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만들어주신 그대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암호명 정리해서 조금있다가 공지띄울께요!
1편 2편 3편 다 초록글 입성!
모두 그대들 덕분입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4편! 렛츠고!
인생그래프꼭짓점 04 |
"여기 앉아도 되죠? 다리가 아파서."
성규가 두번째 캔맥주를 비우고 우현을 보며 맥주캔을 잔뜩 찌그러트리려고했지만 생각외로 맥주캔은 단단했다.
"에이씨."
결국 바닥에 맥주캔을 세우고 발로 콱콱 밟아 찌그러트린 성규가 세번째 맥주캔을 따려하자 우현이 그 맥주캔을 가져가 소매로 맥주캔 입구를 슥 닦아 건낸다.
"병 입구에 수만가지 세균이 있대요."
우현이 말을 끝마치고 맥주를 벌컥 들이키자 성규가 뒤따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입에 묻은 거품을 닦은 뒤 대답했다.아, 점점 더 알딸딸해져온다.
"술기운에 쪽팔림 무릅쓰고 말하는건데 사실 저 직장없는 백수에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흠칫 놀라며 우현을 쳐다봤다.
"갚아주냐구요. 일억오천."
성규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캔맥주를 쓰레기통에 넣고 과자봉지를 든 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규의 혼잣말을 들은 우현이 피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인생그래프꼭짓점
4.
"…하아암. 어머? 명수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꽃무늬 핑크 잠옷을 휘날리며 부엌으로 달려간 봉신 씨가 아침밥을 차리는 동안 명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집안이 소란스러워지자 현관문 앞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난 성규가 감은 건지 뜬 건지 모를 눈을 벅벅 비벼댔다.
"나 여기서 잔거야? 아, 머리아파…."
성규가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성규에게 관심을 두는 이 없었다. 입을 삐죽거리며 봉신 씨와 명수를 한 번씩 흘기고 주섬주섬 일어난 성규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거실에 놓아두고 식탁에 가 앉았다.
"아, 속아파." 허어허어하아하아. 손을 들어 자신의 입 냄새를 맡은 성규가 해맑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비엔나 소세지다!"
비엔나 소세지가 들어있는 접시에 젓가락을 들이대자 봉신 씨가 성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왜!"
성규가 젓가락을 쪽쪽 빨며 명수가 식탁에 앉기를 기다렸다. 마치 사료를 먹기전 기다리는 강아지같은 모습이다.
*
"아침밥 진짜 안 먹게?"
소파에 앉아 아침 뉴스를 보던 성열이 현관으로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순재가 건네는 서류가방을 받아들고 마당으로 나온 우현이 허리와 목을 몇 번 돌려 아직 잠자고 있는 근육들을 깨웠다. 휘파람을 불며 마당을 지나 주차해놓은 차를 리모컨으로 열었을 때 옆집 문이 철커덩 열리고 명수가 하품을 하며 걸어나왔다. 차에 타려던 우현이 누군가 싶어 명수를 빤히 쳐다보자 하품을 하던 명수가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우현의 시선을 마주했다. 명수가 먼저 머쓱하게 인사를 하자 우현도 역시 머쓱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쟤가 동생인가? 형이랑은 다르게 착하네.
"돈 많이 벌어와라."
형제가 참 유별나다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성규와 명수의 눈 사이즈를 재던 우현이 성규와 눈이 딱 마주치자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지으며 차에 올라탔다.
"뭐야. 왜 비웃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성규와 명수 앞에 멈춰선 우현의 벤츠 창문이 지이잉 내려가고 운전석에 타고 있는 우현이 고개를 내밀자, 짝다리를 짚고 후드티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은 성규가 삐딱한 말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왜요."
명수를 태운 벤츠가 성규의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어우~ 재수 없어.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벤츠의 뒷 표정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더 불쾌해진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은 뭐지. 한편 우현의 차에 탄 명수는 벤츠 내부에 감탄하며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남우현이에요. 스물여섯입니다."
형보다는 얌전하네. 우현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니?"
예전부터 분위기도 좋고 밴드 연주도 수준급이라서 순재와 성열과 함께 자주 갔던 곳이었다.
"…형은 집에 그냥 있고?"
백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 괜스레 묻고 싶어졌다.
