그의 흔적을 찾으며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같은 카페였다.
그 사람이다.
약간 물이 빠져 자몽껍질의 색을 띄고 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가 앉아 있는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자몽에이드를 시켰다.
그 날 이후로 난 자몽에이드만 마시기 시작했다.
그를 닮은 상큼함을 곱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빨아들이자 입 안을 가득 메우는 청량감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가 눈치 못 채게끔 흘깃 눈을 굴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려왔던 웃는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와 나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또 현실과 마주했다.
눈가가 빨간 채로 멍 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공허해보였다.
헤어졌구나, 그와.
당장이라도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품 안에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나는 그의 앞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텅 빈 테이블이 그의 마음 같아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단 하나, 해줄 수 있는 게 생각나 행동으로 옮겼다.
자몽에이드 한 잔을 시켜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붙이고는 그의 테이블 앞에 올려놓는 일.
나를 일그러진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미소를 띠우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거짓말했다.
“입 안이 쓸 때는 이게 최고거든요. 그 쪽 많이 써 보여서.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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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열청이라고 해요!
그냥 심심하기도 하고 새롭게 글 써보려구요 이건 0-1화라서 분량 적은 편입니다ㅜㅜ
떡밥 하나 드리자면 테이블 위에 자몽에이드를 올려놓은 민규의 행동은 뭘 뜻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