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게이라고 쓰고 독신이라 읽는다. W. 슈워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알들이 오늘따라 거칠게 느껴졌다. 아, 밥맛떨어지게 진짜. 평소라면 내 앞에 앉아 밥이 코로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조잘조잘 떠들어댔을 변백현이 지금 어울리지도 않는 한숨만 몇번째 내쉬고 있는건지 맞은편에 앉은 내가 다 거슬려 죽을 지경이였다. "내 담당 환자들은 왜 다 날 싫어할까...?" "또 지랄한다" "도경수야 원래 니 담당이였다가 나한테 넘어왔으니까 그렇다쳐도 다른 환자들까지 나한테 너무 야박하잖아" "밥먹을땐 좀 적당히하고 넘기지" "넌 안겪어봐서 모르는거야..." "변백현 계속 우물 팔거면 아프리카나 가서 좀 파줘라" 백현이의 식판 위에 담겨있던 비엔나 소시지를 하나 집어먹으며 웅얼거리자 멍하니 내가 밥먹는 모습을 턱을 괸채로 바라보던 백현이 드디어 미친건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볼을 움켜쥐었다. 아, 이런 미친!! "더럽게 뭐하는 짓이야?!" "김민석 너 성격 나쁘지" "아씹, 변백현 미쳤냐?" "게다가 이 심각한 결벽증" "밥먹는데 진짜 이럴거야?" "그리고 포비아에 지독한 워커홀릭이잖아"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걸어라" "근데 도대체 니가 뭐가 좋다는거야?" 무슨 얘기를 하고싶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이 찝찝함부터 없애야 했다. 식판이 있는곳으로 달려가 항균티슈를 하나 집어온 나는 일회용 봉투를 뜯어 변백현의 손이 닿았던 내 볼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문질렀다. "개새끼" "루한이 너 괜찮냐고 묻더라" "그 성정체성 장애?" "걔 그거 아니야" "아니던 맞던" "어쨌든 너 어제 당직 서다가 루한 만났지" "어" 그것도 옥상에서. 덕분에 입틀어막고 아래층까지 엄청 뛰어갔잖아. 완전 속 뒤집어진채로 당직 섰어. 다시 생각해도 뱃속이 요동치는거 같아. "루한, 성정체성 장애 아니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나랑 같은과거든" "독신주의자?" "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그것 때문에 게이도 아니면서 가짜 커밍아웃을 했거든"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 사람 게이 아니니까 너한테 넘기려고. 니가 봐도 내 담당 환자들이 너무 많잖아. "미쳤어? 넘길거면 차라리 도경수를..." "그 앨 너한테 집착하도록 만들거야? 진심으로 도경수 병이 낫길 바래서 나한테 넘긴거였잖아" "그럼 박찬열은" "걘 안돼" "왜?" "찬열이는 포비아인 너한테는 무리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잘생겼다, 사랑받아 마땅하다 인지시키는걸 니가 어떻게 하게?" "아, 시발" 가차없이 표정이 구겨지는 나를 보면서 변백현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사실 루한이 담당 의사를 좀 바꿔달라잖아. 나보다 니가 더 좋다는데 정신과 명의로써 자존심은 상해도 뭐 어쩔수없지. 좋아하는건지 싫어하는건지 모를 애매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백현이 오늘 중으로 루한의 차트를 넘기겠다며 먼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한껏 우울한척 밥도 깨작거리더니 결국 이거였냐. 완전 밑밥깐거 아니야 저 자식.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려가며 식판을 정리하는 백현이를 보면서 작게 이를 갈았다. 손에 들고있던 항균 티슈를 쓰레기통 안으로 집어던지곤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뭐? 담당 의사를 바꾸고 싶어? 언제 봤다고 지가 의사를 골라 고르기는. 백현이의 말을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 루한이라는 놈의 태도가 건방지게 느껴져서 그 자식이 성정체성 장애이건 아니건간에 내 담당 환자로 넣을 생각은 조금도 들지않았다. 정신과병동은 오늘도 정신없이 바빴다. 호들갑스럽게 자기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오는 부모들을 상대하느라 한참 진땀을 빼고나자 내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시간도 어느새 훌쩍 지나있었다. 밥이고 뭐고 너무 지친다. 밀려오는 정신적 피로감에 이젠 잠을 못자서 따갑기까지한 눈을 내리감으며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딱 5분만 자자. 예약 시간에 인터폰이 안되면 알아서 깨우러 오겠지. 열어놓은 창문 틈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두꺼운 책의 종이 냄새. 눈을 감은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함이 들었다. 딱 이대로 조금만 더 쉬고 싶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눈가를 간질이는게 거슬렸지만 밀려오는 편안함에 애써 신경을 거두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자요?" "...으응.." "뭐야, 이런 무방비한 모습은 반칙이잖아" 아까부터 눈가에 거슬리던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그게 기분이 좋아서 슬쩍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종이에 볼을 부볐다. "일어나요" 당신 일해야 되잖아요. 이렇게 계속 잘거에요? 내 볼을 어루만지는 감촉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웅웅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누구야. 