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대야"
"응?"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종대는 내가 옆에 다가가 쿡쿡 찌르자 바로 눈을 맞춰주며 웃어보였다. 그런 종대의 옷 소매를 끌어당기며 운동장 구석을 가리켰더니 왜, 얘기할거 있어? 하고 다정하게 말하는 그였다. 그렇게 종대와 나는 운동장 구석을 향했고, 종대와 축구하던 친구들이 김종대 어디가? 하고 불렀지만 그는 친구들을 향해 잠시만-하고 손짓을 해보였다.
"왠일이야, 여주가 날 먼저 부르고?"
"...할 말 있어"
"응, 뭔데?"
종대는 계속해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너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내가 지금부터 할 잔인한 말과는 다르게 너는 너무나 밝고 다정했다. 어서 말해야 하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쭈뻣쭈뻣하며 망설여졌다. 입안은 점점 말라갔고,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침착해-,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고, 해야하는게 맞는거야.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내 앞에 너는 웃으며 서있었다. 미안해, 종대야, 그런데 이게 맞는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
"..."
나의 말에 순간 종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종대는 바로 다시 웃으며 뭐야, 그런 장난 치는거 아니야-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종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종대의 표정에, 나도 마음이 미칠듯이 시려왔다. 종대는 어색하게 팔을 내려놓았고, 우리 사이에는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종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왜 하고 물었다.
"그냥, 질렸어"
아니, 단 한순간도 지겨웠던 적 없어 종대야
"솔직히 말해서, 너가 나보다 잘하는게 뭐야? 수준떨어져서 더 이상은 네 장단에 못 맞춰주겠어"
수준떨어지는건 나야, 내가 머리가 나빠서 최선의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미안해
나의 말에 종대는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종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끝까지 내게 우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지 종대가 마른 세수를 했다. 나도 울고싶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내가 울면 안되지 않는가.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았다.
"나 유학 가, 종대야"
"솔직히 잘됐어, 마침 헤어지고 싶었는데, 부모님도 유학가라고 하셔서"
"그럼 가볼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종대에게서 돌렸다. 종대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나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몇걸음 채 걷지 못했는데, 종대가 뒤에서 나를 다급하게 잡아왔다.
"...여주야"
"왜"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
"날 진심으로 좋아한 적은 있어?"
"...아니, 없어"
나의 대답에 내 손목을 붙잡았던 종대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종대의 표정을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종대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질때마다, 나의 가슴도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이건 어린날의 치기였고, 웃긴 자존심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셨다. 꽤 잘나갔던 회사 덕분에 나는 늘 넉넉하게 살아왔다. 급작스럽게 회사가 기울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한참 전부터 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왜, 다들 부모님이 하시는 얘기 다 몰래 듣지 않는가. 부모님은 내가 자는 틈을 타 속닥거리며 요즘 우리의 경제적 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그래, 우리의 사정은 딱히 좋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결론은, 해외로 도망치는것이었다. 아버지는 계속 한국에 남고, 남은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유학은 무슨, 도망치듯 쫓겨나는 것이었다.
바보같게도 부모님이 하는 말을 듣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다른게 아니라 종대는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미국을 가면, 종대는? 종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종대한테 솔직하게 얘기해? 아니, 솔직하게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꽤 자존심이 강했던 것 같다. 집안도 넉넉했고, 성적도 괜찮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나는 나의 이런 부끄러운 실체를 보여주고싶지 않았다. 밤을 세워 고민했다. 나는 진심을 다해 종대를 좋아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종대가 내 첫 사랑이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어린나이인 고등학교 2학년, 우리는 나름 꽤 진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선의 방법은 종대에게 유학을 간다고 거짓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학간다는 이유로 헤어진다하면 분명 기다리겠다고 할 종대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나쁜년이 되기로 했다.
