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너도 이거 타? 나돈데! 아핰핰핰핰! 신난다! 흥이 오르는지 박수까지 짝짝 쳐대며 깔깔거리는 동우를 바라보는 성열의 안색이 지금 당장 귀신의 집 아르바이트를 뛰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허옇게 질렸다.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악운의 연속이라 해야할지 동우와 함께 버스에 오르게 된 성열은 금방이라도 동우가 자신을 창 밖으로 엎어치기 해버릴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사시나무 떨듯 몸을 이리저리 떨어대야만 했다. (현실상으로는 그럴 일 따위는 성규가 맨정신으로 아양을 떨며 어깨를 탈탈 털어대는 것 보다도 가능성이 현저하게 적었지만, 성열은 동우가 무서웠다. 그것도 매우.) 내 평생의 바램이 있다면 살면서 물리치료를 한번도 하지 않는거야. 처, 척추도 왠만하면 온전한 상태이고 싶어.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자신에게 아핰핰핰! 기괴한 웃음소리 따위를 건네고 있는 동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열은 정작 하고팠던 말들은 원형 고대로 삼켜넘긴 채 가식으로 똘똘 뭉친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오늘 고, 고마웠어. 너 덕분에 사, 살 수 있었어. 사실은 동우의 옆에서 심적으로는 생사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며 저승길 원정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온게 방금 전이었으나, 자꾸 가출하려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아주고 있는 생존 본능이 성열에게 그리하라고 일러주었다. 오늘 험한 꼴을 당했으니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을 겨우 겨우 손짓에 발짓까지 동원하는 바디랭귀지를 엊그제 귀화하신 제임스 브라운 씨에 빙의하여 백분 활용하며 극구 만무한 성열이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한층 편해진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등하교를 백번 천번 해대며 오가도 적응이 콩 한 알 만큼도 되지 않는 으시으시한 기운의 골목길에 들어서자 침을 꿀꺽, 목울대를 크게 울리며 삼켰다. 평소 같으면 별들이 모든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고나리질을 해대는 성종의 뒤에 붙어 난리 부르스에 테크토닉까지 곁들었을테지만 지금은 홀몸으로 어둠을 헤치고 가야한다는 점이 깊은 함정이었다. 아잌, 조금 무서운데 그래도 참을만 하다, 뭐! 아, 아닌가? 아잌, 아님 말고. 어두침침하고 갑자기 좀비가 들이닥쳐 제 다리를 앙 하고 물어뜯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으쓱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쪽팔리게도 자신을 오줌싸개가 되게끔 유도하던 (정확히 말하면 빠른 시일 내에 가까운 물리치료센터를 네이버 길찾기로 검색해봐야할 것 같던) 극도의 공포에서 벗어난 성열의 얼굴 한 편에는 안도감이 슬그머니 한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큐바! 비이- 비이- 꼬였네. 들쑥날쑥해! 아하하하하하! 사과맛 딸기맛 좋아좋아. 꺄아악!"
그 언젠가 TV 속에서 들은 적이 있던 국민 아이스크림 광고의 cm송을 흥얼거리며 자신을 억누르는 원초적인 공포감을 시원스레 날리기 위해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성열의 노력이 눈물 겹기 그지 없었다. 오물조물 쉴새없이 다물어졌다 벌어지는 입술과 함께 부산스레 주위를 살피는 눈알의 다채로운 움직임은 옵션 아닌 옵션이었다. 그 때 였다. 예민하게 오감에 육감까지 최대치로 발달시킨 채 발을 사뿐사뿐하게 놀리고 있던 성열의 귀에 뚜벅뚜벅, 조용하지만 존재감 있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어왔다. 맛이 좋은 얼..음 꽈배기 롯..데 스크..류바. 규칙적으로 뒤 쪽에서 울려퍼지는 나직한 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성열의 노랫소리가 누가 음량 조절을 하기라도 한 것 마냥 기어들어간 것 또한 한 순간이었다. 아잌, see bird! 얼음 꽈배기고 나발이고 존나 존니er 존니st 무서워죽겄다. 이러다 지, 지리겄소.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팡팡 맞으면서 소금이나 한 바가지 모으러 다녀야겄소. 인적이 드문 골목길. 그리고 바로 뒤에서 이어지는 이름 모를 타인의 발걸음. 에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설마 하는게 사람 심리인게 요 무서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반도의 흔한 해맑은 저격수에게도 적용되었는지, 성열이 콩팥의 오작동을 양껏 느끼며 안면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걸음을 빨리 하자 뒤따라오는 발소리도 다급하게 들려왔고, 느림보 거북이로 빙의하여 걷자 정체 모를 그 사람의 발도 국민 둔탱이 남우현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느려졌다. HUR? 서, 설마 페이트하악하악?! 이런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달랑 튜브 하나 주고 떨어트려도 시원찮은 새끼를 보았나! 잠깐, 장동우 님께서 친히 출동하셨는데 에이, 설마 휠체어 바퀴를 질질 끌면서 국토대장정을 강행하는 의지의 사나이로 아침 마당에 출연해서 이금희 아줌마랑 이상벽 아저씨 앞에서 눈물이나 한 바가지 쏟고 싶지 않은 이상 그러진 않을꺼 아냐. 그, 그럼 누...구? 목 뒤에 흐르는 싸한 기운이 적혈구, 백혈구와 사이좋게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혈관을 타고 흐르는게 느껴졌다. 놀이공원으로 현장학습을 떠나는 당일 아침에 강수 확률이 90%라는 일기예보를 목격한 것 마냥 시퍼렇게 얼굴이 둥둥 뜬 성열의 입이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며 열렸고, 그렇게 아이는 자신을 심해 깊숙이까지 침수시켜도 전혀 모자라지 않은 두려움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쪼, 쫄깃 쫄깃. 오도..도..도..동통통! 노-옹심, 너구..리! 너구리 한 마리 몰.. 몰고 가.. 엄마야!"