무거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몇번의 노력 끝에 흐릿한 시야를 확보했다. 여러개의 책이 가지런하게 꽂힌 책장이 첫번째로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과 진료 기록서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낯선 사람의 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얼마나 잠들었던거지? 아무도 안깨운건가? 근데 왜 다른 사람이....우윽... "...뭡니까" "이제 일어났어요?" "왜, 여기에...욱.." "5m 이상 떨어지면 되는거죠?" "......" "나 호모포비아 처음봐요" "시발" "욕하는 의사도 처음보고" 루한이랬던가. 저 이반의 이름. 나에게 가까이 있던 몸을 뒤로 물리며 내 책상이 놓인곳에서 반대쪽 벽까지 물러선 이 남자는 항복하는 자세로 양 손을 가슴께로 올린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여긴 왜 들어온겁니까" "상담 시간이 지나도 안오길래요" "그쪽 담당 의사 변백현이지않습니까" "바뀐걸로 아는데요?" "바뀔 일 없거든요?!" 아직까지도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높이자 루한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시발. 이게 아닌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으며 루한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려버렸다.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제가 피곤해서 좀 예민해졌나보네요" 떨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침착하게 가다듬으며 말하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루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 나가보세요" "저기, 쌤" "글쎄 나가보시라니까요?!" "나 게이 아닌데" "......" "안싫어하면 안돼요?" 변백현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게 있긴 한건지 내가 호모포비아라는것을 알고있었다. 나를 바라봐오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마주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내 책상 위에 올라와있는 루한의 차트. "성정체성 장애가 아니라고?" "아니에요" "그럼 퇴원해요" "아?" "입원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름 루한. 나이는 24살. 뭐야...한참 어리네. 그의 차트 위에 적힌 '성정체성 장애' 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찍 빗금을 그어버리고는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루한에게 퇴원할것을 권유했다. "야!!! 김민석!!" "...하여튼 시끄럽긴" "퇴원이라니? 내가 담당 의사 좀 바꿔달라했지 누가 병원에서 쫓아내래?" "게이 아니라며" "그래, 아니야!" "그러니까 퇴원하라는건데 그게 뭐" "너는 걔가 불쌍하지도 않냐?" 정숙해야할 병원 안을 쿵쾅쿵쾅 뛰어다니질 않나 복도에서 큰소리를 내지를 않나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나에게 왕왕 짖어대는 변백현의 모습은 어디 하나 의사다운곳이 없어보였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당연한거 아니야? 하고 반문하자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며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불쌍하기는 무슨. 본인도 게이 아니래고 의사도 게이 아니라고 말하면 부모가 어쩔건데. 괜히 젊은 나이에 병원에서 썩게 하지말고 빨리 내보내는게 그쪽한테도 좋은거야. "걔가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자랐는지 알면 그런 말 안나올거야" "그런 과거사 따져가면서 사람 받아주는곳 아니야 여기" "그치만..." "우리가 진짜 진료해야 될 사람이 누군지 몰라?" "집으로 돌려보내면 걘 분명 피말라 죽어" "진짜 정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입으로 말도 못해. 24살이면 남한테 기대지않고 자기 혼자 이겨나갈 수 있는 나이야" "루한이 이대로 퇴원해도 괜찮을거라는거야?" "문제될거 없잖아"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 "루한이 퇴원해도 괜찮을거라는말 책임질수있냐고" "그래" 이런 고집스런 백현이의 표정은 오랜만이였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그렇게 분한지 이를 앙물곤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제 담당 의사는 너니까...니가 알아서해" 그대로 나를 지나쳐가는 백현이를 향해 '병원에서 뛰지말라니깐' 하고 소리치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백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엘레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하여튼 유치한 새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마르고 작은 몸이 팔랑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병원 놀이를 하는 어린애 같아서 유난히 철없게 느껴지는 백현이의 행동을 되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을 하는데 있어 저런 사사로운 감정은 필요없었다. 