솔직히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 그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것을 상상만 해도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나 때문에 다른 여자도 못 만나고 외로울 종대의 모습은 더 보기 싫었다. 내가 조금 나빠지면, 종대는 나를 그냥 잊지 않을까. 뭐 그냥 한번 똥밟았네- 생각하고, 넘기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내 자존심도 지킬 수 있었고, 종대도 날 금방 잊을 듯 했다.
그렇게 나는 정말 친했던 몇몇 친구들에게만 진짜 사정을 얘기하고 급하게 떠났다. 공항에서 급하게 출국신청을 하는 순간도,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순간도, 내 머리속에는 종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망연자실한 표정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나는 이렇게 종대에게 상처를 줬고, 아마 종대도 이제 나에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을 것이다. 살면서 세상은 한번도 공평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아무 일도 없이, 평범하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처럼 남들이 겪기 힘든 일을,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겪는 사람들도 있다. 그 시절의 나는 내 자신이 이 세상의 누구보다 비참하게 느껴졌다. 오랜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기에서 내리며 나는 다짐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서, 다시 평범했던 그 날로 돌아가리라
유치한 김팀장 01
"여주, 한 달 후에 한국 간다는거 진짜야?"
"어? 어떻게 알았어?"
"뭐야, 진짜야? 제임스가 얘기해 줬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네"
"...하하, 마침 한국에서 직장도 구했고, 음...돌아가고 싶어서"
"미국 온지는 몇 년 됐지?"
"글쎄, 18살, 어-, 만으로 16살에 왔으니까 이제 10년 됐네"
"...미국에서 일 할 생각은 없어?"
"딱히, 한국이 좋아서"
"...서운하네, 그래도 10년동안 친구였는데"
"미안해, 그래도 자주 올게"
"그래, 남은 한 달 동안 미친듯이 놀자고"
어느덧 미국으로 도망치듯 쫓겨온지도 10년이 지났다. 10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낮에는 알바, 밤에는 공부하는 일을 반복했고, 피나는 노력 끝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동안 숨만쉬고 살았다는 표현이 참 적당한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다. 매일매일 한 푼이라도 아끼려 노력했고, 조금은 어린나이었던 내 동생까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했다.
가끔 연락하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는 몇년전부터 연락이 끊겼다.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연락해봐야지, 친구들은 가끔 나에게 종대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친구들 말에 따르면 종대는 그 날 후로 급격히 말이 없어지고 공부만 했다고 한다. 내 예상과 다르게 종대에겐 충격이 참 컸나보다. 반에 한명씩 있는 시끄러운 애, 그게 종대였으니까. 그런 종대가 말이 없어졌다는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는 이런 종대에게 항상 미안했다. 가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때면 그 시절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보이는 종대의 얼굴에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도 많았지만, 예쁜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넘겨왔다.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한국에 다시 갔는데 우연히라도 종대하고 마주치게 되면 어떡하지? 그 때는 미안했다고 사과해야하나? 아니면 여전히 싸가지없게? 그러다 내 자신이 우스워져 피식 웃었다. 그런 드라마같은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와 현실은 무척이나 다르단 말이다.
***
그런 나의 생각은 오늘 무참히 깨져버렸다. 28이란 어쩌면 여자치고는 늦을 수도 있는 나이에, 10년동안 개고생을 하고 취업한 나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거울을 보며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애써 웃어보이고는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온 한국은 참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신기함에 나는 이곳저곳을 두리번대다 남들이 보면 왠 촌놈인가 싶을 것 같아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는 앞만 보고 걸었다.
"...헤-, 크다"
대기업인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좀 많이 크네? 회사 입구에 도착한 나는 생각보다 거대한 건물의 규모에 쫄았다. 하지만 곧 그런데 여기가 내가 다니는 회사라고!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뿌듯해져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는 입구로 들어갔다. 어디보자, 마케팅 부서가-...어, 5층! 출근시간이라 빡빡한 엘리베이터 안에 죄송합니다-하고 끼어 타서는 여기저기 눈치를 봤다. 오, 이런게 직장인들인가. 나도 모르게 바보같이 실실 웃다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 표정을 굳혔다.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표정관리가 안되지? 잠시 후 5층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다시 죄송합니다-하고 힘겹게 내렸다. 어휴-, 하마터면 못 내릴뻔 했네. 조심스럽게 내려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 지금부터 뭘 해야하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쳤다.