"말로는 직장 구한다고는 하는데 모르죠. 근데 안 구하고는 못 배길걸요? 다음 달까지 취직 못 하면 큰 고모부 공장에 확 팔아넘긴다고 엄마가 아주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거든요."
명수가 봇물 터진 듯이 줄줄줄 성규의 과거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우현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말한 걸 알면 성규의 작은 두 눈이 발카닥 뒤집힐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그래도 우리 형이 은근 머리는 좋아요. 대학교 때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구 대회에서 몇 번 대상도 탔었구요."
차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과 우현밖에 없는데 마치 비밀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며 말한 명수가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차 안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기업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 이 세 곳 빼고는 다 쓰레기통에 처넣는대잖아요." 우현의 벤츠가 정류장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감사합니다,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는 명수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준 우현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명수에게서 성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은 우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골때리네."
"하이."
사무실 안에 있는 커피기계 앞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호원이 사원증을 목에 걸며 들어오는 우현을 향해 손을 휙 흔들었다. 대답으로 호원이 엉덩이를 툭 친 우현이 깨끗이 씻어놓은 컵을 꺼내 향긋한 블랙커피를 잔에 따랐다. 우현과 초중고를 같이 나온 호원은 우현의 베스트프렌드이자 든든한 가족과도 같다. 비록 직급은 우현이 팀장 겸 부장이고 호원은 갓 대리가 된 사원이지만 회사 안에서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사 사람들도 거의 다 호원과 우현의 사이를 알고, 또 그렇다고 해서 친구사이를 빌미로 일을 대충 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니깐.
"굿모닝."
호원이 턱 끝으로 깔끔하게 비워져 있는 김복남 씨의 책상을 가리켰다.
"관뒀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우현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사람이 자기 일을 충실히 하지 않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한테 맡기기에는 요즘 다들 업무가 많아서 문제고."
자리로 향하려던 우현이 호원의 구두 안쪽에 살짝 비치는 보랏빛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또 구두에 보라색 양말 신었냐?"
우현이 혀를 차며 가장 안쪽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볼네드 백화점의 매출 그래프가 지붕을 훌쩍 뚫고 있는 덕분에 다들 업무가 늘어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움푹 팼는데 이런 상황에 업무를 나눠 맡기면 불만이 속속히 터져 나올게 분명했다. 직원들이 시간에 맞춰 하나둘씩 출근하고 곧 사무실 안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팩스 소리, 복사기 지잉지잉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한참 일을 하는데 여직원 한 명이 다가와 조그마한 선인장 화분을 우현의 책상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서류를 정리하던 우현이 화분을 한번 돌려보더니 여직원 얼굴을 쳐다봤다. 이게 뭐냐는 표정이다.
"요즘 업무때문에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계시잖아요. 팀장님께 해를 끼치는 못된 전자파를 제가 조금이나마 차단해드리고 싶은,"
우현이 선인장을 구석탱이로 스윽 밀어놓고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자 여직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같은 여직원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정리를 마친 서류 뭉텅이를 한쪽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직원 현황 파일을 챙겨 직원의 휴가와 복지,급여와 채용을 관리하는 인사관리부가 있는 7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사람들이 우현이 타고 있는 걸 보더니 마치 실례라도 저지른 듯이 꾸벅 인사를 하며 다른 쪽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왜 이렇게 피하지.나한테 무슨 썩은내라도 나는걸까? 우현이 셔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고급스러운 향수냄새뿐인데. 7층에 내린 우현이 익숙한 걸음으로 누군가를 찾아가더니 회사안에선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모!"
접무실에 앉은 우현과 우현의 큰 이모 소영.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난 후 우현이 기획팀 직원 파일을 건네며 이야기를 꺼냈다.
"기획부서에서 직원 한 명이 나갔어."
'그래도 우리 형이 은근 머리는 좋아요. 대학교 때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구 대회에서 몇 번 대상도 탔었구요.' 출근하면서 태워줬던 명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에코처럼 웅웅 울렸다.
"뭐 정 없으면 새로,"
너무 잘 계셔서 탈이야. 파일을 정리해 우현에게 건넨 소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쉰 넘은 남자가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지 넌 모를거야."
우현이 파일을 들고 접무실을 나갔다. 문득 일억 오천에 피해보상까지 이억이면 되겠다던 성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억은 못 갚아도 구렁텅이에서 꺼내주는걸로 퉁치면 되겠지."
