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더하기 하나
살아오면서 한번이라도 소심하다거나 예민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백현은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분위기파악역시 눈치만큼이나 빨랐으며 적당히 맺고 적당히 끊을 줄 아는, 맺고 끊기같이 관계를 맺을 때는 꼭 필요한 스킬또한 나름 만렙이라 자부했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듯 연애는 이성의 무덤이라고 스물. 풋풋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 제 첫 사랑을 떠나보낸 후 백현은 제 모든 것이 제 의지도 아닌데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리고 까칠한 변백현.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식어가 스물 하나가 된 지금은 백현을 상징하는 일종의 키워드가 되고있다. 오래전부터 알았던 이들에게는 딱히 전과 달라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지만 그건 그들에 대한 예의일 뿐 새로 사귄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 백현이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백현은 날카롭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었던 박찬열이 오늘. 지금 백현의 앞에 서 있었다.
스물 더하기 하나.
사람들끼리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 중에는 그런 말들이 있다.
남자가 평생에서 울어야할 때는 세번 뿐이다.
사람은 삶을 살다보면 세번의 기회가 온다.
주식은 세번 망해야 성공할 수 있다. 기타등등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 중에서 백현에게 해당되는 말은 삶을 살다보면 세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 그리고 그 세번의 기회는 바로 '사랑'이라는 영역에 한정된 것이었고 어제만 해도 백현은 자신은 이미 그 기회를 다 써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막상 눈 앞에 그 세번의 기회를 다 써버리게 만든 추억의 근원이자 제 까칠함의 원인이기도 한 박찬열이 있으니 백현은 뜬금없지만 새삼. 정말 새삼스럽게 그 말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세 번.
그래 세번의 기회에 걸쳐 백현과 찬열은 일년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했었다.
어린 나이에 했던 사랑이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냐 묻는다면 조금 대답하기 뭐해지긴 하지만 어쨌든 찬열과 백현은 키스부터 섹스까지 A부터 Z는 다 했던 사이었고 한때는 연인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좋아하기 시작한 건 자신이 먼저. 고백하기 시작한 것도 자신이 먼저. 그리고 사귀고 섹스하자 말했던 것도 자신이 먼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머저리같았다. 일년도 안지났지만 일년동안 그래도 반평생동안 좋아하던 새끼를 잊겠답시고 평생에 못놀만큼 놀아보고 나니 제 행동이 얼마나 찬열을 질리게 만들었을지 이제는 같은 남자로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지만 미련했지. 나도. 좋아한다고 해놓고 좋아하는 놈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하는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했었다. 무모한. 무모해서 열정적이었던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어때. 잘 지내냐 묻는 찬열에 백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찬열아. 우리 헤어진지 일년 넘었다."
라고.
까칠하기 그지없는 제 대답에 찬열은 놀라는 것 같았지만 '정신차려라.임마.' 백현은 이 참에 한풀이나 하듯 아주 쐐기나 가슴에 콱콱 박아줄까 고민하다 그러기엔 귀찮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어 찬열이 할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박찬열아. 너 설마 내가 일년동안 학교 꼬박꼬박 나오고 너 피해다니고,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도 안변하고 그런다고 속까지 안변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백현아."
"이제 사귀지도 않는데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다, 불러라. 불러. 이름이니까. 그래. 이제 네가 부르나 다른 사람이 부르나 같으니까 부르는 건 마음대로 부르고. 어쨌든 너 오해하는 거 같아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네가 양심은 있는지 나한테 찾아와서 이러니까 이야기는 해줄게. 난 너 원망 솔직히 좀 하는데 이건 내가 좀생이 같아서 하는 거니까 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너한테 감정 없고 너때문에 가진 거 다 놓으려니 나도 아까워서 안 놓은거니까 나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너 안좋아하니까 헛물 들이키지 말고. 아유 언더스탠? 할 말 다했음 얼른 가라. 보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백현은 말을 끝내긴 했지만 자기가 말하긴 했어도 조금 심했나?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박찬열은 백현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따지고보면 진짜. 리얼. 순도 100%의 씨발놈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 정도는 양반이지. 뭐. 잠시간 고민했던, 조금이나마 찔렸던 감정은 과거 찬열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만행들을 생각하자 잘렸던 도마뱀 꼬리마냥 순식간에 복구되고 말았다.
단지 백현이 조금 짜증이 난 건 찬열의 어리벙벙해보이는, 다소 벙쪄 보이는 표정 때문이었으니.
내가 호구가 맞긴 하지만 남이 나를 호구라 부르는 건 참을 수 없거든 이 자식아...?
사실 제가 박찬열 한정 호구에 등신이긴 했다. 스무살까진.