"...으얽!!!!!"
"악!!!!"
"아!!! 깜짝이야!!!"
"제가 더 깜짝 놀랐거든요?"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민망한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아, 죄송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더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고 대답하더니 내 얼굴을 살폈다.
"...처음보는 분 같은데..."
"...아, 오늘부터-"
"혹시, 신입사원?"
"아, 네!"
"헐, 반가워요! 아, 저는 변백현이라고! 저도 사원인데 제가 지금까지는 신입이었거든요~ 이제 저도 후배 생겼다!"
"아 정말요? 반가워요!"
"이름이 뭐에요? 나이는?"
"이름은 김여주고 나이는 스물여덟이에요"
"오~ 나랑 동갑이시네, 하여튼 친하게 지내자구요, 안내 해드릴까요?"
"네!"
오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다. 나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혼자서 엄청 종알거린다. 솔직히 조금 시끄럽긴 한데, 이 사람 아니면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하. 그런데 조금만 조용히 해줬음 좋겠다. 아, 물론 절대 말은 못하지만. 여주씨 자리는 여기에요! 하고 내 자리를 안내해준 백현씨에게 감사하다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조금 일찍온터라 아직 안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쭉 돌아보는데, 사무실 제일 앞에 누가 봐도 제일 부티나는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 저기는 우리 팀장님 자리"
"아..."
"저희 팀장님 진짜 좋아요! 다른 분들은 다 늙으-,...아니 늙으신게 아니라, 음, 나이가 있으신데, 저희 팀장님은 진짜 젊어요! 그리고 막 딱딱한 것도 싫어하시고,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잘생겼어요. 그래서 여사원들한테 인기가 그렇~게 많다니까요? 솔직히 좀 질투나긴 하는데, 뭐, 괜찮아요! 제가 봐도 팀장님 좀 멋있거든요"
그 말에 팀장님 책상을 둘러보다 명패를 봤는데, 김종대? 음, 이름 재밌네
...?
잠시만, 뭔가 이상한데
????????????그 김종대??? 설마??? ㅇ,에이, 설마. 하하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백현씨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김종대 팀장님, 낙타 닮으셨어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팀장님 별명이 광대로 노래하는 낙타에요! 노래도 잘하시는데? 이 별명 제가 지은건데 그 날 팀장님이 엄청 찡찡거렸다니까요?"
"ㅇ,아니, 우리랑 동갑인데 어떻게 팀장이에요?"
"동갑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그냥 저의 직감이 그냥...어...원래 여자의 직감이 무섭다잖아요! 하하하핫"
그 말에 백현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아니, 이 말에 저렇게 쉽게 수긍하는게 더 이상한데;;;;;
"처음에는 뭐 낙하산이다, 이사님 아들이니 뭐니 말 많았는데, 일도 잘하시고 능력있으시고 워낙 성격이 좋으셔서, 이제는 그냥 다들 그런가보다 해요!"
"아...그렇구나..."
허허, 뭐 설마 진짜 그 김종대겠어? 그럼 진짜 이건 운명의 장난이 틀림없다. 그럴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어! 팀장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팀장님! 여기 신입사원!!"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더럽게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내 앞에 서있는 김종대 팀장은, 내가 10년전 그렇게 무참히 차버렸던 남자친구, 김종대가 맞았다.
***
음, 확실하게 결론났다. 김종대가 내 상사라는건 더럽게 운이 나쁜거였다.