인생그래프꼭짓점
한참 영업준비중인 레디락의 문을 열고 들어선 명수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선웅을 찾았다. 반짝반짝 트윙클 티가 나는 명수의 자태에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의 눈에 하트가 뿅뿅 박혔다.그 중 홀을 관리하는 여직원이 수줍게 다가와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영업전인데…."
명수의 말에 대걸레와 손걸레를 손에 쥐고 옹기종기 모여 뒷 편에서 명수를 구경하던 여직원들이 수군거리며 호들갑을 떨기시작했다.
"아직 출근 안 한거면 여기 앉아서 기다려도 되죠?"
어머,고맙대,고맙대. 뒤돌아 선 여직원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여직원 무리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장실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 아까 그 여직원이 후다닥 커피를 타와 명수에게 건넨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들이키던 명수가 명찰에 써있는 '김차차'라는 이름을 읽고는 푸흡!하고 커피를 뿜었다.이름이 김차차? 차차?
"어머!"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뽑아 김차차의 소매에 튄 커피자국을 닦아주자 차차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뭐하냐, 둘이."
차차가 후다닥 사장실을 나가고 하품을 하며 선웅이 의자에 앉아 명수가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방금 나간 차차에 대해 물었다.
"이름이 김차차에요?"
가출하고 며칠동안은 선웅의 집에서 지냈었다. 말로는 어서 정신차리고 집에 들어가라며 꾸중을 했지만 내쫓거나 봉신 씨에게 일러바치진 않았다. 고마우신 분이다.
"첫날 먼지나게 털리고 이젠 괜찮아요."
피아노에 관심이 있던 성규를 봉신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학원에 보낸 아버지가 봉신 씨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가면서 사준 피아노가 있었다. 성규는 그 피아노를 무엇보다도 아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여기저기 돈이 밀려 어쩔 수없이 그나마 돈이 되는 피아노를 팔아치웠다. 피아노가 실려가던날, 성규는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엉엉 울었었다.
"그리고 우리 형 자존심 높은 건 에베레스트 뺨쳐서 아마 안할걸요? 암튼 저 오늘부터 뭐해요?"
넌 홀에 나가있는게 낫겠다. 선웅의 말에 명수가 '왜요'라고 되물었다.
"넌 비쥬얼이 되잖아. 홀에서 서빙하면서 단내를 흘려."
갯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처럼 사장실 문 앞에 붙어있던 여직원들이 명수가 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저 아까, 김…큼…. 김차차씨?"
지나치는 명수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 여직원들의 황홀한 눈빛이 찬란하게 아른아른거렸다.
한편, 통장에 모아놨던 돈들로 이곳 저곳에 서류를 잔뜩 집어넣은 성규가 한 손에 핸드폰을 꽉 쥔 채 어제 먹고 남은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봉신 씨도 출근하고 명수마저 출근했는데 집안의 가장이 이렇게 과자만 처먹고 있다. 아,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구…. 성규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띠리링~또로롱~띠리링~또로롱. 폴더 오픈음과 클로즈음이 시끄럽게 울려대다가 드디어 성규의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전화가 끊길세라 서둘러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네! 김성규입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성규가 과자를 한가득 집어 입안에 쑤셔넣었다. 어떻게 한 곳에서도 전화가 없을까. 이력서가 그렇게 형편이 없었나? 수상경력도 빠짐없이 넣고 입사용 자기소개서도 훌륭하게 썼는데…. 괜히 쓸데없이 돈만 버린 건 아닌가싶다. 그냥 봉신 씨 말대로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적어도 그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배고파."
근데 지금은 배고픈 게 먼저다. 다 먹은 과자 봉지를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넣고 부엌으로 가 커다란 양푼을 꺼냈다. 밥솥을 열어 밥을 푸고 냉장고를 열어 나물반찬과 고추장과 참기름을 양푼에 넣고 고추장이 뭉치지 않게 골고루 비볐다. 금새 고소한 냄새와 매콤한 냄새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한다.
"으흐으음. 너무 맛있어, 너무 맛있어."
호들갑을 떨며 양푼을 끌어안고 식탁에 앉은 성규가 얼마 안 되어 양푼을 깨끗하게 비웠다.
