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가 따가워질 정도로 뜨거운 태양빛아래 환호하는 소리와 아쉬움이 가득한 소리. 저마다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자기 종목을 나가기 전 몸을 푸는 주전들. 그리고 이렇게 즐거운 분위기의 체육대회와 대조적으로 우울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어. 그 사람은 자기 반 자리에 앉아 그늘아래에서 한숨을 쉬는 지민이야. 모두가 즐거워하는 상황 속 홀로 우울한 표정인 지민이는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운동장으로 나가는 걸 지켜보며 입을 삐죽거리며 자기 발목을 매만져. 정국이에게서 파스를 받았던, 그 날 하교하고 나서 축구를 못하면 어쩌나 싶어 바로 병원에 갔긴 했지. 어릴 적부터 자주 간 병원의 의사선생님에게 ‘내일 체육 대회인데! 저 축구 주전이라서 빨리 나아야 돼요’하고 찡찡거리면서 이야길 하니, 의사선생님은 푸근한 얼굴로 지민이의 발목을 약한 힘을 주어 몇 번 눌러봤어. “아! 아!” “이 정도도 아프니?” “선생님 진짜 아파요” “...지민아 아무래도 이 상태론 너 체육대회 못 나갈 것 같다." 지민이는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이 시한부 선고인 것 표정을 굳혔어. 단호하게 ‘너 이 상태로 축구하면 진짜 깁스해야 될 지도 몰라’라고 이야기 하시던 목소리가 생각나 지민인 낑 거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어. 바로 오늘이 체육대회인데, 나 완전 잘할 수 있는 데-하고 혼잣말하며 슬퍼해. 단체 줄넘기와 여자 피구 경기가 끝나면 축구차례야. 줄넘기가 돌아가는 동안 지민이는 목이 터져라 응원하러 가지 했지만 사실 속으론 고민이 많아. 아직 실장인 남준이랑 같이 축구 주전을 맡은 친구들에겐 발목 상태를 알리지 않았거든. 그래서 시큰거리는 거 참고 그냥 나가서 하고 올까, 싶기도 하고. “야! 뒤에서부터 주고 앞에 애들은 나중에 받아!” 학부모님이 먹을 것을 보내 줬는지 아이들이 들뜬 얼굴로 연한 갈색의 종이봉투를 재빨리 돌려. 지민이에게도 봉투가 왔는 데, 무엇인가 하니 햄버거 세트야. 그것도 기본 버거가 아닌 돈을 조금 더 줘야 먹을 수 있는 세트! 방금 전까지 죽상이었던 지민이 얼굴이 조금은 펴져. “실장! 이거 누가 보내 준 거야?” “정국이 어머님” “와- 전정국 어머님 완전 개 멋있다!” “아까 봤는 데 완전 미인이야. 꾹이가 잘생긴 이유가 있었어” “정국아, 잘 먹을게” 햄버거를 입에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던 지민인 정국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비싼 세트를 시켜주는 걸 보니 자기 아들과는 반대로 엄청나게 쿨하네-하면서. 그러다 얻어먹는 주제에 뭔가 ‘고맙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지민인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곤 정국이를 찾아. 정국이는 구석에서 분홍빛깔의 작은 선풍기를 얼굴에 대고 있었는데, 햄버거 세트를 입에 대지도 않고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었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라는 영석이랑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걸 봐선, 지금 고맙다고 이야기하면 엄청나게 시비를 걸어올 것 같아 지민인 조용히 먹던 거나 마저 먹어. 아이들이 모두 여자 피구를 보러 가 텅 빈 자리에 홀로 있던 지민인 아기 돼지에 빙의해 햄버거를 해치워. ‘하나 더 먹고 싶다’하고 입맛을 다시던 짐니는 이제 감자튀김을 먹기 시작하는 데, 누군가 자기 앞에 앉아. 당연히 클리셰를 따라 앞에 앉은 사람은 정국이고. “맛있냐?” “너 같으면 햄버거가 맛없겠냐.” “나 햄버거 싫어해” “엄마가 너 이거 싫어하는 거 까먹었나보지” “원래 몰라. 그냥 좋은 사람인 척 하려고 형식적으로 온 거니까” “싸가지 없는 자식. 그래도 엄마가 준 거니까 먹어” 정국이는 ‘엄마’라는 말에 작게 인상을 썼다가 자기 햄버거 세트 봉투를 지민이에게 줘. “돼지처럼 잘 먹네. 이것도 먹어라.” “줄 거면 말 좀 곱게 하지. 넌 정말 입으로 망할 자식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지민이 손은 이미 정국이에게 뻗고 있어. 