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아모르
“또 눈 오네.”
가만히 책을 정리하던 찬열은 종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쳐다보았다. 제법 굵어 보이는 눈송이들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이 지역에서 살기 시작한지 벌써 6년이 다 된 찬열이었지만 일 년 내내 눈이 오는 이 환경에는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햇빛을 자주 못 본 탓인지 성격도 약간 우울하게 변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으로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어두운 잿빛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찬열은 준면이 주문했던 책을 챙겨들고 외투를 껴입었다. 눈발이 더 거세지기 전에 서둘러 전해주고 올 생각이다.
“배달가려고?”
“응. 날씨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다녀오려고.”
“빙판길 조심해~”
“그래.”
찬열은 카운터에 서서 손을 흔드는 종대에게 옅게 웃어보이고는 서둘러 서점을 나왔다. 준면의 집과 찬열의 서점은 꽤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얼마 가지 않아 준면의 집이 찬열의 시야에 들어왔다. 빠른 걸음으로 마당 안에 들어서니, 창이 깨져 텅 비어있는 창틀과 그 주변에서 유리조각을 치우고 있는 종인이 보였다. 찬열이 잠시 그 자리에 멈칫하는 사이, 종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 찬열이 형이네요.”
“응.. 준면이 형이 책 주문한 게 있어서.”
“준면이 형 지금 집에 없는데, 제가 서재에 갖다놓을게요. 주세요.”
종인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찬열에게 다가왔다. 찬열은 그에게 책을 넘겨주며 물었다.
“창문은 왜 저래?”
“아..”
“무슨 일 있었어?”
“형,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얘기하지마세요.”
종인이 손에 쥔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찬열에게 속삭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찬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놈’ 이 여기로 왔어요.”
“뭐?”
“얼마나 있는지, 어디서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한 놈은 확실히 있어요. 경수가 아까 당할 뻔 했거든요.”
“...”
“여기 기후가 그 놈들한테는 적합할 테니까 언젠가 올 줄 알았지만..”
“종인아.”
찬열이 급하게 종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투에 달린 후드를 썼다. 종인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잘 알았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할게.”
“..아, 네.”
“나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겠다. 미안.”
종인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찬열은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런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종인은 집 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그만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밖에 바람 많이 불지? 눈발이 더 굵어지네.”
찬열이 거의 뛰다시피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자, 사다리 위에 앉아 책을 정리하던 종대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찬열은 그런 종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하얗게 김이 서린 안경을 벗으며 서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옷에 묻은 눈도 제대로 털어내지 않고 책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그의 모습에 종대가 경악을 하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눈 좀 털어! 책 젖으면 어떡하려고!”
“종대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문 닫자.”
“..어?”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일찍 닫았으면 좋겠는데.”
“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뒷정리 내가 할게. 먼저 올라가.”
“아니야, 뭐 좀 찾을 것도 있고 그냥 내가 뒷정리할게. 너 먼저 퇴근해.”
“너 아프다며. 내가 도와줄게.”
“아냐, 그냥 먼저 들어가. 괜찮아.”
약간의 실랑이 끝에, 찬열은 기어이 종대를 서점에서 내보내고 서점의 문을 모조리 걸어 잠갔다. 불마저 다 꺼버리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눈에 언뜻 붉은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앞에 앉아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사를 바라보던 민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의사는 민석의 병에 대해, 심리 상태에 대해 무척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막상 그 당사자는 그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감흥도 없었다. 민석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을 섞어가며 열띠게 떠들어대는 의사의 입에 앞에 놓인 서류들을 구겨 넣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매번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할 바엔 차라리 치료를 포기하고 그냥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민석군, 지금 기분은 어때요? 여전히 마음이 많이 복잡한가요?”
“의자가 너무 딱딱해요.”
“..예?”
“집에 가고 싶어요.”
뜬금없는 민석의 발언에 의사는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민석은 그런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는 턱을 괸 채 창밖을 응시했다. 눈발이 금세 더 굵어졌다.
“제가 지금 무지 피곤한데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만 하죠, 선생님.”
“예?”
“가볼게요.”
민석은 예의상 꾸벅 인사를 건넨 뒤 성큼성큼 문을 열고 진료실을 나갔다. 뒤에서 민석을 부르는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민석은 그것을 그냥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앞으로 이 병원에서 치료 받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닫힘 버튼을 연속해서 누르며 빨리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데, 금발머리의 남자가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민석의 눈에 들어왔다. 민석이 괜한 심술을 부려 계속해서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금발머리의 남자는 운 좋게도 문이 막 닫히기 직전 그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하다며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에 민석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민석은 멍하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고, 옆에 탄 남자는 그런 민석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민석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괜히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어색한 침묵을 깨며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민석은 그 목소리에 저절로 인상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제일 피하고 싶었던 일인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아뇨."