순재의 물음에 성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순재와 둘이서 외식을 하러 가는 게 설렜던지 성열이 계속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하얀 티셔츠에 붙은 검은 실밥을 떼어준 순재가 성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면허는 있지만 사고 이후로 조금만 손을 써도 손이 달달달 떨리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아본지도 3년이 지났다. 이젠 오히려 대중교통이 더 편한 편이다.
"일단 밥 먼저 먹구 영화 보러 가자. 그다음엔 쇼핑도 하고. 좋지?"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오랜 시간 성열을 봐왔던 순재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다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고 성열을 먼저 택시에 태우고 뒤따라 탄 순재가 목적지를 말했다.
"시내에 레디락으로 가주세요."
기사아저씨가 내비게이션에 투박한 손으로 레디락을 검색했다. 턱을 괴고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성열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떠오르는 명수의 얼굴에 눈을 몇 번 꿈벅거렸다. 며칠 전엔 꿈에서 나오더니, 이젠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서빙하는 애는 왜?"
명수가 기겁하며 붙잡힌 목덜미를 홱 쳐냈다.
"무슨 소리에요,형! 피아노는 뭐고 공연은 또 뭐에요?"
선웅이 턱 끝으로 휙 벨라를 가리켰다. 그러자 벨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저 째즈는 들어보지도 않았고 칠 줄도 몰라요. 제가 칠 줄 아는 건 그 존 레논에,"
또박또박 '오마이러브'으로 발음하려던 명수가 벨라의 찰지고 쫄깃한 발음에 한번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벨라와 비슷하게 발음했다.
"네. 존 레논의 오마럽이요."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거 예전에 쳐보던 거라 기억도 잘 안 난다구요."
벨라의 말에 명수가 한숨을 쉬며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한테 쳐주려고 성규한테 배운 건데…. 기억이 날까?
"하아…. 선웅이형이 저한테 베푼 은혜를 봐서 일단 한번 해볼게요."
명수가 앞치마를 풀러 선웅에게 건네고 의자를 끌어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검은 바지와 하얀 와이셔츠가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연상시켰다. 영업 중이라 크게 연습할 수가 없어서 우나 코르다를 고정시키고 조심스럽게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명수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명수의 손이 조심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었던 모습과는 달리, 꽤 안정적인 연주다. 벨라가 피아노 선율 위에 조그맣게 목소리를 얹었다. 2분 남짓한 연주가 끝나고 벨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꽤 하네?"
벨라가 여유롭게 물병을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혼자 남은 명수가 안절부절하며 난리를 부린다. 자기가 노래 부를 것도 아니면서 벨라처럼 목을 풀다가 다리를 달달 떨다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한다.
"준비 다 됐어?"
무대를 가리고 있던 천이 좌우로 걷히고 벨라가 무대에 올라감과 동시에 손님들이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침이 자꾸 바싹바싹 말라온다. 연주하다가 기절하는 건 아닌지 몰라. 마이크를 통해 벨라의 중후한 목소리가 레스토랑 안에 울렸다.
"안녕하세요, 째즈싱어 벨라입니다.
또다시 박수소리. 그놈의 박수 좀 그만 쳤으면 좋겠다. 박수에 맞춰서 심장이 퉁퉁 튕기잖아.
"노래를 하기 전에, 항상 피아노를 치던 친구 아시죠? 안경쓰고 빼빼 마른 멸치 같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친구가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서 급히 다른 친구를 구해봤어요. 박수 부탁해요."
하얀 조명이 명수를 신비한 존재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고 민망함에 명수가 살포시 웃자 어디선가 '잘생겼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벨라의 유들유들한 입담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레스토랑 문이 열리고 순재와 성열이 들어섰다.
"어? 지금 딱 공연시작인가봐! 잘 됐다. 어서 앉자."
무대에서 그리 멀지 않는 자리에 앉은 순재가 예전에 왔을 때 봤던 벨라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벨라가 싱긋 눈인사로 답했다.
"오늘은 특별하게 째즈가 아닌 팝을 불러보려고 해요. 존 레논의 oh my love이라는 곡인데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can see. 내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 내 눈은 알아볼 수 있어요."
