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Foudre
07
(부제: 녹는점)
자고 일어나니 오후 6시였다. 와, 나 미쳤나봐. 회사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 빼먹고 잠이나 자고 말이야....
진짜 난 망했다 싶어 벌떡 일어나니 내가 누워 있는 곳도 내 방이 아니었다. 여기 어디지? 우리 집 아닌데?
왠지 모를 경계감에 사로잡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도대체 내가 어제 뭐 했더라....
그냥 전원우랑 외근에 나갔고, 술을 마셨는데, 술 마시고 나서부터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여기가 누구의 집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도대체 어디야.
나 뭐 납치라도 된 건가? 막 밖에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는 거 아니야? 장기매매라던가.... 장기매매라던가.
"......진짜 나 납치 된 거 아냐?"
"......."
"아냐. 그러기엔 집이 너무 좋은데.... 사람 죽이기에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은데....."
"......."
".......악! 엄마!"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중, 비밀번호가 눌러지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아, 제발. 나 아직 결혼도 못 했고 엄마 명품백도 못 사 줬는데, 나 죽는 거 아니라고 해 주세요....
"......뭐해."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길래 눈을 떠 보니 전원우였다. 장을 보고 온 건지 정장과는 다소 안 어울리는 비닐 봉투를 든 채 나를 쉭 지나쳐 갔다.
아니, 내가 근데 왜 너네 집에 있는 건데.
"나 왜 여기 있어?"
"너 어제 술 마셨잖아."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너가 술 마시고 뻗어서, 너네 집 데려다 주려고 그랬는데."
"......."
"비밀번호 안 알려줘서, 데리고 온 거야."
"......그, 그럼 아침에라도 깨웠어야지."
사온 것들을 다 선반이며 냉장고며, 정리하는 전원우에게 쫑알쫑알 따지자 전원우는 그냥 담담하게 대답해 올 뿐이었다.
미쳤나봐. 어제 왜 술을 마셔가지고..... 그럼 아침에라도 깨우던가. 말하자 전원우가 피식 웃었다.
뭐, 뭘.... 웃어. 난 전원우가 웃으면 소름이 다 끼친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 같이 차가워서, 그랬던 걸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웃는 것 같았다.
"깨워도 죽어도 안 일어나던데."
"......."
"...너 잠꼬대 엄청 심하게 하더라."
"......."
"회사에다간 내가 알아서 잘 말해 놨으니까, 괜히 마음 쓰지 마."
내가 잠꼬대가 심하긴 하지.... 엄마가 자다가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했었다.
시험기간에는 갑자기 난 살 가치가 없다고 소리를 지르질 않나, 새벽에 배고프다고 계속 중얼거리질 않나....
갑자기 민망해졌다. 다 정리를 한 건지 옷을 갈아 입으러 방에 들어간 전원우였다.
아, 그냥 일어나자마자 나갈걸. 전원우의 집에 있기가 어딘가 모르게 거북했다. 어색해서 그런가.
"야, 야."
"......."
"전원우!"
"......."
"나 간다. 재워줘서 고, 고마워."
"......."
"회사에다가도 잘 말해주서 고...맙고. 그래. 어."
"......."
"내일 봐."
그렇게 잠시간을 앉아 있다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나 가야 될 것 같아, 진짜.
여기 더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다. 물론 쟤랑 나랑은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외간 남자 집에 오래 있는 건 좀 그렇...잖아.
맨투맨에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나온 전원우가 어색하게 웃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머리에 손을 올려, 가르마를 정리하는 지 손을 분주히 움직이다 이내 손을 뗐다.
"뭐해?"
"......머리 헝클어졌길래."
"......아."
"......어. 그래. 잘 가."
전원우의 얼굴이 붉어 보인 건 그냥 내 착각이겠지.
별로 덥지도 않은데.
*
"세봉씨."
".....예."
"어제 많이 아팠나 봐요. 다크써클 장난 아닌데."
"...아. 괜찮아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하하."
"팀장님이랑 잘 돼 가는 중?"
아니, 저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
뭐 만나기만 하면 전원우 얘기야, 전원우 얘기! 기승전 전원우다.
능글능글 웃으면서 잘 돼 가냐고 묻는 석민선배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뭐가 잘 돼요. 또 꼴에 비밀 얘기 한답시고 귓속말로 얘기하는데, 민망해서 죽을 것 같다.