나의 어색한 인사에 김종대는 자연스럽게 나를 위 아래로 쫙 스캔하더니 반가워요, 하고는 본인의 자리로 갔다. 뭐지, 지금? 김종대 날 못알아보나? 그럴리가 없는데? 내 머릿속은 패닉상태였다. 뭐야 지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건데? 설마 진짜 못알아봤나? 이거 조금 서운한ㄷ-아니 서운은 무슨, 아님 모른척하는건가? 아, 그래 백현씨도 있는데 아는척 하기도 그렇지. 분명 김종대가 나한테 아는 척 하면 백현씨가 뭐야 뭐야! 왜 아는사이에요? 할거고 그럼 아, 고등학교때 사귀다 헤어진 사이...하하 그래 모른척하는게 낫겠구나, 음.
그렇게 내가 패닉상태에 빠진 사이 하나 둘씩 직원분들이 출근하기 시작하셨고, 어느새 나는 자기 소개까지 끝내고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앉아 내 앞의 컴퓨터만 바라보고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으신 이대리님이 나를 부르셨다.
"여주씨!"
"..."
"여주씨!!!"
"..."
"여주씨!!!!!!!"
"ㅇ,어!! 아!! 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몇번을 부르는데도 못들어요?"
"아..그냥...하하, 처음이라 조금 낯설어서..."
그리고 살짝 주변의 눈치를 보는데 김종대가 나를 비소를 짓고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 표정. 기분나빠
"그럼 여주씨, 이 서류 좀 정리해 줄 수 있어요? 어렵진 않은데"
"아...네!"
이대리님께 서류를 받아서는 정리를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대리님도 일부러 쉬운 일을 시키셨는지 많이 어렵지는 않았다. 서류가 워낙 장수가 많아서 많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집중해서 해서 그런지 서류 정리는 금방 끝났고 나는 정리한 서류를 대리님께 드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님! 정리 끝났-악!"
"...어이쿠, 실수"
? 방금 무슨 일...나는 대리님께 정리한 서류를 드리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대리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마침 나를 지나서 자기 자리로 가려던 김종대가 나한테 발을 걸었...미친거 아니야? 내 성깔로는 벌써 김종대 멱살 잡고도 남았지만 나도 찔리는게 있었기 때문에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괜찮아요? 다친건 아니죠?"
"하하, 괜찮아요"
"어떡하지-, 정리 다시해야겠네"
김종대가 친절한 척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주더니 괜찮냐고 물어봤다. 하나도 안 괜찮다 새끼야, 물론 이 말은 킵해놓고,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김종대가 서류 정리 다시해야겠다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서 가는데,
나는 봤다. 내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김종대가 순간 존나 고소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뒤를 돌았다고!! 이거 분명 내 착각 아니다. 아니,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뭐 어떡하겠나, 내가 단단히 미움털 박힌걸, 그리고 진짜 실수일수도 있잖아...? 애써 자기위안을 하고는 다시 서류를 쓸어모아 내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만약 내가 아까 봤던 표정이 진짜라면, 김종대는 분명 싸이코가 분명하다.
김종대는 그 이후로 쭉 나를 귀찮게 했다. 말이 좋아 귀찮게 하는거지, 시비를 텄다. 아까 다른 사원분께서 커피 부탁을 하셨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서 나도-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원래 한국에서 일하면 신입사원이 커피타는게 일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은터라, 자연스럽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커피나 타러 걸음을 옮겼다.
"...아, 여주씨, 나도. 블랙으로 부탁해요"
그리고 김종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저 눈웃음에 약하단 말이다. 그 말에 조용히 네, 팀장님 하고는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어...블랙이 5잔에, 아메리카노가 4잔이었나...?"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커피를 다 타고 종이컵을 여기저기 배달해주고 마지막으로 김종대 책상 앞에 가서 여기요-하고 종이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는데, 김종대가 갑자기 팔자눈썹을 축 내려뜨리고는 미안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주씨 미안해서 어떡하지?"
"...네?"
"갑자기 원두커피가 너무 먹고싶은데..."
"..."
"한번만 다시 해주면 안돼요? 진짜 먹고싶어서 그러는데..."