벨라가 명수에게 시작해도 좋다는 눈빛을 보내자 곧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서빙을 하던 여직원들이 피아노 치는 명수의 모습에 다들 헤롱헤롱거렸다.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와 매력적인 벨라의 목소리에 순재와 성열도 한껏 노래에 취해 주문하는 것도 잊은 채 무대만 쳐다봤다. 무심코 피아노 쪽을 본 순재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성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성열아. 저기 피아노 치는 사람…. 옆집 명수 씨 아니니?"
순간, 명수와 성열의 시선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마주쳤다. 성열이 탄성을 내며 얼어붙었다. 조명을 받으며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명수의 진지한 모습에 이상하리만큼 거세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가슴안에 커다란 다람쥐 한 마리가 꺼내달라고 방방 뛰는 듯한 기분이다.
벨라의 무대가 끝나고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데 어찌나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던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뻔했다. 피아노 한 번 쳤을 뿐인데 사람들이 마치 연예인 보듯이 명수를 대했다. 누군가는 싸인을 요청했고 또 누군가는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달라며 팔짱을 걸어오기도 했다. 명수가 다시 앞치마를 걸치고 순재와 성열이 앉은 테이블에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순재의 칭찬에 명수가 민망한 듯 콧잔등을 매만지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근데 이상하게 성열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진다.
"저…. 주문…."
성열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파스타를 가리켰다.
"치킨 파스타 하나만 주세요."
주문한 메뉴를 체크한 명수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여기 되게 오랜만에 와본다, 그 치?"
냅킨을 뽑아 이마에 갖다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여기 그렇게 안 더운 것 같은데. 혹시 감기 기운 있나? 순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저었다.
"이상하네. 저번에도 그러더니. 정말 괜찮은 거야? 병원 안 가봐도 돼?"
성열이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자 순재가 당황을 하며 어물거렸다.
"……."
음식이 나오기 전, 순재가 허밍을 하며 메뉴판을 훑어보는 동안 성열은 서빙하는 명수의 모습을 눈과 머리에 담았다. 가슴안에 다람쥐가 또 슬슬 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표정 봐라. 누가 보면 내일 지구 멸망하는 줄 알겠다?"
신기하게 손이 기억하고 있더라고. 명수가 손가락을 꾸물꾸물 거리며 입으로 oh my love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핸드폰이 흥건해질 정도로 손에 쥐고 있던 성규가 시계 시침이 오후 9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손에서 핸드폰을 놨다.
"…명수야."
나 공장 들어갈까 봐. 성규의 말에 마스크 팩을 붙이려던 봉신 씨가 정말이냐며 되물었다.
"응…."
막상 또 대학까지 나온 자신의 큰아들이 공장에 들어간다니 봉신 씨의 마음이 착잡해진다.
"휴우…. 취직 그렇게 안 돼?"
분위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TV속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만 거실을 메웠다. TV를 틀어놓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TV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동상이몽. 모두 거실에 앉아있지만, 머릿속으로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성규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왜 옆집 또라이까지 난리지.
"무슨 일이신데요."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신은 성규가 쿵쿵 소리를 내며 대문을 열었다. 우현은 퇴근하고 바로 온 건지 아직 정장차림이다.
"눈빛이 왜 그래요? 내일 지구가 멸망이라도 한답니까?"
명수가 했던 말이다. 이것들이 지금 짜고서 날 놀리는 건가?
"용건만 말하고 가요. 나 지금 상태 안 좋아요."
대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히 내놓던 성규가 씩씩거리며 대문을 쾅 닫고 나왔다.
"취직 못 했어요. 어느 곳에서도 안 찾아줍디다!"
성규의 어깨너머로 집을 훑어본 우현이 집에 불났어요?하고 되묻자 더는 참지 못한 성규가 버럭 소리쳤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누구 염장 지르러 왔어요?!"
성규의 말을 끊은 우현이 A4용지 한 장을 성규에게 건넸다.
"어쩌라구요. 백화점 찌라시에요?"
성규의 손목을 붙든 우현이 억지로 성규의 손에 종이를 쥐여준다.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받아든 성규가 신경질적으로 우현을 째려본 후 손에 들린 종이를 홱 눈앞에 가져다댔다. 밤이라서 그런지 가로등 불빛만으로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쓰죠."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우현이 종이에 대고 플래쉬를 켜자, 용케 불빛을 감지한 벌레와 나방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손을 휘저으며 내용을 읽던 성규가 놀람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이게 뭐에요?"