그렇다해도 이 정도가지고 저렇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라니. 도대체 그동안 나는 얼마나 박찬열 한정 호구로 살아왔던 것일까.
지금 저의 친구인 경수가 보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변백현이 알고보니 그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리고 순수했던 영혼이었던 시절을 가지고 있다니!하고. ……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백현은 바로 자신이 갈고닦은 합기도로 경수의 급소를 후려 팰 생각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건 사람을 앞에두고 딴생각을 하는 것이라 예의가 아니니 패스.
"너 왜 이렇게 됐냐."
어쩐지 이상하게. 알고 있던 찬열과는 다르게 피곤해보이고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백현은 이 자식이 미쳤나보네. 아니면 무슨 쑈야? 생각하며 쯧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이게 웬 소리야 싶지만 이러나 저러나 박찬열은 수준급의 연기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연극영화과 과탑이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니 쑈일 확률도 절대 배제할 수 없는 일.
또 휘둘리지 말자.
백현은 바로 일년 전까지의 찬열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와 갑자기 일년만에 개과천선하고 한번만 용서해줘 할 박찬열이 아니라는 생각에 쯧.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이제와 자신이 바라는 건 화를 내기엔 이미 늦었고 이미 끝난 인연가지고 구질구질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바람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얼른 실용음악과에서 꺼져라하는 정도일뿐.
"간단히 말하면 네가 원인이고."
"백현아."
"핑계 안되고 솔직히 말하면 이게 더 편해서고."
어쩔 수 없어 솔직히 이야기 해줬건만.
"이게 편하다고..?"
뭔가 망치로 얻어맞은 표정에 쑈하고 있네. 생각하고 있던 백현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어. 덕분에 편히 사니까 혹시 미안한 마음 있으면 가지지 마라. 네 덕분에 좋은 인생경험 했으니까."
라고.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설마 헤어진 사이에 립서비스는 바라지 않지?"
조금은 제가 봐도 날이 선 것 같지만 이 말은 꼭 해줘야겠다 마음먹은 대로 내뱉자 지금봐도 예쁘장한. 아니 자세히 보니 예전보다도 더 잘생겨지고 예뻐진 얼굴은 그 말에 마구 구겨져버렸다.
"질렸어. 그러니까 꺼져."
라고 일년 전 마지막으로 저에게 이별을 이야기했을 때처럼 마구잡이로 찌푸려진 게 찬열아. 너는 차라리 노려보는 게 나. 찌푸리면 별로야. 습관적으로 말할 뻔한 걸 속으로 삼키고 백현은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이쯤이면 박찬열의 변덕도 끝났겠거니. 자리에서 일어나 찬열에게 쓱 고개짓을 했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할 말 다했으면 나 슬슬 연습해야하니까 가고."
"........아직 노래 부르지 너."
"노래? 노래야 당연히."
부르지.내가 왜 실용음악과 들어왔는데.
뜬금없는 질문에 백현은 의아한 듯 대답했다. 뻔히 알고 있을 놈이 왜 물어봐? 아니면 진짜 자기 때문에 노래도 때려치울 줄 알았나 한심하다는 듯 찬열을 바라보자 그러면 그렇지. 씩 웃으며 찬열은 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아."
"?"
"우리 다시 사귈까?"
라고.
미친놈.
두 눈을 끔벅이던 백현은 그제야 찬열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만으로 스물.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쩌다보니 집안의 인연으로 그리고 동네의 인연으로, 학교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작년까지만해도 떨어져있었던 적이 없었고 덕분에 찬열이 백현을 어느정도까지는 아는 만큼 그보다 더. 더 찬열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백현은 손쉽게 찬열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 듯.
사실은 아직도 너한테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까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만약 남아있었다면 자신은 이미 찬열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거나 아니면 미친듯이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막상 말을 던지고 뭘 기대하고 있는건지 찬열은 예의 그 잘생긴 얼굴로 백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백현은 미동없이.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더니 쯧. 다시 한번 혀를 차고 습관대로 혀로 입술을 핥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가 이렇게 얌전하게 갈 리 없다고 생각은 했는데 역시나 사람 참 안변한다. "
단 한번. 하다못해 찬열과 헤어지는 날까지 한번도 보여준 적없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너 한대만 맞자. 중얼거리더니 퍽. 주먹을 들어 찬열의 복부를 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찬열은 윽 소리를 내더니 허리부터 무너져 바로 소파에 주저앉았지만 "너 연영과니까 내가 얼굴 안때려준거야. 고마운 줄 알아." 이제는 아예 짜증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듯 백현은 찬열의 앞에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하얀색 후드 모자티를 훅 뒤집어 썼다.