"그렇죠? 근데 이상하게 낯이 너무 익어서요."
맑게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민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이 발끝을 내려다보는데 얼마 안 가 '1층입니다' 하는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민석이 한 발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뒤따라 내리던 금발머리가 불쑥 외쳤다.
"제 이름, 루한이에요."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민석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생긴건 멀쩡해서 얘도 어디 정신이 아픈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남자의 정신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민석이었다. 루한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맑게 웃고 있었고, 민석은 그런 그를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다가 "네." 하고 짧은 대답을 하며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렇게 병원 문을 열고 나오는데, 뒤에서 언뜻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사이면서 왜 저리 친한 척을 하는지 민석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찬열은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구름이 걷힌 것인지 환한 달빛이 찬열의 방에 가득 들어찼다. 이상하게도 해는 잘 안 뜨면서 달만큼은 자주 밝게 떠오르는 것이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였다. 마루에 스며드는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찬열은 똑바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그렇게 가만히 숨을 고르는데, 복부부터 가슴 부분이 갑자기 묵직해지는 느낌에 찬열은 다시 서서히 눈을 떴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빙긋 웃고 있었다.
"에이, 시시하다. 별로 안 놀라네?"
"예상했어."
"아~ 그래? 그럼 내가 왜 왔는지 알아?"
남자가 빙긋 웃으며 찬열쪽으로 몸을 낮췄다. 달빛을 받아 묘하게 빛나는 그의 붉은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던 찬열은 자신의 뺨을 감싸쥐는 손길에 몸을 굳혔다. 차가웠다.
"역시, 네가 정부의 쓰레기구나."
"이미 다 알고 찾아온 거 아닌가?"
"대충 짐작만 하고 온거지. 틀렸으면 그냥 죽일 생각으로."
빙긋, 눈을 접으며 웃는 남자의 모습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찬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특히 찬열의 눈가를 더듬으며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몸을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왜 여길 찾아왔을거라 생각해?"
"글쎄."
"정부 소속도 아닌데 어떻게 네 정체를 알고 찾아왔을까."
"..."
"일단, 네가 상대할 놈은 내가 아냐."
남자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찬열의 뒷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찬열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동안의 정적에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빙긋 웃으며 찬열의 몸과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정부가 개를 풀었어."
"생각보다 꽤 빠르네."
"그만큼 네가 정부에게 위협이 된다는 소리겠지."
"나같은 쓰레기가?"
찬열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눈두덩이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그만 눈을 뜨고 백현을 마주보았다. 달빛때문인지 찬열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반짝였다.
"예뻐."
"..."
"표식이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는데, 눈이었구나."
"..개들이 여기까지 온 건가?"
남자는 찬열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찬열의 눈이 마음에 든 것인지 남자는 계속해서 찬열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손길이 상당히 귀찮았지만 찬열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죽여야지."
"..."
"안 그러면 네가 죽어."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찬열의 질문에 남자는 답을 알려줄 마음이 없는 듯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찬열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백현."
"..."
"내 이름이야. 기억해 둬."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백현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찬열은 한동안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그 날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창가 쪽으로 등을 돌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있던 준면은 순간 눈을 확 뜨면서 낮게 물었다.
"누구야."
그러자 그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병실 구석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손 씻은지 꽤 오래됐으면서 실력은 여전하네요."
"레이?"
"네. 오랜만이에요, 선배."
준면이 자세를 바꿔 누우며 병실 안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나 어찌도 꽁꽁 모습을 숨긴 것인지, 레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보는 사이에 실력이 더 늘었구나. 준면은 속으로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알죠?"
"대충은."
"사실 상황이 꽤 심각해요. 윗선에서 지금 쓰레기를 처리한다고 개를 몇 마리 풀었는데, 거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아요. 특수 지령이 내려왔거든요."
"어떤?"
"코드 V."
그의 말에 준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제 꿨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구나. 애써 진정하려는 준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는 준면에게 나지막하게 전했다. 정부 몰래 여기로 내려 온 것이었기 때문에 서둘러야했다. 자리 이탈에 기밀 누설이라니,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였다.
"얼마 안 가 2차 대학살이 일어날거예요. 몸조심하세요."
시점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자면(나름 해설) |
찬열은 준면에게 사고가 난 즈음에 준면의 집에 찾아간 거였어요 민석이 병원을 찾은건 준면이 사고 후 의식을 되찾은 날이고, 찬열과 백현이 만난것은 준면의 사고당일 밤입니다.. 레이가 준면을 찾아온건 민석이 병원을 찾은날 밤이예요 앞으로 toxic에서는 이렇게 시간과 시점이 정신없이 뒤섞일거예요..과거 현재가 뒤죽박죽ㅋㅋㅋ 욕하고싶으시죠?..뎨둉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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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 3까지 나온 마당에 이나은은 진짜 불쌍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