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서리에 모두가 얼어 붙어 있는 그런 계절이었다.
더도 말고 딱 신년이 넘어가는 때라, 곳곳에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기쁨과 지난 해를 보내는 아쉬움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설렘에 가득하였을 때이다.
도성 곳곳에서 아직 나오지 못하는 봄들은 하루라도 조급히 깨우고 싶어하는 햇볕이 그 날은 유난히도 설레었다.
"아기씨, 아기씨! 조심하시여요! 행여나 이리 재촉하시다간 저는 물론이요 오늘 저희 가솔들이 다 죽습니다!!
아직두 대감마님 성질을 모르시나?"
"아이참, 그거야 아버님이 날 너무! 격하게 아끼시니 그러시는게지....뭐 그리하여두 성정이 그리 못되신 분은 아니다"
"그것을 쇤네가 모르겠사옵니까? 저희 집안 식솔은 물론이요 이 조선 팔도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집 대감마님의 청렴하시고 강직하심이야 너무나 잘 알지만서도, 아기씨의 그 못말리는 성정 덕에 마음을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을요 "
"그래두... 오늘은 대궐에서 하는 신년하례가 이니더냐? 나는 말이다 어제 한숨도 자지 못하였다.
자꾸 어제 차가운 달이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 뭐니?
십첩반상 아니 먹어도, 그 잘라났다는 왕족분들 아니 보아도 이번엔.... 내가 꼭 할 일이 있단 말이다"
"아이구... 조만간 사단이 날 것이야... 으이구..."
한시라도 마음을 놓지 못해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하녀와 그 옆에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없는 소녀 아이.
운명을 이끄는 월하노인이 말했던가 인간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고 간사하여 예상치 못하고 원하지 않아도 이어질 운명과 만남은 이어지게 되어있으며
이어지지 못할 인연은 아무리 애를 쓰고 부단히 노력하여도 맺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오늘의 이 소녀의 기대의 부푼 상상은 언젠가 이어질 소녀의 인연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총기가 가득한 저 두 눈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사연을 볼 수나 있을까?
조선 팔도 중 심장이라도 한양의 소리가 시끄러웠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크게 하는 하례라고 할 수 있는 신년하례의 첫 날이었다.
나라에서는 돈이 없어 억울하게 잡혀들어온 백성들은 풀어주었으며 각설이들에게는 국밥 한 그릇씩 나누어주었다.
왕은 사대부의 모든 식솔은 물론이요 아녀자들까지도 모두 한데 모아 거하게 하례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성공적으로 돌아온 명나라 사절단에 대한 왕의 기쁨일 것이 틀림없다.
집안의 가장 깊숙한 별채에서 나온 이 아기씨는 사뿐히 가마에 올랐다.
살짝 열어둔 가마의 창문으로 느껴지는 겨울 냄세에 기분이 황홀한 것인지 아님 창호지 넘어 간간히 내려오는 햇볕 덕분인지 열넷 소녀는 알 수 없었다.
자꾸만 두근대는 심장에 연신 서책에 헛손짓을 하였다.그토록 좋아하는 서책에도 집중이 안되는지 가마 안 넓지도 않은 그 공간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 소녀이다.
가마꾼들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창경궁이었다. 분명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잔뜩 신이 나 부리니케 대궐문을 지나 명전문으로 향했다.
이곳 어딘가에 아버님이 계시리라, 양반이 못되시는 모양인지 저 뒤에서 소녀를 바라보고 뛰어온 이는 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다.
"00아, 어찌 이리 빨리 온것이냐? 어이구 이 아비가 못 보았으며 어쩌려고"
"뭐,,,, 뵈었으니 되었지요!"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한참을 제 딸여식을 바라보던 소녀의 아비는 말을 이어 갔다.
"00아, 네 어미는 지금쯤 중전마마를 도와 내명부일로 바쁠 것이다. 허니 얼른 유모와 함께 연인네들을 모아두는 교태전으로 가거라
어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곧 네 나이 또래의 옹주마마들이나 공부 마마꼐서도 계실테니 말이다.