"정신 좀 차리고 그 정도 갖고 놀았음 됐지 또 와서 지랄하지 말고 양심 좀 있어봐라. 십새끼야."
한번도 찬열에게 한 적 없던 욕까지 내뱉어준 뒤 중지를 들어올리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난 이제 너같은 새끼하고는 한번은 몰라도 두번은 안 사귀니까 또 찾아오지말고.
혹시 싶으니까 말해줄게. 나 지금 애인 있어 개자식아."
그러니까 철 좀 들어라. 철 좀.
'저 자식은 언제 봐도 예나 지금이나 인물값을 못해요.'
성적도 좋고 품행도 앞으로는 우수. 그런 반면에 정말이지 철이 드는 것에 한해선 F학점을 전과목을 받아도 부족하다 생각하며 백현은 백현아. 부르는 찬열을 무시하고 부실을 나왔다.
말이 스물이지. 정말로 제 평생중 아마 삼분의 일은 될 이십년을 저런 자식에게 바쳤다니 억울하다 생각하며 부실을 나오자 마자 이제는 가득찬 휴대폰 연락처 중 하나를 골라 꾹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요,형."
언제나 그랬듯 늦게 전화를 받는 종인은 오늘도 졸려보이는 목소리지만 그래도 너밖에 없다. 종인아 우리 김종인이.
백현은 과실이 있는 건물을 나와 천천히 캠퍼스를 걸었다.
오늘 시간 되냐? 형 오늘 기분 안좋아서 그러는데 시간되면 같이 나와서 술 마시자. 되면 나와라. 종인아.하고 종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마 대답은 십중팔구 yes겠지만 일단은 난 예의있는 동방예의지국의 실음과 학생이니까. 늘 한템포 느림 종인이 예.하고 대답하자 그럼 조금있다 봐. 백현은 즐거운 듯 통화종료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는 어린 종인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오늘은 진짜 누구하고든 마셔야겠으니까.
스물 그리고 더하기 하나.
박찬열에게 쏟았던 스무살 이후 일년동안 백현이 배운 인생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은 오래 기억하고 싫은 것은 빨리 까먹자. 그리고 뭐든 기분 나쁠때는 술을 마시는 게 최고의 명답이었다.
백현이 찬열과의 기억하기 싫은 재회를 끝내고 종인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한 건 약 삼십분이 지난 뒤였다.
얼굴만큼은 삼천궁녀를 후리고 다녀도 모자를 것 같은데 얼굴과 하는 짓과는 다르게 은근히 순진한 종인은 제가 종인과 만나면 늘 술을 마셨던 게이바에 자신이 먼저 바에 도착한 후 약 십분이 흐른 뒤에야 슬그머니 백현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넌 여기 온지 육개월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러냐."
웃으며 백현이 묻자 형이 지나치게 빨리 익숙한 거에요. 예의 졸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무슨 일인데요. 가끔 보면 소같이 순해보이는 눈을 끔벅끔벅 움직이며 물었다.
말해도 되나. 고민하던 백현은 순하게 제 대답을 기다리는 종인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 예전에 내가 처음 사귄 애인 이야기 술김에 한 적 있지."
"그 개새끼..?"
"어. 그 개놈새끼. 그 놈이 오늘 찾아왔더라."
".....뭐래요?"
"뭐라긴 또 옛 버릇나왔지."
지 손에 들어오면 쉽게 질리는 주제에 제 손에서 빠져나가면 견디질 못하는 버릇.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지 맘대로 될거라 생각하는 오만.
"여전했지."
얼굴은 더 잘생겨졌지만 하는 짓거리는 여전해서. 생각을 하니 또 울컥하지만 확실한 건 예전같은 감정은 아니었어도 찬열을 보고 자신이 어떤 의미로든 흔들렸다는 건 사실이라는 것이리라. 평소에도 날이 서 보이긴 했지만 짜증이 가득하다 못해 까칠함이 극에 달아보이는 표정을 짓는 쳐진 눈매를 보며 종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은근히 긴장한 듯 물어보자 한대 팼어. 무덤덤하게 백현은 대답하는 것을 듣고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담 |
고민고민 하다가 말하는 건데, 글 읽고 나서 덧글 쓸 때 쓰고 싶은 말 없으시면 쓰지 마세요. 제일 글 읽으면서 회의감 드는 것이 자음 남발만 가득한 덧글이라던가, 같은 말만 반복한 덧글 보면 힘 정말 많이 빠지거든요? 내가 이런 덧글 받기 위해 쓰는 건가, 왜 쓰나 싶어요. 그러니까 쓰는 독자분들도 손 아프고 읽는 난 힘이 떨어지니까 그런 덧글 다시려면 덧글 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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