내가 루한을 퇴원 시키겠다 결정한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괜히 가슴 한쪽을 찝찝하게 만든 백현이의 표정을 지워내며 머리속에 가득찬 루한의 일을 잊어버리기로했다. 그래, 이젠 다시 볼 일 없을테니까. 그 전과 같은 일상이 찾아왔다. 표면상으로 달라진건 하나도 없었다. 변백현도 여전히 쓸데없을 정도로 기운찼고 나도 내 일을 함에 있어 방해 받을것이 없었다. 변백현이야 가끔 나에게 뾰로퉁하니 입술을 내밀기도 했지만 자기도 어느정도 상황이 잠잠하자 별다른말없이 루한에 대한 일은 넘기는듯 했다. 아니, 넘기는줄 알았다. "그 사람 통원치료 받기로 했어" "누구" "니가 병원에서 매정하게 쫓아낸 사람" "그 성정체성 장애?" "아, 진짜! 그거 아니라니깐" "하여튼 그 사람이 왜?" "자살기도력 있잖아" "그래도 우울증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검사 결과는 정상이였으니까" "...니가 진료하는거지?" "내가 왜? 니 담당 환자잖아" "시발" 내 담당 환자라면서 예약은 왜 니가 받냐? 어쩌다 다시 나온 루한에 대한 얘기에 열심히 입안에 밥을 가져다나르던 수저를 툭 내려놓자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변백현이 '훌륭한 의사는 환자를 가려받는게 아니야' 하고 마저 밥을 한숟가락 퍼먹었다. "그리고 게이도 아닌데 이제 싫어할 이유 없잖아" "눈 마주치는게 소름끼쳐" "헐, 그거 엄청 충격적인 발언이다" "그 사람이 감정적으로 싫은게 아니라 몸이 거부하는거야. 진짜 게이가 아니더라도 그냥 쳐다보면 역겨운걸 어쩌겠어" "동성애자도 문제지만 너같은 포비아도 어지간한 정신질환 못지 않다니까"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가 다시 식판을 향해 고개를 숙인 백현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거렸다. 딱히 백현이의 말도 틀린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밥먹는데 집중했다. "야, 김민석" "또 뭐" "너 만약에 내가 게이였으ㅁ..." "병원 그만둬야지" "...매정한 새끼" 소름끼치게 무슨 그런 말을 하냐. 쓸데없는 농담하지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 너 1시에 바로 예약 있다며? 찌푸려진 미간을 펴내며 말하자 깨작거리기만하던 수저를 내려놓은 백현이 잔뜩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취소됐어" "왜?" "오늘 시간이 안맞아서 내일 온대" "근데 표정이 왜그러냐? 오후타임 비는거 아니야?" "전에 말했던 BDD 환자 때문에 그렇지도 않아" "왜?" "...그런게 있어"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식판을 들고 일어난 백현이 마저 먹고 올라오라는 제스처를 해보이곤 먼저 자리를 나섰다. 쟨 또 갑자기 왜저래. 오늘 진료 예약도 펑크났겠다 거기다 이번에 담당 환자수도 꽤 줄어든걸로 알고있는데 쉴틈이 생겼음에도 전보다 더 고민거리가 늘어난것처럼 보이던 백현이를 보며 들고있던 수저를 입안에 밀어넣었다. "오늘 대기 환자가 많아요?" "변선생님이 지금 진찰이 불가능하셔서 좀 밀렸어요" "일단 다음 환자 들여보내세요" "네" "아, 잠시만요" "네?" "오늘 오후에 예약 환자가 어떻게 돼요?" "4시에 루한씨 예약 잡혀있어요"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손에 끼고있던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 안으로 던지듯 집어넣어버리곤 새하얀 가운 주머니 안에 넣어뒀던 다른 장갑을 꺼냈다. 하여튼 변백현, 또 뭘 하느라 시간 버리는거야. 누구는 바빠 죽겠는데 자기는 진료도 미루고 말이야. 진료실의 문이 열리고 다음 환자가 들어올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야 정신을 차리곤 발소리가 들리는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후 진료를 받은 환자들은 딱히 더 나빠질것도 더 호전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환자들이였다. 그저 평범한 일상 생활을 위해 주기적으로 진정제를 받아가는것 외엔 심각할것도 없었고 의사인 나와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더 편해져가고 있다는것 외엔 특별할것 없는 나른한 오후의 일부분이였다. 물론 오후 4시가 넘어가기 전까지는. "예약 시간 지났는데 왜 안올까요?" "대기 환자 있으면 우선 넘기세요" "그건 아닌데...분명 아까 예약 확인 전화 했을때 오고계신다고 그랬거든요" "그래놓고 안오는 환자분들 한둘 아니였잖아요" "그래도..." "일단은 대기 환자 생기면 바로 진료실로 보내줘요. 그리고 진료중에 예약환자분이 오시면 인터폰 해주시구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목을 졸라오는것 같아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넥타이의 끝을 매만지며 다시 진료실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니까 안와준다면야 나도 땡큐긴 한데...묘하게 신경이 거슬린다. 온다고 했단 말이지. 덜 익은 감을 한입 크게 베어문것 마냥 입안이 떫었다. 또 다른 환자가 온건지 명단이 넘어오고 임간호사와 함께 어떤 여자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보는 얼굴에 나는 찌푸려져있던 표정을 풀며 직업병에 걸린 사람 마냥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명 두명....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2시간이 지나있었다. 