저번처럼 딴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그리로 가야 할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네가 이리저리로 튄다면 이 아비 남사스러워
너 다시는 궁궐에 못오게 할 것이니 , 그리 알아라"
"아버지두 참, 누가 들으면 제가 이리저리 돌아다니 천방지축이라 하겠어요."
"제발 이번에는 이 아비 마음에 꼭 맞는 답을 해다오 마음이라도 놓게,
또 왕비마마와 고주옹주마마들을 뵐때는 꼭 예의 있고 바르게 몸가짐을 해야하는 것 너도 알고 있겠지?"
"아버님, 소녀가 워낙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아야하는 성격이지만은 오늘은 가만히 있겠사옵니다.
정 안되면 뭐,,,, 화원에서 서책이나 읽고 있지요...뭐 제가 한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을 테니 거정일랑은 마시구요"
진지하게 말하는 소녀의 두 눈에 아비는 두손 두발을 다 든체 보낼 수 박에 없었다.
멀리서 다가온 사내하나가 반갑다는 듯이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소녀의 아비에게 친한척 말을 건다.
홍문관 대제학께서는 이곳에 왜 계십니까? 주상전화와 세자마마가 있는 경영장에 있으셔야 할 분 아닙니까?"
"제 여식아이가 걱정이되어 나와보았는데 영 마음이 쉬이 놓이질 않습니다."
"아.... 저기 저 규수가 대제학댁의 규수입니까?
하하.... 사내아이처럼 서책을 좋아하고 학문에 그리 남다르다면서요 장안에 소문에는 4살때 사서삼경을 다 외웠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저 계집아이일뿐입니다, 늘그막에 낳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그저 저도 제 부인도 이 아이가 따뜻하고 온전한 길만 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부귀영화나 금은보석 다 필요 없고 우린..... 그저 저 아이가 평범하게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따님에게 절절 매신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저.... 평범하고 누구나처럼...그리만 살았으면 싶습니다...저는"
한참을 조용히 발걸음을 올기던 소녀는 갑자기 획 돌아 그녀의 유모에게 다가갔다.
"아이구 이게 뭔일이래요!! 왜 갑자기 잡아드실 것 처럼 쇤네를 보신답니까?"
"유모, 내가 이 궁에 올 수 있는 기회는 일년 중 몇번 안되, 아버님은 지금 주상전하와 경영을 하시니 바쁘실테고 어머님은 중전마마를 도와 하례 내명부 준비를
하고 계실 것이야 내가 가지 않아도 아우런 문제는 되지 않아."
숨을 쉬지 않고 쉬지 않고 말을 읻던 소녀에 유모는 순순히 고개를 끄떡이다 머리를 멈추었다.
"아이고 아기씨, 아니되옵니다... 제박 부탁이니 그런 생각일랑은 버리시지요!! 아니되요.."
"유모...미안하우, 내가 이 빚은 꼭 후에 갚을 날이 있을 것이외다!!!"
마지막 말을 남기도 재빠르게 사라진 쪽색 치마에, 아기씨가 입으면 얼마나 고울까 하며 설레었던 옥색 두루마기도에 하녀는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 다섯은 홀로 아시는 영특한 분이셨다. 이미 궁궐 구조는 다 알고 계실터... 아니 모르신다 하여도 제 손에 잡히지 않으 실 것이 분명 했다.
주저 앉아 발만 동동 구르는 유모는 그렇게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같은 하늘 아래 세차게 두루마기를 철럭이며 뛰어가는 소녀가 발을 멈췄다.
양옆을 돌아보는 소녀의 표정이 영 우습지 않았다. 그리 비범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소녀는 슬그머니 조그마한 꽃신을 움직여 어딘가로 들어갔다.
숨을 가득 들이 마쉴 때마다 풍겨오는 서책의 향기 간간히 같이 배이는 나무장의 오래된 향도 익숙했다.