그러고는 슈렉 고양이같은 눈빛을 하는데, 분명 나 귀찮게 하려고 저러는게 분명한데도 저 눈빛을 보니까 짜증이 확 없어지더라. 김종대가 역시 잘생기긴 했다. 여자들이란 원래 잘생긴 남자에 약하다. 고등학생 때도 잘생겼는데, 지금은 뭔가 그 시절의 잘생김+남자다움+금욕적인 섹시함...이 더해진 느낌이라 몇배는 더 치명적이란것이다. 결국 그 눈빛에 나는 홀린듯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탕비실에서 원두를 내리고 있었다.
이런 일 뿐만이 아니라, 김종대는 나한테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계속 시켰다. 뭐 복사해달라느니-, 팩스보내달라느니-, 그런데 복사 딱 다 마치고 들고 왔더니 미안한 표정 지으면서 아, 다른 서류를 줬네, 죄송해요-, 이걸로 다시 부탁해요. 하고, 팩스 다 보내놨더니 어이쿠 번호를 잘못 알려줬네, 한번만 다시 부탁해요 하는데 이건 절대 실수가 아니다. 이정도면 정말 의도한거란 말이다. 나중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솔직히 나도 잘한건 없지 않는가? 그냥 입 닥치고 할일이나 했지 뭐,
그러다 잠시 짬이 나 내 자리에 앉아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상태로 핸드폰을 눈치보며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 페이스북 메세지로 미국 친구가 뭐하냐고 물어봐서 상사가 괴롭혀서 힘들다는 둥-의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내 핸드폰을 채갔다.
"여주씨, 그래도 업무중에 핸드폰은 안되지"
"...아, 죄송해요"
아 또 김종대야. 김종대가 내 핸드폰을 집어들고는 나와 친구의 대화를 쭉 올려보는데,
...잠시만, 나 김종대 뒷담깠는데
"여주씨, 그렇게 제가 괴롭히는것 같았어요?"
"아니, 그게-"
"제가 죄송해요...제가 너무 여주씨 귀찮게 해서..."
갑자기 또 불쌍한 표정 짓는데,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아니, 아니! 제가 잘못한거죠!! 팀장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음...그래요?"
"네..."
"그럼 지금 업무중에 핸드폰 사용한건 여주씨 잘못이니까 압수-, 나중에 퇴근할 때 줄게요"
아니 시발? 아까 보니까 다른 사원들은 핸드폰 대놓고 잘만 쓰던데? 물론 여기서 이렇게 반박할 수는 없고 나에게 눈웃음을 짓는 김종대를 따라 나도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김종대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에게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여주씨, 유학간 동안 재미 좀 봤나봐?"
"..."
"외국인 남자친구랑 업무 중에 상사 뒷담도 까고 말이야"
"..."
미친 졸라 무서워, 다른 사람들 못 듣게 내 귀에다 대고 속닥거리는데, 진짜 무서워서 덜덜 떨었다. 내가 긴장한것을 보더니 김종대가 다시 허리를 펴더니 웃으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주씨, 오늘 첫 날인데 열심히 해야죠, 그쵸?"
"...네..."
그리고 김종대는 자기 자리로 멀어졌고, 나는 존나 쫄아가지고 얼어있었다. 와, 김종대 왜 저래? 진짜 많이 변했다. 물론 저 변한게 나 때문이겠지만....그 때부터 난 겁나 열심히 일만 했고, 김종대가 잠시 후 이제 점심 드시고 하시죠-하는 소리에 녹초가 되어 뻗었다.
"여주씨, 점심 같이 드실래요?"
백현씨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네 제발 ㅠㅠㅠㅠ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ㅠㅠㅠㅠ 나는 백현씨에게 감동한 표정을 하고 들뜬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저 편에서 김종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여주씨 저랑 해야 할 일 많잖아요!!"
"...네? 뭐를..."
"에이~ 알면서 그러신다, 아까 저랑 점심시간에 일 좀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
"백현씨는 먼저 가시고"
그 말에 백현씨가 이상하다는듯 한참을 갸우뚱거리다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팀장님 아무리 일 많아도 밥은 먹고 하라고 하시잖아요, 근데 왜-"
"백현씨"
"네?"