너구리 한 마리를 몰고 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너구리에게 밀렵 당하고 있다고 하는게 어울릴 법한 목소리로 바이브레이션이 그득한 cm송을 부르짖던 성열의 어깨를 갑작스레 턱 짚는 손이 느껴졌다. 아이고! 나 죽네! 사람 살려! 왈왈왈! 바로 그 순간, 타인의 손길에 몸을 일시정지 시킨 성열의 위험천만한 상황을 어떻게 요런 주옥 같은 타이밍으로 알아챘는지, 동네 암컷 개들이나 꼬시며 여기저기 쏘다니던 코코가 이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현장에 뛰어들었다. 코코야! 비호와 같은 움직임으로 날아오른 코코가 성열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던 요주의 인물에게 달려들었다. 드라마틱하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악! 요상하게도 어디선가 접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성열은 보고 말았다.
"며, 명수 형?" 그리고 이유 또한 알 수 있었다. 왜 그 정체 모를 타인의 비명이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임무를 완수한 코코의 퇴장을 뒤로 하고, 아이씨, 제 앞에서 잘생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육두문자를 곱씹고 있는 얼굴은 성열이 수업 시간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원피스 띠부띠부 씰을 모아놓은 공책을 펼치면서도, 심지어 꿈 속에서도 그리던 그 은혜로운 이목구비를 담고 있었다. 혀, 형! 오해해서 죄송해요! 나는 형인줄도 모르고, 아잌, 경찰에 신고해서 합의 따위 절대 네버 안해주고 구치소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콩밥을 먹일 뻔 했어요! 나의 사랑 너의 사랑 명느님께 삼첩반상에 따끈따끈한 신선로까지 바쳐올리지는 못할 망정 영양실조 걸리게 하루 세 끼 콩밥이라니! 그런 앙큼한 생각을 한 자신을 태평양 한 가운데에 패대기쳐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올블랙의 답답해보일 수도 있는 단조로운 패션을 비쥬얼 하나로 화려하게 살려낸 제 명느님을 감동이 뒤섞인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던 성열이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명수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 고맙다. 하마터면 매점느님이 아니라 교도소느님이 될 뻔 했구나. 어째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보이는 명수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술을 어색하게 실룩였다. 기분 나쁘게 따꼼따꼼한 엉덩이가 저번 비슷한 자리에서, 같은 시간대에 겪은 기억 (이라 쓰고 폼 잡다가 쪽팔리게 저 코코인지 뭔지 씹어먹어도 모자랄 똥개 새끼한테 엉덩이를 꽉 깨물렸던 사건이라 읽는다.) 을 친히 일깨워주는 느낌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한랭전선이 내려앉은 그 얼굴에 심장이 덜컹 크게 내려앉은 김명수 1호 빠돌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 형, 정말 죄송해요. 하고 사과에 사과를 또 얹었다. 이거 참, 모처럼 오랜만에 상봉했건만 모냥 떨어지게. 물에 젖은 솜 마냥 힘이 쭉 빠져있는 몸을 한 채 눈꼬리를 내리고 제 눈치를 살피는 꼴이 꼭 어미 찾는 새끼 강아지 같아, 명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이어나갔다.
"니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가 잘못이지. 여러모로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짓거리를 한 것도 나고." "아니에요! 형이 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럼.. 화 풀리신거에요?" "화는 무슨.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어? 그 때 교실에 왔다 가시고 그 다음부터 연락도 안하셨잖아요. 저는 그래서 형 많이 화나신 줄 알고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갔는데..."