그래, 소녀는 서향각(書香閣) 즉 서책을 보러 온 것이라.
연신 담겨오는 책들의 향이 좋았던 것인지 제 집보다 많은 서책에 놀란 것인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명나라의 희귀한 서책부터 춘추전국시대의 경전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중 유난히도 작아보이는 수첩과도 같은 서책에 눈이 쏠렸다,
작가도 어디서 쓴 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우민? 그저 달랑 하나의 제목만 있을 뿐이었다.
책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나와 있던 경전이나 유교학 서책의 자신의 식견이나 해석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한 소절 한 소절에 열정이 가득했다.
조선의 관련된 실례와 주관적 생각이 뚜렷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이 책을 보고 있는 소녀와 같은 것인지 아님 그저 느낀점이 같았는지
소녀의 해석과 똑 닮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같은 주견에 놀라고 즐거워 하던 소녀의 귓속을 후벼파는 바람이 속삭였다.
"누구냐"
흠짓 놀라 뒤를 돌아본 소녀는 뒤를 바라보곤 콧웃음을 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너에게 누구냐 묻지 않았더냐?"
"너도 책 보러 온 거니?"
"뭐?너?"
"그래 너... 여기 뭐 너 말고 누구 더 있니? 내가 책보러 온 거 아니냐고 물었잖아."
"하.... 내가 책을 보러왔다면 어쩔 것이고 또 내가 알기론 이 서고는 전하께서 왕실 혹은 허락된 학자들에게만 열어두신 서고라 들었다.
헌데 어찌 너처럼... 보아하니 왕실도 종친도 아닌 계집아이가 이곳에 있단 말이냐?"
"흠... 너가 책을 보러왔다면 조용히 내 옆에서 책을 읽는게 좋을 것이야,그리고 그러하는 너는 왕실도 종친도 그리고 허락된 학자도 아닌데 이곳에 왜 왔니?
딱 봐도 견습 내시구만, 나이도 또래인 것 같구, 갈꺼면 조용히 가고 있을 꺼면 옆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던가.."
"뭐?!.... 이 방자한 계집을 보았냐?내가 견습 내시라고? 어찌 이 몸을 보고...."
자신의 몸을 한번 바라본 소년은 입을 다 물 수없었다. 초록색 비단 도포의 누가 보아도 소년 내시 그것도 최근에 뽑은 견습 내시가 틀림이 없었다.
한참이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녀를 노려보던 소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아직 성장하지 안은 소년이지만 성숙한 티를 넘치게 보여주고 있었다.
"너.... 그 책...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읽는 것이냐? 아니 글은 읽을 줄 아느냐? 네가 읽을 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란 말이다.
이 조선의 왕세자께서 쓰신 것이다..... 계집이 어찌 무엇을 안다고 그 서책을 품고 있는 게야."
"내가 글을 읽을 수 있으며 이 서책을 읽을 만한 수준의 계집인지 아닌지 너가 어떻게 아니?
이 책이 세자전하의 책이라고? ....... 물론 이 지엄한 대궐서고에 숨어 들어온 나의 잘못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리 경솔한 너의 언행을 보니
몹시 불쾌하구나. 네가 모시는 세자께서는 이리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신데 너처럼 아랙석들이 먹칠을 하며 되겠느냐?
나는 000이다. 네가 궁궐에서만 있어 나의 소문을 모르겠지만 이 한양 바닥에서 홍문관 대제학집 외동딸이면 모두 알 것이다.
내 긴말은 아니하겟고 4살때 사서삼경을 다 외웠다. 그리 자랑할만한 학문은 아니고 부끄러울 뿐이지만
어쨋든 내가 글을 읽는 것은 이해가 되느냐?"
"................."
"더 이상 물을 말이 없다면 난 이만...."
"어.... 어떤 부분이 좋았느냐?"
"뭐?"
"그 책 말이다. 어떤 부분이 좋다는 것이길래 세자 저하께서 이리도 열심히라 하던 것이냐?"