기어들어가는 성규의 목소리에 우현이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려요."
그러더니 쿨하게 뒤돌아 먼저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아니 누가 면접 본댔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독을 하는데. 저 또라이시키. 아오, 열불나."
갖은 욕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선 성규가 클립으로 같이 꽂혀있는 우현의 명함을 홱 뽑았다. 마치 우현의 얼굴이라도 그려져 있는 것처럼 한껏 노려보더니 꼬깃꼬깃 접어 마당에 내팽개치고 발로 콱콱 밟았다.
"뭘 정독하라는 거야."
집안 불빛에 비추어 종이를 꼼꼼히 읽던 성규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잠시 멍해졌다. '서율대도 상관없습니다.'
"뭐야,이거…."
나한테 장난친 건가? 아니지. 이렇게 인쇄에 명함까지 꽂아놓고 장난할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좀 싸이코같긴 해도.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다시 마당으로 가 발로 밟아놓았던 명함을 다시 주워서 판판하게 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다들 잘 분위기 인건지 봉신 씨의 방은 굳게 닫혀있었고 TV도 꺼져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던 명수가 성규를 한번 보더니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진짜 큰고모부 공장에 들어갈 생각이야?"
책상위에 우현에게 받은 종이와 너덜너덜해진 명함을 얹어놓은 성규가 침대에 누워 잠시 고민을 했다. 면접보나 안 보나 나한테 손해는 없을텐데. '서율대도 상관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한참 뒤척거리던 성규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어차피 공장들어가기로 한 거, 떨어지면 맘 편히 공장가고! 붙을리는 없겠지만 붙으면 당당하게 다니면 되는거야. 입술을 앙 다물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한 명만 뽑는다니…. 경쟁률 장난아니겠는데.
"…너 어디 맞선 보러 가니?"
그러게. 무슨 면접이 아침 10시부터인지 모르겠네. 얼굴에 붓기도 안 빠졌는데.
"10시에…. 아니 그냥 잠깐 누구 만나러. 김명수! 나 머리 좀 만져줘."
면접보러간다고 말하면 봉신 씨가 또 쓸데없이 기대할까싶어 봉신 씨에겐 말하지않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앞에 앉아 능숙하게 왁스를 가져온 명수가 손에 왁스를 바르고 성규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면접보러가는거지?"
어젯밤에 챙겨놓았던 이력서와 수상경력서류를 서류가방에 넣은 성규가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집에서 나오자마자 우현의 하얀 벤츠와 마주쳤다. 운전석 창문이 지이잉 내려가고 꼴도 보기 싫은 우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결국 보러갈꺼면서."
우현의 벤츠가 미련없이 성규를 지나쳐 멀어져갔다. 그렇다고 진짜가네. 가다가 펑크나 나라. 성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정류장으로 향했다. 면접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지나친 기대는 쓰고 떫은 실망을 안기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축 처졌던 마음에 날개가 뿅뿅 솟았다.
물뿌리개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 성열이 여리꽃밭 앞에 앉아 조금씩 물을 뿌려주었다. 흙이 촉촉히 젖을 정도로만 물을 뿌려주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옆집 대문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열이 슬쩍 고개를 대문 쪽으로 돌리자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레디락으로 출근하는 명수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 봤을 뿐인데도 성열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물뿌리개가 기우뚱하며 성열의 신발을 흠뻑 적셨다.
*
시내에 위치한 볼네드 백화점은 버스를 두 번만 갈아타면 도착이지만 본사를 가려니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탔는지모른다. 지하철역에서 내리자 바로 보이는 볼네드 백화점 본사의 높은 층수에 성규가 입을 떡 벌렸다.
"사람처럼 일년에 몇 미터씩 자라는거아냐? 저러다 화성 찍겠네."
근데 진짜 면접이 있긴 한건가? 정장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본사로 들어가긴 했지만 다들 목에 사원증을 하나씩 걸고 있었다. 혹시 늦은건가싶어 서류가방을 고쳐잡은 성규가 후다닥 본사로 뛰어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실내 모습에 속으로 연신 감탄을 하며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금처럼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의 모습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어제 우현이 준 용지에 적혀있던 7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구석에 섰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타고 내릴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엘리트적인 느낌과 세련된 모습에 성규는 괜히 숨을 흐읍!하고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추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온 성규가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했다.