벽에 달린 동그란 벽시계를 한번 힐끔 쳐다봤다가 곧 6시, 퇴근 시간이 다가옴을 알려오는 시계바늘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얼마지나지않아 쾅하고 진료실 문이 열렸다. "내가 병원에선 뛰어다니지 말라고..." "큰일났어..!" 퇴근준비 하나는 칼같이 하던 변백현이 옷을 갈아입던 도중에 뛰어온건지 어딘지 모르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불규칙적인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인데? 입고있던 가운을 벗으며 물어보자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 백현은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을 꽉 쥐며 깨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여태껏 내 머릿속에 계속 걸리적거리던 이름을 내뱉었다. "...방금 전화왔어" "무슨 소리야?" "루한, 지금 중환자실에 있대" "뭐?" 정신병동에 와야할 사람이 무슨 중환자실? 손에 끼고있던 장갑을 마저 벗으며 변백현의 다음말을 기다리자 후- 하고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는 뒤에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담당의사가 원래 나였으니까. 보호자한테 방금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았어. 자살 기도야. 그 사람이 우리 병원에 온 첫날 그랬던것처럼 손목을 그었대...다행히 일찍 발견하기는 했는데 상처가 꽤 깊어서 수술도 방금 끝났나봐. 지금 중환자실로 옮겨서 상태보는중이라는데...야, 듣고있어? "...어디 병원이야?" "어?" "그 사람 지금 어딨냐고" "아, 우리 병원 외과병동..." "먼저 퇴근한다" 다른건 챙길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백현이를 지나쳐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정신과 병동을 나올때만해도 조금 서두르던 발걸음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병동 사이에 난 길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백현이에게 뛰지말라고 잔소리하던 내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것도 모르고 달려온 곳은 우연히 몇번 와봤던 외과병동 안이였다. 프론트로 달려가 오늘 자살시도로 병원에 온 루한이 어디있는지 간호사에게 소리치듯 물어보던 나는 미처 간호사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세웠다. "김민석, 여기서 뭐해?" "...하아..김종대..." "너 다쳤어?" "그런게 아니라, 아...너 루한이라고 혹시 방금 수술 끝낸 환자..." "중환자실은 지금 면회 안되는거 알잖아" "......" "아는 사람이야?" "...응" 그거 조금 뛰었다고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를 거칠게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종대가 내 손을 잡아끌어 병원 밖으로 향했다. 외과 병동 앞 산책길 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 종대가 건낸 음료수 캔을 한모금 들이키며 조금 놀랐던 가슴을 진정 시키고는 곧바로 내 앞에 선 종대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 괜찮은거 맞아? "그 수술 내가 했어"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절대 죽을일은 없지" "......" "근데 상태가 썩 괜찮은것도 아니야" 보통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는 말이야 은연중에 나타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동맥을 찌르는 결정적 상처가 아니더라도 그 상처 주변에 다른 상흔이 많이 나타는건 알지? 뭐 꼭 그렇다는 보장도 없긴 하지만 처음 자살 시도를 하는거라면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단말이야. 의외로 동맥을 자른다는게 쉬운일이 아니거든. 한번에 그만큼 깊이 찌르는것도 어려울뿐더러 처음 자살 시도를 하는 사람이 이렇게 깔끔하게 상흔을 낸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해. 그런데 이 사람은 자칫하면 진짜 살인이라고 의심이 갈 정도로 미련없이 그었어. "처음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래" "중환자실에 옮기면서 찾아보니까 이런식으로 난 상처가 총 9군데였다. 그 중 반대편 손목에 난 상처 하나는 얼마전거였고" 내가 들고있던 캔에 자신의 캔을 짠하고 부딪힌 종대가 차가운 커피를 들이키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아는 사람이라는 저거 너네쪽 환자냐? 아무런 대답도 없는 나를 내려다보던 종대가 대충 짐작간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벤치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보기 좋게 던져넣었고 알루미늄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종대의 가운 안주머니에 있던 호출기가 울렸다. "오랜만에 봤는데 거참, 안도와주네" "됐으니까 얼른 들어가봐" "그래. 너도 퇴근하는거 같은데 너무 걱정말고 조심히 들어가" "응...아, 종대야" "어?" "...일어나면 연락 좀 해줘" 아무래도 오늘 하루종일 신경에 거슬리던 그 사람이 앞으로도 이 며칠 더 내 머릿속에 머무를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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