"백현씨도 같이 하실래요?"
"...아, 아닙니다!! 하하, 열심히 일하세요! 팀장님, 여주씨 화이팅!"
백현씨가 김종대의 말에 급격히 표정을 굳히며 귀여운 척을 하더니 화이팅! 하고 외치고는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다른 사원들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고로, 지금 사무실에는 나하고 김종대 밖에 없다고. 아까 김종대가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던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딱딱히 굳어서 모니터만 열심히 쳐다보는 척 하는데, 김종대가 나한테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졸라 무서워 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는 내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다 내 바로 옆에 밀착해서 앉더니 팔을 괴고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응"
"나는 너 엄청 보고싶었는데, 너는 어땠어?"
"..."
"유학은, 재밌었고?"
"..."
"...하긴, 재밌었겠지, 외국인 남자친구도 만들고 말이야"
"..."
내가 계속해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김종대 쪽을 바라보지 않자 김종대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의자를 확 돌려 본인과 마주보게 만들었다. 내가 슬슬 시선을 피하자 김종대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더니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지금도 수준 떨어져서 말도 못 섞겠어?"
"...종대야, 그건-"
"나 그래도 너 수준떨어진다는 말 듣고 지금까지 노력해서 이 자리 온거야"
"..."
"어때, 이제 좀 수준이 맞아?"
살살 비꼬는 듯한 종대의 말에 내 속이 비틀렸다. 지금 내 감정은 졸라 무섭고, 떨리고, 그리고, 음...그래, 서운하고, 속상하다. 나는 정말 억울하단 말이다. 누구는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졌나? 솔직히 말하면 어쩌면 김종대보다 내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십년전 일을 지금 꺼내서 뭐하겠는가. 그냥 내가 조금 참으면 금방 괜찮아지겠지 뭐
김종대가 잔뜩 쫄아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귀엽네- 하고 말했다. 아 미친, 더 무서워. 그러다 갑자기 김종대가 나를 끌어당겨 안더니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여주야, 우리 한번 잘 해보자"
그 말이 마치 내 귀에는 '내가 너를 신명나게 괴롭혀줄게'하는듯한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어머니, 저 이 회사에서 계속 일 할 수 있을까요...?
+)사담
짠- 신작으로 돌아온 실음과김선배입니다. 간단하게 앞으로의 연재계획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우선, 실용음악과 썰과는 공동연재이구요, 신작 미리보기에서 보여드렸던 미국유학 종대는 차기작품이에요! 여러분들께서 둘 다 쓰면 안되냐고 많이 하셨는데 ㅋㅋㅋㅋ 당연히 둘 다 쓸거에요! 저는 그냥 뭘 먼저 쓸까-를 결정하기 위해서 여쭤본거였고 ㅋㅋ 아 그리고 제목을 뭘로 할까 많이 고민했는데...^^ 제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안나오네요 ㅋㅋㅋㅋ 그래서 그냥 있는 사실 그래도 유치한 김팀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제 머리 진짜 나쁘네욬 ㅋㅋㅋㅋㅋ 혹시 좋은 제목 지어주셔서 제가 마음에 든다면...덥썩 받겠습니다 ㅋㅋㅋ
아 그리고 암호닉을 어떻게 할까 많이 고민했는데...실음과 썰하고 따로할까 같이 할까...하다가...그래도 혹시 몰라서 따로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ㅠㅠㅠ 암호닉 원래 신청해주셨던 분들도 다시 한번 신청해주세요! 암호닉은 항상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종대는 여주 좋아하냐구요? 그건 종대도 모르고 저도 몰라요~ 종대도 자기 맘이 뭔지 아직 잘 모른다는...그런...하지만 당연히 빙의글인데 종대도 언젠간 여주한테ㅋㅋㅋ네 ㅋㅋㅋㅋ 당연하죠ㅋㅋㅋ
그럼 여러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