"저…면접실이 어디죠?"
아니 그건 그렇고 내 이름은 어떻게…. 더 묻기전 성규의 말을 끊은 여직원이 성규를 아무도 없는 대기실로 안내했다.
"……."
왜 아무도 없는거지? 쭈뼛거리며 대기실에 들어선 성규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구석에 놓인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뭐야. 무섭게시리 왜 아무도 없어."
대기실에 걸린 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야할 대기실에 혼자 앉아있자니 괜히 오슬오슬 소름이 돋아왔다. 서류가방을 끌어안고 9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는데 9시가 채 되기도 전에 방금 나갔던 여직원이 다시 들어오더니 면접실로 들어오란다. 이번 역시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나가려던 여직원을 성규가 불러세웠다.
"저,저기! 죄송한데요."
여직원이 또 다시 성규의 말을 끊는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면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게 왠 일? 넓직한 면접실에 50대로 보이는 여자 면접관 한 명이 전부다. 면접관 앞에 놓여진 의자 앞에 서있자 면접관이 앉으라는 제스쳐를 해보였다. 면접관이 여자든 남자든, 늙든 젊든 일단 자신감이 생명이다. 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니깐!
면접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완벽했고, 면접관이 부드럽게 대해줘서 긴장도 금방 풀려 또박또박 자신감있게 할말 다 하고 나온 것 같아 후련하기까지 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면접실에서 나온 성규가 회사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빨리 달달한 걸 입안에 가득 넣고 싶다.
"아이스 라떼 한 잔 주세요. 시럽 마구마구 넣어주시구요."
성규가 계산대에 지갑을 꺼내놓고 스탬프 카드를 하나 집어 지갑사이에 끼워넣으려다가 멈칫한다. 내가 이걸 왜 넣지. 여기 또 올 일도 없으면서. 그래도 혹시 몰라 지갑사이에 잘 끼워넣고 도로 가방에 넣었다. 계산대에 턱을 괴고 메뉴판에 적힌 커피 종류들을 하나씩 세보는데 옆에서 익숙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빼고 주세요."
아,참. 이 남자 여기 다닌댔지. 난 이 남자 추천으로 여길 온거고.
"네, 뭐.그럭저럭."
빨대를 잘근잘끈 씹으며 라떼를 들이키던 성규가 무슨 소리냐며 띠꺼운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받은 기억없는데요?"
아까부터 커피를 건네고 있었던 여직원을 가리킨 성규가 성큼성큼 커피숍을 나오려는데 우현이 다시 성규를 불렀다.
"뭐요."
우현이 비웃자 기분이 확 나빠진 성규가 욕을 중얼거리며 커피숍을 나왔다.
"지깟게 부장이면 부장이지, 무슨 사장이라도 돼? 지가 뭔데 날 붙여주기라도 한대? 지가 뭐, 무슨 접착제야? 딱풀이야? 밥풀이야?!"
인상을 팍 쓰자 팔(八)자 눈썹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혼잣말로 연신 욕을 해대며 지나가는 성규를 한 남학생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성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뭘 꼬라! 디질라고!"
코끼리 발걸음처럼 쿵쿵거리며 멀어지는 성규를 남학생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쳐다봤다.
집안이 잠잠하다. 다들 출근을 한 터라 지이잉-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틱틱틱 시계 초침 소리만 조용히 들려온다. 서류가방을 문앞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부엌 식탁으로 가 보릿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정장을 벗어 케이스에 넣어놓고 얼른 샤워를 마쳤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터는데 아까 우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머리 안 세우는게 나을 것 같네요. 사나워보이니깐'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우현을 흉내낸 성규가 수건으로 거울을 퍽 쳤다.
"넌 밥맛도 아니야,짜샤. 밥이 아까워,밥이."
스킨과 로션을 착착착 두드려 바르고 마당으로 나온 성규가 꽃밭으로 향했다.
"에효. 느그들은 어째 맨날 활짝핀 봄이니?"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린 성규가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네들처럼 내 인생도 활짝 펴야할텐데 봉우리 상태로 썩어가고만 있네.