"내 원래 이리 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실학을 들여와야 한다는 부분이 가장 좋더구나.....
저잣거리에만 보아도 밥을 굶는 백성들과 돈이 업ㅄ어 노략질을 하는 거렁뱅이들이 넘친다고 한다. 헌데...."
"헌데?"
"헌데 이 조선의 유교 중심적인 정치는 그들은 모두 포용해주지 못한다. 너무 이론적이고 심상적인 부분들을 어찌 개개인이 다른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줄 수 있겠느냐.
그것이 마음에 쓰였다.
그리하여 이 부분이 너무 좋구나. 아마 이런 분이 보위에 오르시면 분명 개혁적이고 성군이 되시리라.
그리 나는 소망을 갖는단다"
돌아서며 소년을 바라보고는 싱긋 웃는 소녀가 고왔다.
그리 소년은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빨개지는 두 볼이 낯선 계집이라 놀란 마음인 것이지 다른 연유라도 있는 듯 뛰는 마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이곳에 왜 온 것이냐? 나처럼 책이라도 볼려 온 것이냐?"
"아니다."
"혹 네 주인 마마께서 책 심부름이라도 시키든?"
"아니다. 난. 자리가 싫어 도망쳐 온 것이다."
"자리?"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넘치고 그곳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재롱이나 부려야 할 자리가 싫어 도망을 쳤느니라."
".......... "
"지금즈음 이면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모두가 날 찾고 있을 것이다. 실망시켜 드리곤 싶지 않으나 난... 그런 가식이나 떨며 이해해줄 그리 관용적인 사람이 아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최고의 신하는 곧 자신을 이겨 충성을 다하는 자라 하였다.
네가 그 자리가 싫을 수도 있으나 그런 너의 모습도 이겨야 네가 진정한 신하된 도리를 하지 않겠느냐?
너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닐 너의 동기들에게는 더 없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느냐?"
".......... "
"허나 그리도 그 자리가 싫다면 잠시만 여기 있으렴."
"뭐? 아까는 최고의 신하 어쩌구 하더니... 이거이거 순 모순적이지 않으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일지언데 니 마음을 어찌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냐?
이곳에 있어 너의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되겠지, 뭐. 나도 가끔 바느질이나 자수시간이 싫으면 도망간단다.어째서인지 서책일고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맞는 듯 하니 걱정이긴 하다."
그때였다. 우당탕 도달하는 발소리에 소녀와 소년 모두 숨을 죽였다. 삐그덕 곧 조금만 있으면 열릴 듯한 문에 소년은 빠르게 소녀를 이끌고 구석으로 향하였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 여기 안 계십니까? 어히어히..... 이것을 어찌하나 세자 저하!!!"
물론 사람들은 곧이어 물러 났지만 아직 소년과 소녀는 구석에 몸을 맞닺은 체 붙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거늘 둘의 자세가 꼬내 우스워라. 양 볼이 빨개져 아무 말도 못하는 두 어린 소녀와 소년은 모두 사춘기라.
어찌 풋풋한 그 떨림을 모르지 않겠느냐.
"나는.... 네말대로 갈 것이니라.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힘들면 아니 될 것 같구나."
"그리하려무나."
"000이라 하였느니라. 너의 이름이."
"너 절대로 내 이름을 말하고 다니면 안 될 것이다."
놀라 서둘러 말을 가로채는 소녀에 왠지 모를 웃음을 짓는 소년이었다.
"내 이름은 김민석이니라. 곧 만날 날이 올 것이니"
두 눈이 마주쳤다. 자꾸 방망이질을 하는 마음이 이상하기라도 하여 소년의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녀였고 소녀의 곱게 웃던 미소에 책을 어루만지던 손곁에
눈길이가는 소년이었다.
당돌하고도 똘똘했던 어린 소녀와 내시 옷 속에 숨겨져 있는 사조룡보라.......
인간의 인연은 참으로 간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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