빨리 착각 속에서 빠져 나오세요, 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세봉 씨는 아니어도 팀장님은 백타라니까요."
"그걸 선배가 어떻게 그렇게 막 단정을 지어요!"
"나 남자잖아요. 나도 남잔데. 남자는 남자가 보면 안다니까."
도대체 그런 논리는 어덯게 하면 나올 수 있는 건데요? 기가 차단 표정으로 석민 선배를 바라보자 석민 선배는 웃을 뿐이었다.
한 대 치고 싶다, 진짜. 정작 듣는 사람은 싱긋도 안 하는데 계속해서 입을 뻥끗하는 석민 선배를 애써 무시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배가 입을 다물길래, 뭔가 싶어 선배를 보았다.
"이석민 씨 자꾸 그렇게 농땡이 피울 겁니까?"
"헐. 팀장님 너무해요. 사원끼리의 친목 다짐, 이런 건데."
"친목은 무슨...."
"팀장님 저한테만 너무 엄격하신 거 아닙니까. 너무해요."
"이석민 씨 오늘 야근인 건 알죠. 계속 농땡이 피우세요."
"팀장님. 오늘 회식인데요-"
"......그럼 내일 남으라고."
전원우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이석민(선배라고 부르기 귀찮아졌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원들 안 잡기로 유명한 전원우 입에서 야근이란 말이 나오자 주변 사원들이 모두 이석민 쪽을 쳐다봤다.
있는 힘껏 눈썹을 꿈틀거리며 억울하다고 말하는 이석민이었지만 전원우는 짤 없었다.
아니.... 근데 오늘 회식이라고? 나 어제 술 마셔서 뻗었는데?
"......오, 오늘 회식이에요?"
"응. 그냥 세봉 씨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아, 근데 이건 진짜 내 촉이 틀릴 리가 없어."
"......아니, 뭐가요."
"지금 팀장님 질투하는 거다."
진짜 자꾸 그러고 싶어요?
"봐봐. 지금 저기 팀장님 복사하는 척 하면서 나 보잖아요."
"......아. 예예."
"진짜라니까? 방금도 나 째려봤다. 썰릴 뻔."
"......."
"그래서 언제 사귀실 예정?"
"......아오, 진짜. 제발 할 일 좀 해요!"
정말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
난 회식이 싫다.
물론 직장에서의 회식을 경험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대학에서 수도 없이 가졌던 모임들로 미루어 봤을 때,
회식은 별로 좋은 문화가 아닌 것 같다. 가족끼리 얘기하면서 술을 마시는 건 그래도 큰 어른이 계시니까 괜찮은데,
그냥 젊은 사람끼리 옹기종기 모여 술 마시는 자리는 그닥 좋은 곳이 아닌 것 같다.
일단 난 억지로 술을 받아 먹는 게 싫다고! 그렇지만 줏대 없는 나는 주는 대로 덥석덥석 잘 받아 먹었다.
"오, 세봉씨. 생각보다 술 잘 하나 봐요."
"아...아니에요. 하하."
"그럼 또 받아요."
와, 나 진짜 욕 나올 뻔했어. 눈치라고는 단 1도 보유하시지 않았군요.
이제 슬슬 속이 니글거리는 게, 그만 마셔야 한다는 신호가 온 것 같은데....
그래서 일단 받기만 받았다. 물이랑 바꿔치기 하고 싶다....
난 소주의 풍미를 느낄 만큼의 깊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아, 근데. 팀장님 요새 세봉 씨 엄청 잘 챙겨주시던데요."
"...아."
"맞아, 맞아. 맨날 밥도 같이 먹고. 뭐에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화장실에서 내 얘기를 껌 씹듯이 질겅질겅 하던 분들이었다.
누가 들어도 순수한 의도로 묻는 것 같지만은 않은 말투로 물어오는 여직원들 때문에, 내 속이 괜히 다 타 들어 갔다.
전원우를 슬쩍 보니 전원우의 표정은 그냥 떨떠름했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아, 아니. 그냥. 팀장님이 보통 여직원들 잘 안 챙겨 주시니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반응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
"직원들 사이에서 세봉 씨가. 막 줄 서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도 돌고, 그래서. 헛소문이 더 퍼질까봐, 여쭈어 본 거에요."