"그래도 다행이다. 너네들이라도 피어있어서."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당 한 구석에 세워놓았던 훌라우프를 집어들었다.
"살빼야돼,살."
오늘 먹은 카라멜 마끼야또가 198kcal인데다가 시럽을 4번이나 펌핑했으니 봉신 씨와 명수가 퇴근하기전까지는 계속 돌려야될 것 같다.
순재가 뿔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소설책을 읽다가 불현듯 너무 조용한 집안분위기에 조금은 큰 목소리로 성열을 불렀다.
"성열아, 뭐해?"
방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다. 소설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열의 방으로 다가가 두어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하얗고 넓직한 방안에 성열은 없었다. 보통때라면 침대에 앉아 큐브를 맞추거나 아니면 순재처럼 책을 읽고 있어야하는데. 방문을 닫고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방과 우현의 방,그리고 다용도실까지 모든 방의 문을 열어봐도 성열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가는 모습 못 봤었는데. 도대체 얘가 어딜 간거지.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순재가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첫 발을 계단에 올리는 순간, 다락방 문 너머로 '띵'하고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려왔다. 순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곧 몇 초 안되는 멜로디가 연주되더니 이내 건반 뚜껑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 순재가 표정을 숨기고 다락방 문을 열었다. 다락방에 하나뿐인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뽀얗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빛을 맞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성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처럼 가볍고 약해보였다.
"배 안고파? 누나가 떡볶이해줄게. 얼른 내려와."
성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의자를 밀어놓고 다락방을 내려갔다. 성열이 나간 뒤 다락방 문을 닫고 나가려던 순재가 하얀 피아노를 한번 돌아봤다. 마치 자기 자신이 그 곳에 서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가슴이 답답해져 얼른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우현이 건넨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소영이 성규의 이력서와 수상서류들을 뒤적거렸다.
"1985년생 김성규. 스물여덟치고는 앳된 얼굴이네. 포토샵했나? 사진이랑 다르던데. 아무튼 두 형제중의 장남.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
그 조그마한 눈이 반짝거려봤자 얼마나 반짝거린다고.
"요즘 사람들같지않게 생동감넘치고 묘한 기를 풍기는 사람이야. 대학만 서율대일 뿐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견줄만 하겠어. 넌 어때?" 우현이 성규의 이력서와 서류들을 챙겨 접무실을 나왔다. 기획부실로 향하며 성규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생각외로 훌륭한 이력서다.
"큰 고모부한테는 좀 기다려보라고 얘기해놨어,일단은."
저녁 식사하던 봉신 씨의 갑작스런 말에 명수와 성규가 봉신씨를 쳐다봤다. 공장으로 처넣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을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갑자기 유들유들해진 봉신 씨의 말투에 명수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물었다.
"무슨 일있어?"
봉신 씨의 말에 감동을 먹은 성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코를 훌쩍인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때쯤, 거실 바닥에 놓여있던 성규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식탁에서 일어나 수저를 든채 거실 바닥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끊기기바로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아는지, 우현이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성규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어요? 짜증나게."
컵을 들고 달려온 봉신 씨가 전화기에 귀를 가져다대려고 하자, 팔로 봉신 씨를 밀어낸 성규가 처음으로 우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획부실은 4층입니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지각하는거 혐오하니깐 시간 맞춰오세요.]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긴다. 얼떨떨한 표정의 성규에게 봉신 씨가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출근이라니? 뭐야뭐야 얼른 말해봐!"
얼떨떨한 표정에서 점점 기쁜 표정, 그리고 곧 울듯한 표정이 된 성규가 우아악!소리를 지르며 봉신 씨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볼네드 백화점 취직됐대! 내일부터 출근하래!"
서로 손을 붙잡은채 왔다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난리도 아니다. 그러다 갑자기 성규가 코를 훌쩍이더니 눈물방울이 그렁그렁맺힌다.
"흐어엉. 이제 백수아니야."
봉신 씨와 명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성규를 보았다. 드디어 내 인생의 꽃 봉우리도 슬슬 만개할 준비를 하는 구나.
"머리 만져줄게."
명수가 왁스통 뚜껑을 닫고 서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정장 마이를 걸치고 길쭉한 넥타이까지 능숙하게 맨 성규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며 윙크를 날렸다.
"김성규 출동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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