아, 그거? 난처한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은 명수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성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슬부슬하게 손가락 사이로 감겨오는 머리칼과 영문을 몰라 동그랗게 떠진 두 눈에 입가에 걸렸던 웃음기가 더욱 진해진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 아, 쪼-오금 화났었다. 쪼금. 아잌, 형 저한테 화 같은거 못낸다고 30초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에이, 그냥 넘어가도 됐잖아. 얄밉게. 그런게 어딨어요! 형, 완전 얄짤 따위 음슴이에요. 형이야말로 엄청 얄미운거 알아요? 그렇게 잠수를 타면 어떡해요! 오물조물 움직이는 통통한 입술을 앙 깨물어보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All 1등급을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으로 받고 심지어 지금도 어딜가나 초특급 브레인으로 떠받듬을 받는 스마트 가이 답게 명수는 때를 아는 남자였다. 대신에 매끈하게 솟아있는 제 애인의 콧등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은 명수가 조근조근한 말투로 성열을 달랬다.
"실은 그런 식으로 이성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 내 자신이 어색하고 이상하기도 했고, 별거 아닌 일인데 내가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또 무섭기도 했어. 늦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과하러 왔으니까 형 봐주는거지?" "아..." "미안. 나이 먹고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서툴다, 내가." "형.." "그런 표정 짓지마. 나름 용기 내서 니 얼굴 보러 온건데, 이렇게 울상이면 내가 뭐가 돼." 물론 니가 무슨 얼굴을 하든 다 좋지만 너는 역시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쁘니까.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성열의 입가를 꾹꾹 누르다가 손가락으로 밀어올린 명수가 씨익 멋들어진 미소를 짓자, 걸어다니는 조각의 살인병기를 직통으로 목격한 성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세계 2차 대전에 내보냈으면 지구촌의 모든 호모들을 포로수용소로 제 발로 들어오게 만들었을 법한 위력에 성열은 감히 눈을 붙이고 있는 것 만으로도 황송해져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조, 존나 잘생겼어! 그리고 또 저 작업 멘트는 어떻고! 저 형은 가글 대신 설탕물로 입을 헹구나? 아잌, 눈과 귀가 떠블로 호강하는구만! 여기 김명수 골수 노예 하나 추가요! 자, 여기 선물. 왠지 모르게 묘하게 어벙한 눈으로 저만 쳐다보고 있는 성열에게 고개를 갸웃한 명수가 아이의 손에 누가 블랙덕후 아니랄까봐 자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이 거무죽죽한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핸드폰...이네요? 이윽고 제 얼굴에 도로록 따라붙는 의아한 눈초리에 명수가 주머니에서 성열의 손에 들린 것과 똑 닮은 핸드폰을 꺼내 흔들어보였다. 앞으로도 잘 봐달라는 의미로 바치는 뇌물. 우와! 제, 제가 이거 쓰면 형이랑 나랑 커플폰 쓰는거에요? 신난다! 형, 고마워요! 잘 쓸게요. 아잌, 밤에도 베개 옆에 두고 같이 잘꺼야! 눈을 반짝이며 예상을 전혀 벗겨나지 않은 활기찬 리액션을 보이는 아이와 저 사이에 꼭 맞물린 손에 시선을 둔 명수가 가슴 한 구석부터 푸슬푸슬하게 피어오르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주변에서 저마다 사랑놀이를 하며 신나는 연애질에 한창일 때, 나중에는 다 쓸모짝에도 없을 비생산적인 감정 소모라고 비웃음을 흘리던 자신이 불과 3개월 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평범하게 흘러갈 줄만 알았던 무미건조한 스물세살의 일상에 찾아든 늦깍이 첫사랑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나날이 달라져가는 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푸근한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자신의 어린 연인을 눈에 소복히 담던 명수가 별안간 손을 흔들더니 걷기 시작한다. 볼일 봤으니까 이제 간다. 앞으로 그걸로 연락할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핏이 딱 떨어지는 실루엣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 까지도 라이터로 불을 붙인 것 마냥 활활 타오르던 성열의 얼굴은 원래의 허여물구한 색으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선물 공세로 점수 한번 제대로 딴 다음에 박수칠 때 떠나는 간지작살 퇴장이라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역시 명수는 때를 아는 남자였다.
잠깐, 여기서 성열도, 우리도, 심지어 지금쯤 발정기의 청춘을 제대로 지새우고 있을 코코까지도 놓쳐버린 포인트가 하나 있었다. 질투로 열 활화산 부럽지 않게 타올랐던 자신의 속내까지도 털어놓은 명수가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성열에게 차마 터놓지 못한 딱 한가지, 들뜬 기색이 역력한 성열의 손 아래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갤럭X 플레이어가 실은 위치추적 부가 서비스에 가입되어있다는 레알 참트루의 사실. 집에 들어가 자신을 제외한 또라이 4인방과 성종에게 (차마 동우에게까지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초코파이 情이기에 이쯤에서 말을 줄이는 미덕을 보인다.) 자랑에 뽐내기까지 한껏 얹어 망원사지 자랑 4층석탑을 쌓아올릴 성열이 이미 한참 전에 집착머신 명수의 손에 떨어졌음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니, 이거 참 야단이 난 것이다. 이걸 어쩌나, 이제 막 씹덕의 늪에서 만신창이의 몸으로 벗어난 우리의 유치찬란 저격수 나리가 집착의 늪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아니, 이미 하반신 전체를 녹진하게 담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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