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Foudre 05
(부제: 적과의 동침)
꿈을 꿨다. 그것도 엄청난 악몽. 그 때 그 날. 8월 8일이었다. 여름, 최승철의 생일.
몇 년이 지났지만 그의 표정은 내 뇌리에 너무 깊숙히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질 않는가 보다. 난 누군가를 울린 적이 없었다.
그 날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라는 걸 처음 내 본 날, 그것도 타의로, 나는 그 뒤로 그 누구와도 연애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
'너가 다 처음이라고 나한테 말했듯이, 나도 너한테 그랬어.'
'.......'
'근데 넌 아니었나 보네.'
'.......'
'미안해. 너 못 잡겠어서.'
그 날처럼 무더운 한 여름 밤의 공기가 숨을 옥죄이듯,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잠에서 깼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옷 소매로 닦았다. 탁상에 놓여져 있는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내 볼에서 떨어지는 건 눈물일까. 애써 눈을 감으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눈 앞에 그 때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 되는 것만 같아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홀드 버튼을 누르자 마자 보이는 건 언제 보냈는지 모를 전원우의 카톡들이었다. 월요일 날 늦지 말라고. 너 잘 늦잖아.
서로 다정할 사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전원우가 보낸 문자의 내용에는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픽 실소를 내뱉으며 알겠다고 나도 딱딱하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이 몇 신데 바로 읽으시나."
-너는.
"그냥. 자다가 깼는데 잠이 안 와서."
-......빨리 자, 그냥.
"넌 왜 안 자는데?"
-자다가 깼어.
피 있고 눈물 있는 사람들이 하는 대화가 맞긴 한지.
전원우와 내가 하는 대화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생기라는 것이 없었다.
건조한 말들을 내뱉고, 몇 초씩은 계속 지속되는 정적에 서로 민망해 하면서도, 전원우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자다가 깼어. 어쩐지 좀 갈라진 목소리의 전원우였다.
거실에 나가 찬물을 따랐다가, 갑자기 손에 힘이 풀려 컵을 떨어뜨렸다.
산산조각이 난 건 아니었지만 유리컵이 보기 좋게 깨졌고,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걸까.
-너 뭐 떨어뜨렸어?
"아니, 그냥. 물 쏟은 거야."
-컵 깨졌어?
"어. 치워야 되니까, 아야.
유리 조각을 집다가, 손바닥이 베였다. 손바닥이 쓰라렸다.
주변에서 급하게 휴지를 뽑아서 손바닥에 댔다.
새햐안 휴지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베이면 어쩌려고 전화 하면서 깨진 걸 치워.
"......."
-장갑을 끼든지, 쓰레받이로 치우든지, 신문지를 깔든지.
"......."
-조심하면 어디가 덧나나.
"......."
-일단 손 씻고, 유리 조각 박혔을 수도 있으니까 잘 살피고, 약 바르고 밴드 붙여.
"......."
-그러고 나서 치워.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속사포로 잔소리를 하는 전원우가 갑자기 낯설었다.
수도 없이 들었던 전원우의 차가운 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퍼지는 듯 했다.
알겠어, 대답하자 전원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 너머에 흐르는 정적이, 전원우와 나의 거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많이 멀구나.
"병 주고 약 주고."
-.......
"너 미워하지 말라고?"
-.......
"이러면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전원우."
*
월요일 아침, 이제 제법 추워진 날씨였다.
목을 에는 듯한 추위에 팔짱을 끼고 집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저기 있구나. 전원우의 차가 보였고, 무거운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너 늦었어."
"......."
"5분이나."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에서 쉽게 나오질 않았다.
늘 그랬듯, 나는 전원우한테 눈길을 주지 않았고,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그 미웠던 얼굴이, 그런데, 왜 오늘따라 밉지가 않은 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쟤를 미워할 만큼의 체력도 안 남아 있는 걸까.
"미안해. 빨리 나오려고 그랬는데."
"......."
"짜증났겠다. 기다리는 거."
"......아냐."
처음으로 그렇게 싫었던 전원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늘 가시를 세우던 내 모습이 익숙했는지, 미안하다는 말에 나를 어색하다는 듯 쳐다보는 전원우였다.
짜증났겠다. 절대 비꼬는 투가 아닌 말투로 말하자, 전원우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아니라고 답했다.
차는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고, 차는 거래처 사람을 만난다고 하기에는 좀 후미진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사람을 만난다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전원우를 계속 쳐다봤지만, 전원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라도 말해주면 안 될까!
"진짜 거래처 사람 만나러 가는 거야?"
"그 사람, 지금 자기 별장에서 쉰댔어."
"......."
"찾아오는 거 아니면, 거래 못 한다고."
"......"
"내려, 다 왔으니까."
세상에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안전 벨트를 풀었다.
이런 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변 풍경에 비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집이 보였고,
상황이 적응이 안 되는 나와는 다르게 익숙하다는 듯 발걸음을 내딛는 전원우 뒤를 따라올 수 밖에 없는 나였다.
별장 안에 들어가기 전에 무슨 집사인 건지, 어떤 남자가 전원우에게 전원우가 맞냐고 묻더니, 들여보내 주었다.
정말 그들이 사는 세상이구나. 나는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이런 데에 못 살텐데.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는지."
"그건 내가 자네한테 묻고 싶은 거고. 옆에는 누구지?"
"새로 온 사원입니다. 위에서 실습 겸 데려가라고 하셔서, 같이 온 겁니다."
"그런가. 일단 앉게."
나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봤는데, 싶었는데.
꽤나 유명한 기업의 셋째였던가. 아무튼 그렇게 인상이 좋아보이지만은 않는 나이 든 남자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전원우와는 아는 사이였는지,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모습이 그렇게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뭔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서.