저 년 입 좀 누가 틀어 막아 주세요.... 순식간에 여직원들끼리의 무언의 대화가 오가면서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겪어 보니 그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무슨 마녀 사냥 당하는 기분이었다. 다들 나랑 전원우를 번갈아 보면서 맞아, 맞아. 라고 말하고,
그들이 원하는 답변은 뻔하디 뻔한 거였으니까. 아무 것도 아니에요, 라는 말.
"정말 오해가 커지는 게 싫어서 물어본 겁니까?"
"......아, 무, 물론이죠."
"그러면 따로 물어 봤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냥 사람 하나 쥐 몰듯이 몰고 싶었던 건 아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처음 말을 꺼낸 여직원에게 무표정으로 물어오는 전원우 덕에, 내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 되는 것 같았다.
판이 바뀌었다. 그냥 웃어 넘길 줄 알았던, 전원우는 그 여자한테 차분히 따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고,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생각할 줄 알고, 눈치 있으면 누가 나한테 들이대고, 줄 서는 지 다 보입니다."
"......."
"근데 김세봉 씨는 아니거든."
"........"
"내가 들이대는 겁니다. 내가 싸고 도는 거라고."
"......."
"내가 좋아해서 그러는 거에요."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뻔 했다. 눈치 없이 이석민은 내 말이 맞죠? 하면서 내 옆구리를 찔렀고,
얼음장 같았던 분위기는 다시 금방 후끈해졌다. 너 뭐라고 한 거야?
*
"너 왜 그랬어?"
"......뭐가."
"굳이 그렇게 말 안 했어도 됐잖아."
"......."
"너 옛날부터 되게 거짓말 잘 치는 거 알아?"
"......."
"너가 날 좋아해? 너가?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나 감쌀 필요가 있었어?"
회식이 끝나고, 사원들이 억지로 나와 전원우를 떠밀었다. 바래다 주라며.
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옛날하고 하나도 달라진 거 없는 전원우의 대응 방식에, 기가 찼다.
너 맨날 그랬어. 넌 맨날 나 피 말리게 해 놓고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좋아한다고 나 곤란하게 만들었잖아.
전원우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옛날의 감정들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야."
야. 운을 띄운 전원우의 표정은 상당히 상기 돼 있었다. 내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다른 모습이었다.
한숨인지 뭔지 모를 열띈 숨을 내뱉은 전원우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번도 화나 보인 적 없던 전원우는,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나는 그냥 벙 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넌 안 믿기겠지만 나 너한테 한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
"......."
"그래. 너 말대로 나 이기적이고 못됐고, 병신이야."
"......"
"나 너 좋아했고, 좋아해. 근데 너한테 그렇게 했어."
"......야."
"너한테는 최승철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고 너가 걔한테 몹쓸 짓 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너 최승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
"최승철이 너랑 만나는 동안에 얼마나 다른 여자 만나면서 갈아치웠는지 넌 알기나 해?"
"......."
"난 그게 죽을 만큼 싫었어. 도대체 뭐가 좋다고 맨날 울며 불면서 만나는지 이해를 못 했어."
"......"
"그래 그 때 그렇게 말 한 거고."
"......."
"네 말대로 나 미친놈이야. 그냥 나 싫어해. 미워해."
말을 끝낸 전원우의 눈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너 미친놈이야."
"......."
"근데 나 너 못 미워해."
"......."
"그냥, 말해줬어도 됐잖아. 그러면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잖아."
"......"
"너 왜 그랬어."
그렇게 나는 전원우 앞에서 계속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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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로 시험이 끝났어요!
원우.... 원우쓰...... 8ㅅ8...........
고백 편이네요....엉엉..... 원우야ㅠㅠㅠ
넌 미친놈 아니여ㅠㅠㅠ 엉엉....
늘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못 들어온 사이에 보니까 많은 분들이 댓글 남겨주셨더라구요..
독방에서 추천받으셨다는 분들도 계시고... 헐... 제 글이 무슨..^^..
성은이 망극합니다ㅠㅠㅠ 정철이 임금빠돌이인 것처럼
전 독자님들 빠수니 하려구요.. 하하!
암호닉은 늘 받습니다ㅠㅠㅠ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정리할게요!
늘 사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론 자주자주 올게요. 밤샘포스팅!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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