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규 왕자님 ::
일년 반 전으로 돌아가보자.
내 나이 스물 두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배우며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강의가 끝나면 친구들과 눈에 불을 키고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남자 문제로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외에도 다른 여대생들과 다를 바 없이 나름 집 밖에서는 아주 평범하고도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 김민규와 나의 사이는 그냥…
만난지 십년도 더 되어서 어색해진 사이…정도…?
분명 어렸을 때 가끔 만날 때면 둘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기억이 있긴 하다.
어른들 일이라 만나던 이유는 그 때는 몰랐고, 어느 집 커다란 마당에서 김민규랑 뛰놀던 기억이 얼추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안끼리의 만남은 줄어들었고 십여년간 접촉이 없는 상태로 김민규는 나에게 아무런 존재도 되지 않았다.
내게 김민규는 대한민국 왕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쟤 기억나?"
"뭐, 김민규? 어렸을 때 가끔 만나서 놀았던건 기억나는데."
엄마의 입꼬리가 자꾸 스멀스멀 올라가려는게 보인다.
본인은 꾹꾹 참고 계시는 것 같지만, 다 보인다고요.
무슨 의도에서인지 의심스러워 대답없이 가늘게 뜬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니
엄마는 내 등을 착착 내려치며 티비 속 김민규를 한번 더 보게 한다.
국가 행사에 참여해 멀끔하게 차려입은 김민규는 젠틀한 미소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커다란 TV 화면 속 김민규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이내 김민규가 사라졌다.
흐음… 어떠냐-라…
_
그 날은 썸 타던 오빠와 데이트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두시간 동안 옷장 속 수십여가지 옷들을 죄다 꺼내서 이것 저것 대보며 설레발을 쳐댔다.
또 그만큼 시간을 들여 화장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약속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그렇게 계속 쉼없이 머리를 만져대고 옷 매무새를 만져대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 시간 한시간 전.
-어, 뫄뫄야. 영화 예매 해 놓으려고 그러는데, 무슨 영화 좋아해?
"저 웬만한거 다 잘 봐요! 아, 승철오빠 벌써 영화관이세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한손으로 목을 감싸고 통화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릴까 싶어 공중에 붕붕 발차기를 해대며, 하여튼 별 오두방정은 다 떨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침착하게. 예쁘게. 귀엽게!
-아, 아니. 아직 집이야.
오빠가 작게 웃으며 말한다.
마지막에 목소리 크기 조절을 잘못했나보다.
오빠의 웃음소리에 좋아 죽을 것 같으면서도 그만큼 창피함에 허벅지를 힘주어 꼬집었다.
성뫄뫄, 이 멍청이! 흐흐흐.
"성뫄뫄. 준비 다 했어?"
"어? 아, 오빠 죄송해요, 잠깐만요!"
내가 생쑈를 하고 있을 때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엄마.
어디 나가시는건지 단정히 차려입으신 모습이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며 만족하신다는 듯 박수를 짝짝 치더니,
가잔다. 출발하잔다.
휴대폰을 얼굴에서 저만치 떨어뜨려 놓고 엄마에게 무슨 말이냐 묻는데
불안감이 훅 엄습해온다.
뭐지…
아.
어…
아, 맞다. 시발.
"오늘 시간 비워 놓으라고 얘기 했잖아."
"아악!!!"
한참이나 공들여 만진 머리를 쥐어 뜯었다.
머리에 닿는 딱딱한 휴대폰에 그제야 승철 오빠가 생각나 급하게 방구석으로 뛰어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하, 성뫄뫄 개병신새끼!!!
"저… 오빠…"
-뫄뫄야, 무슨 일 있어? 아까 무슨 소리야?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것보다 오빠, 죄송해요…"
-어?
-아 그렇구나… 괜찮아. 급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저 나중에 제가 영화도 보여드리고 밥도 사드리고 커피까지 제가 다 쏠게요. 다음에 다시 꼭 만나요."
우는 소리로 오빠에게 백번,천번 사과했다.
사실 진짜 눈물도 나올 것 같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잔뜩 흐뜨린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오빠의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라는 말에 베시시 웃게 된다.
살짝 웃음이 섞인 오빠의 목소리가 너무도 좋아 녹음이라도 할걸- 하고 멍청한 생각을 한다..
"빨리 나와!"
"아, 가!"
현실이 그 행복한 기분을 무참히도 깨버리지만.
-
말 안해도 내가 어느 자리에 나갔는지 다들 알고 있을 듯 싶다.
그래, 난 그 자리에서 약 십년만에 김민규를 다시 만났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내가… 아오.
그 자리에 나가려고 내가 그리 시간을 들여 차려입고 꾸민게 아닌데! 하며 벽에 주먹을 날리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김민규를 보게 된 내 표정은 놀람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런 나를 보는 김민규는 살짝 미소를 띈 채로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반갑다고 아는 체, 인사한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 앞에서 예의상 해준 인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뭐, 충분히 지금도 물어볼 수 있지만… 그러기 싫다.
"여보, 과일 없어?"
(외면)
다시 돌아가자.
식사 도중 혼인 얘기가 오갔을 때의 내 기분은… 그야말로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손 꼽아 기다리던 썸남과의 데이트를 어쩔 수 없이 캔슬 시키고 끌려나온 자리에서 나의 혼인 얘기가 나오다니.
게다가 내 앞에 앉아있는 멀대 같이 커버린 김민규와 혼인을?
아니, 그 전에 내가 대한민국 왕자랑 결혼을 한다고요?
아니, 잠깐 스케일이 너무…
"뫄뫄가 부담스러우면 비공개로 식 올리려 하는데…"
"아뇨. 하나뿐인 아드님인데, 게다가 왕자의 혼인은 국가 행사인데 그럴 수 없죠. 괜찮습니다."
아버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얘기하시는데, 죽고싶었다.
왕자의 결혼식. 국가 행사. 전국 생중계.
그리고 승철오빠.
욕이 안나올래야 안나올 수 없잖아….
그래도 내 눈 앞에 계시는 분들은 왕과 왕비이시다. 표정관리를 하자, 표정관리… 표정관리.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더이상 먹으면 체할 것 같아 포크질 하는 시늉만 했다.
그러다 마주친 김민규와의 시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보며 꿈벅꿈벅거리는데 솔직히 바보 같았다.
아무 생각 없는 바보, 멍청이…
"아아, 과일 먹고 싶어-"
(외면)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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