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은 잠깐 미루고 같이 민규랑 한 번 사내연애 해보아요 썰
골든 리트리버 같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비글처럼 나한테만 지랄맞는 팀장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잔뜩 쌓여있음에 한숨밖에 안 나왔다. 원래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는데…. 요새 연말이라 그런지 부쩍 바빠진 회사에 나는 물론이요,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사장님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을 하신다고 하니 말 다했다. 매일같이 야근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토요일까지 반납해 회사로 출근해야하니, 나오는 건 한숨이고 늘어가는 건 통장 잔고가 아닌 주름 뿐이었다. 그래, 토요일까지 회사로 나와 출근하는 건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내가 고생한만큼 보너스도 만만치 않을 거니까. 황금 같은 토요일도 순순히 반납해가며 미친 둣이 일처리만 하는 나지만 그런 나를 잡아먹지못해 안달인 팀장님은 정말 없는 정도 떨어지더라.
"부장님이 요즘 다들 고생한다고 정시 퇴근하라고 하셨어요. 오랜만에 하는 제대로 된 퇴근이니까 힘내서 일 열심히 하고 보고서 엉망으로 써오는 분들은 남들 퇴근하는데 야근시킬 겁니다?"
정말 팀장님 말씀대로 오랜만에 들려오는 정시 퇴근 소식에 너 나 할 것 없이 부서 안에 있는 사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다른 사원들이 이 보이게 웃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나도 얼른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한 번 달리자고 카톡을 보냈다. 간만에 친구들과 만날걸 생각하니 들뜬 마음에 그렇게 몇 분 동안을 카톡만 하다 겨우겨우 키보드에 손을 올려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뜬 마음으로 보고서를 쓴 결과는 보기좋게 fail. 너무 들뜬 마음으로 보고서를 쓴 내 탓일까, 아니면 내가 입사한 이후로 나한테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김민규 이 개 같은 팀장의 탓일까.
"너봉 씨는 오늘도 야근이네요. 이렇게 남들 제 시간에 퇴근할 때 혼자 남아서 야근하는 것도 흔치 않은데."
…씨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온다면 저 망할 김민규 개새끼 존나 패고 싶다. 남들은 퇴근시키면서 나만 야근시키는 팀장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아요, 이 새끼야. 나는 잠시 나를 떠나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팀장님이 오늘은 다들 정시 퇴근이라고…하셨……."
"퇴근을 제 때 하고 싶었으면 보고서를 잘 써왔어야죠."
보고서를 갖고 나가라는 팀장님의 말에 죽을 상이 돼서 팀장실 밖으로 나왔다. 곧 죽을 것만 같은 내 얼굴을 보고 다른 사원들은 보고서 퇴짜 맞았냐며 위로 한 마디씩 했고, 그중 이석민 사원은 기운 내라고 보고서 퇴짜 맞았다고 설마 팀장님이 야근이라도 시키겠냐며 나를 두 번 죽였다. 이석민이건 김민규건 둘 다 씨발이다. 씨발.
"너봉 씨 수고해요. 어깨도 좀 피고."
"너봉 씨 놔두고 가려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 아까 내가 괜한 말 한 것 같아. 용서해 줄 거죠?"
나를 두고 퇴근을 하는 사원들이 하나같이 왜들 그렇게 얄미운 건지. 나는 괜찮다고 얼른 가서 쉬라며 차마 가지 못 하는 척하는 사원들의 등을 떠밀어 배웅까지 하고 왔다. 막상 배웅해주고 오니 나 혼자만 야근을 해야하는 억울한 마음에 도저히 야근을 못 할 것 같아, 오늘 하루만 야근 좀 빼달라고 따지려는 말단 사원의 패기로 당당하게 팀장실로 들어갔다.
"아. 저… 그게."
막상 팀장실에 들어가서 무슨 문제 있냐는 식의 팀장님의 눈빛을 보니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존재하던 말단 사원의 패기는 어디 갔는지, 웬 쭈구리 영혼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볼만 빨개져서는 우물쭈물 하자 팀장님은 그런 나를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
"너봉 씨. 내가 지금 혹시나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야근 빼달라고 말하러 온 건 아니죠?"
…네? 놀란 마음에 얼른 고개를 들어 팀장님을 보니 팀장님은 맞나보네 하며 실실 웃어보였다.
"그게요, 팀장님. 제, 제가 다른 날이면 그냥 야근을 하겠는데요, 오늘은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미친. 말 더듬는 건 또 뭔데. 진짜 오늘 이러저래 되는 일 하나 없다. 일 못 해서 야근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웃음 거리가 되고. 탬장님은 그걸 놓칠새라 내가 말 더듬는 걸 듣고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웃음을 참는 게 힘겨워 보였다. 김민규는 진짜 개새끼다. 사람이 말 더듬을 수도 있지, 그걸 보고 그렇게 웃음을 힘겹게 참으면 내가 뭐가 돼. 그동안 팀장님한테 쌓였던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울컥하며 눈물이 고였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가 이상했던 건지 겨우 웃음을 멈춰 나를 본 팀장님은 내 눈에 눈물이 고인걸 보자 당황한 듯 싶었다.
"너봉 씨 울어요?"
"…아니요, 안 울어요!"
애써 눈물이 나오려는걸 참고는 됐다고 얼른 일 처리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뒤돌아서 팀장실을 나왔다. 그러자 팀장님도 나를 따라 나오더니 팀장님은 내 손목을 잡고 뒤를 돌아 자기를 쳐다보게끔 했다.
"그렇게 야근하기 싫었으면 말을 해야죠. 울면 쓰나."
"네?"
"알겠어요. 야근 배줄 테니까 이제 그만 뚝 그쳐요."
정말요? 그제야 환해지는 내 얼굴에 팀장님은 그렇게 좋냐며 엄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왠지 모를 설렘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는 고개를 돌려 가방을 챙겼다.
"근데 무슨 약속이길래 그러는 거에요? 남자친구?"
"네? 아, 저 남자친구 없는데요."
"그래요?"
이건 뭐지. 남자친구 없다는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팀장님한테 아까 괜히 설렌 내가 바보지. 나는 팀장님을 따라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는 가보겠다며 서둘러 나오려고 했지만, 또다시 팀장님에게 잡혀버린 손목에 제아무리 팀장님이라도 짜증이 났다. 왜요. 또 뭐때문에 그러는 건데!
"내가 야근도 일부러 빼줬는데 그렇게 그냥 가는 거에요?"
그럼 나보고 또 어떡하라는 거야. 팀장님만 멀뚱멀뚱 쳐다보자, 팀장님은 제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다른 직원들 전화번호는 다 있는데 너봉 씨 번호만 없네요. 너봉 씨 이제 저한테 그만 철벽치고 번호 좀 줄래요? 나는 너봉 씨랑 어떻게 잘 해보고 싶은데."
푸른 밤은 잠깐만 미룰게요! 다음 편을 쓰기가 힘이 드네요.
그래서 조만간은 민규 글로만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