그 동안 수도 없이 전원우의 차가운 모습들을 봐 왔지만, 이번만큼 차가워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괜히 나까지 눈치가 보이는 분위기였다.
"이미 거래는 다 승인해 놨네."
"......그런데 왜."
"그냥 오랜만에 자네 보려고, 겸사 겸사."
"......."
"내 딸 만나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하고."
"......."
"자네 아버지. 역시 진정한 갑은 다른가? 내가 그렇게 밀어붙여도 결혼 치르려고 하지는 않데."
"......."
"그래도 내 성의를 생각해서 만나라도 보지 그랬나."
도대체 이 분위기를 뭐라고 말해야 한담....
전원우의 표정은 싸하다 못해 거의 그 남자를 노려보는 수준이었고, 오가는 말들이 상당히 전원우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 뿐이었다.
결혼은 또 뭐고, 딸은 또 뭐람.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건가, 정략결혼인가. 그런 거.
도대체 윗 사람들은 왜 나까지 딸려 보내서 민망한 이 분위기를 감당하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전원우가 굉장히 불쾌해 한다는 점?
"말씀하셨듯, 제가 갑입니다."
"......."
"저희 아버지, 그렇게 의미 없는 만남 갖는 거 싫어하십니다."
"......."
"강요하시지도 않습니다."
"......."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날 거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만날 생각도 없고."
"......이유가 뭔가. 뭐 숨겨 놓은 여자라도 있나 보지?"
숨겨 놓은 여자라도 있나 보지? 비꼬는 말을 듣자 마자 전원우가 피식 웃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가 비웃는 모습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였다.
"숨겨놓은 여자 없구요."
"......."
"딸 팔아서 이득 보려는 당신 싫어서 그렇고."
"......."
"난 누구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겁니다."
"......."
"평생 혼자 늙어 죽지."
*
이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전원우는 그렇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나를 붙잡고 방을 나가 버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에 타자마자 그 별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차는 다시 한참을 달렸고, 겨울 해는 정말 빨리 졌다.
내가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기분이라, 어떻게 전원우를 대해야 할 지, 아니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조금도 감 잡을 수가 없었다.
"왜 너가 민망해 해."
"......아니, 그냥. 민망한 건 아니고."
"......."
"알면 안 되는 거.... 안 것 같아서, 그래."
너가 안쓰러워 보여서. 차는 한참을 달리다가 멈췄다.
월요일의 한강 공원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고, 앉아 있기에도 추운 날씨였지만, 무턱대고 내리면 안되냐고 묻지도 않은 채, 내려 버렸다.
"나 최승철.... 꿈 꿨어. 8월 8일이었어. 너가, 그랬던 날에."
"......."
"너 이해 못 해, 나는. 아직까지도."
"......."
"근데 이제 네가 안 밉다."
"......."
여자의 마음이 갈대 같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나. 물론 싫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좋아지고,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몇 주간 느낀 건 전원우를 미워할 만큼 나는 독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거였다.
내가 너한테 진 거야. 덧붙이면서 전원우가 뜯어 말렸는데도 사온 맥주캔을 땄다.
"술 마시면, 너 기억 하나도 못 할 거잖아."
"......몰라, 말리지 마."
"차라리 기억 못 했으면 좋겠네."
술이 몸에 들어가자마자 후회함을 느꼈다. 나 술 못 마셨지.
*
"너네 집 비밀번호가 그래서 뭔데."
"아으, 시, 러. 안 알랴 줄 거야! 비밀버노 잖아!"
"......그럼 너 길바닥에서 잘 거야?"
"아니, 아니. 내가 우리 집 들어 갈 거야!"
이래서 난 술 마시는 여자가 싫다. 30분 째인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해도 안 알려주는 김세봉이었다.
길 바닥에다가 여자를 내 놓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절대 합리화는 아니고, 김세봉을 들처 업고 하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 여기 우리 집 아니잖, 아!"
"어, 너네 집 아니야."
"우리, 집, 데려가 줘! 아, 시러, 싫어. 우리 엄마가아, 아무 남자 집에서나 자는 거 아니래!"
"......그냥 길바닥에 내놔 버릴까."
남의 집 들어가는 거 아니라면서 정작 집에 들어오자마자 안방은 귀신같이 찾아내서 침대에 드러눕는 김세봉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난 어디서 자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모습을 보니 그냥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불을 덮고 자야 할 텐데, 이불 위에 그냥 누운 채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옷장에 묵혀 놓은 이불을 새로 꺼내 덮어 주었다.
"잘도 자네."
"......."
자는 모습을 그냥 계속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술에 시선이 향했지만, 그냥 방을 나와 버렸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 나쁜 말은 아니지만 반가운 말도 아니었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철이 없었던 나는, 뭐든지 쉽게 가질 수 있었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를 어르고 달래 내 쪽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려고 했던 모든 길을 망쳐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좀 봐 달라고. 발악하는 것이었다.
아재개그입니다.
오늘은 뭔가 글 서식을 바꿔 봤어요..
여러분 티켓팅은 모두 잘 하셨는지요..^^..
저는 광탈입니다! 네! 하ㅏ하하ㅏ!
그리고 2주 후에 시험이에요! 미쳤나봐!...
아무튼 오늘은 분량 조절을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포인트는 똑같습니다... 읽어주심에 감사하기 때문에!
원우의 번외가 살짝.. 나왔는데, 원우 찌통이에요...ㅠㅠ
원우야 난 너를 사랑해 줄 수 있는데ㅠㅠㅠㅠㅠㅠㅠ
늘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려요!
아마 다음 글은 일주일 후에 오지 않을까 싶어요.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