봉투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정국이가 봉투를 위로 들어. 그 덕에 지민인 헛손 질을 하고. 이게 나랑 뭐하자는 건가 싶어 짐니가 인상을 쓰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이야기를 하며 정색하던 정국이가 킥킥대고 웃어. “너 지금 안 먹고 냉장고 구석에 묵혀놔서 구겨진 떡같이 생겼다” “어쩌라고. 내놔. 준다며” “아니, 다시 보니까 찌그러진 빵같이 생기기도 했네. 그냥 둘 다해라. 존나 못생기고 맛없어 보이는 빵떡” “부모님이 준 내 얼굴 모욕하지 마라. 빨리 주고 내 앞에서 꺼지기나 해.” “야 빵떡이,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정국이 형님이라고 부르면 줄게” 얼마나 즐거우면 정국이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게 만들곤 이빨까지 드러내며 웃어. 올해 들어와서 정국이가 자기랑 마주보면서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기 때문에 뭔가 기분이 묘해진 지민인 더 이상 대꾸하진 않았고. 지민이가 한 풀 꺾여 가만히 있자 정국인 지민이에게 봉투를 내밀어. 지민인 불퉁한 목소리로 ‘고맙다’라고 말하면서 받아 들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국이가 준 봉투엔 ‘정국이꺼!’라는 여성스러운 글씨가 써있어. 따로 챙기신 것 같은 데- 순간 ‘이걸 먹어도 되나?’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정국인 여전히 지민이를 보고 있었고. “여기 니 이름 써져있어” “신경 쓰지 말고 먹기나 해” “엄마가 쓴 거 같은 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안에 있는 것도 애들이나 내가 먹은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은 데...” “신경 쓰지 말랬지” “야, 그래도” “그 여자, 내 엄마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언제 해맑게 웃었냐는 듯이 다시금 정색하는 정국이를 보며 지민인 괜히 민망한 마음에 큼-거려. 더 이상 말을 한다면 자기만 피곤해 질 것 같아 미안하다고 대충 사과하고.그렇게 얘기하고 나니 갑자기 둘 사이에 어쩐지 익숙한 어색함이 찾아와. 그래 이 기류는 학기 초, 처음 인사했을 때 느꼈던 어색함과 비슷했어. 지민인 민망해져 햄버거만 열심히 먹고. 그렇게 맛있게 먹다 문뜩 연주 생각이나 이걸 왜 연주 안 주고 자기를 주나 싶어 눈동자만 들어 올려 정국이를 봐. 그러자 먼저 눈에 띈 건 정국이가 아니라 핸드폰에 달린 곰인형이었어. 지민인 그것을 보자마자 반응을 해. “야, 그거” “이거 뭐” “어제 준 거 달았네” “그럼 줬는 데 버리냐?” “사실 그거 연주가 준 거야.” “알고 있어. 김연주가 나 줬을 때 싫다고 했거든” “뭐?” “너한테 나 주라고 했다며” 정국이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민이를 빤히 봐. “그냥 니가 준 셈 치고 달고 다니기로 했어.” 뭔가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지민인 별 대꾸는 하지 않아. 오늘은 축구 때문에 심란하니까 더 이상 말싸움하고 싶지도 않았거든. 그래서 정국이가 핸드폰을 하면서 ‘넌 자존심도 없이 김연주가 주라고 했다고 나한테 바로 주냐.’라고 이야기해도 속으로 욱하고 말 뿐 그려러니 하고 넘겨. “너 축구 할 꺼냐?” 정국이가 준 햄버거 반을 먹어 갈 쯤에 정국이가 말을 걸어. 등 뒤에선 피구경기가 끝났는 지 반 아이들의 환호성소리가 들려오고.지민이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 이야기해. “응” “미친 놈. 그냥 여기 있어. 너 지금 발목 아작나고 싶냐.” “아니, 어제 병원 갔는 데 별거 아니래” “아까 보니까 좀 부었던 데,” 정국이는 말 하다 말고 못할 말을 한 사람처럼 놀라더니 제 입술을 꾹 깨물어. 그리곤 지민이를 힐끔 보다 ‘나도 더위 먹었나 보다.’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지민인 정국이 유니폼 옷자락을 잡아. “전정국” “.....” “먹어. 햄버거 세트 두 개나 먹었는 데, 뭐라도 줘서 성의 표시는 해야지” 지민이가 내민 건 호석이가 사다 준 포카리 스웨트야. 조금은 미지근해져 민망하지만 그래도 성의를 표현하고 싶어 정국이 손에 쥐어줘. 정국인 무슨 생각인 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고. 그러다 등 뒤에서 '5반과 7반 축구 경기가 잠시 후 시작하니 선수들은 모여주세요'라는 방송이 들려와. 정국인 제가 가지고 있던 선풍기를 지민이 무릎 사이로 툭 던져. “그거 가지고 놀면서 여기 있어” “야, 나 없으면 누가 수비해. 나만큼 잘 하는 애가 어딨다고” “병신. 겸손할 줄을 모르네. 너 하나 없어도 우리 반 잘해” “너 이 자식 나 왕따 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잘 아네. 그러게 남의 여친 한테 왜 그렇게 들이대.” “.....먼저 들이댄 적은 없거든. 그리고 내가 어제도 말했잖아. 연주한테 니가 잘하면 연주가 나한테 연락할 일도, 내가 착각할 일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지민인 다른 때와 달리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일어서있는 정국이를 올려다봐. “정국아” 성을 떼고 이름 부르는 건 처음 인 것 같아 지민인 민망한지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자기 뒷목을 매만져. 아래로 내려진 지민이 시야엔 자기가 준 음료수를 쥐고 있는 정국이 손이 보이고. 조금 힘있게 잡았는지 힘줄이 도드라진 것을 보다 지민이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해. “형이 이렇게 이름 불러주니까 좋지?” “.....박지민, 망상이 도가 지나치면 병이래” 정국인 그렇게 얘기하며 자기 귀를 만지작 거려. 그리고 작게 ‘뜨겁다’하고 웅얼거리고. 정국이 시야에 들어온 지민이는 표정이 웃지도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않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어.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분위기를 잡는 지민이를 정국인 그저 조용히 내려다 봐. 지민이는 정국이가 준 미니 선풍기를 틀어 제 얼굴 가까이에 대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연주랑 잘 지내라고. 제발, 연주가 나한테 연락 안 오게! 나도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연락을 안해야 마음 정리를 하든 말든 하지. 그리고,” “.....” “니가 먼저 고백했잖아. 끝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지만 그 과정들은 시작한 사람이 책임은 져야지. 상대방은 너 좋아하게 만들고, 니가 모른척하면 그건 연애 상도덕에 어긋나는거야.” “너 연애 해본 적 있어?” “....없다. 새끼야. 어쨌든!” 제 할 말을 마쳤는 지, 후련해 보이는 지민인 자기가 한 말이 괜히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지 정국이를 밀어내. 이제 가, 너 나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으면서 오늘따라 왜이리 주변에서 얼쩡대- 하고. 그 말들에 정국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로 돌아오는 아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지민인 묵혀있던 것들이 내려가는 기분에 시원하기도 하지만, 정국이가 제 충고대로 연주에게 잘 해준다면 연주에게 있어 자기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어 질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조금 서운해져. 그래서 괜히 콧잔등만 만지는 데, 저 멀리서 제가 준 음료수를 아직까지 쥐고 있는 정국이랑 남준이가 대화하는 게 들려. “박지민 발목 아파서 축구 못나가.” “이런, 이제 경기 시작하는 데. 지민이 어제 넘어진 것 때문에 그런거야?” “응. 발목 보니까 어제보다 더 부어 올랐던 데, 그 상태로 하면 걔 발목만 나가.” 지민인 축구를 하고 싶다는 제 의견 따윈 무시하고 남준이에게 못한다고 말하는 정국이에게 항의하려하다 그냥 선풍기가 주는 미약한 바람을 느끼며 앉아. 자기가 이래라 저래라 너무 참견해서 정국이가 자기를 보기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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