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에 中
w.꼬밍
소녀는 기억하고 있다. 17세 때 보았던 작은 별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 ○○아. "
○○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 날 반짝였던 그 작은 별이었다. ○○은 이 사람이 자신의 눈 앞에 있음을 알고있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애꿎은 커피만 잔잔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만큼이나 온 몸이 식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 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 날의 별이었음을. 그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그 작은 희망의 빛이라는 것을. 확실한 것은 지금도 그는 '작은 별'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 보고있었다. 눈 앞의 남자에게서, 그 날의 빛을. 아직도 저를 향해 다정히 웃어주는 그 속의 빛을.
" 혹시 내가 많이 불편해? "
" 네? 아니요, 불편은요. "
○○은 솔직히 말하면 반가웠다. 기분도 꽤 좋아졌었다. 그런데 자꾸 어느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저를 찌르는 기분이 드는게 걸렸을 뿐이다. 차가운 철금속이 쇄그랑쇄그랑 아픈 소리를 내며 제 마음을 뒤져보는 것 같았다. 그 서늘한 느낌이 조금, 기분 나빴을 뿐이었다. ○○은 생각했다. 이 소름끼치는 기분이, 가슴에 자꾸 무언가가 걸리는 이 감정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죄책감이라는 것을.
만약 그 때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 어느 정도로 컸을까. 그 아이가 내 품에 있었을 것이고, 잘하면 눈 앞의 이 사람의 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고 있는 그날의 빛, 변백현.
" 난, "
백현이 ○○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주친 두 눈이 어색하지 않았고, 어쩐지 부드럽게 풀려있는 기분이었다. ○○도 알고있었다. 백현 앞에서 한 없이 풀어지고, 연해지는 제 모습을. 아픈 마음이 공존해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눈 앞에 있었다. 어찌 반갑지 않고,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 네가 보고싶었는데. "
" 아, "
" 그래서 온거야, ○○아. 내가 좀 늦었지. "
" 아니에요, 오빠. 잘, 왔어요. "
백현은 휴학했다. 원래는 외국의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결심하고 좋은 곳에 간 사람에게 굳이 연락해서 곤란한 일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연락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은 가난한 동네보다 더 가난한 동네를 찾아서 집을 계속 옮겼다. 그녀에게 특별한 주소도 없었고, 그녀에게 연락할 번호도 없었다. 그래서 ○○은 백현에게 줄 연락처 하나 없었다.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의 백현은 ○○에게 말했었다.
- ○○아, 잘 지내고 있어. 널 만나러 올게, 꼭.
백현이 떠나고 난 뒤에야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이 알게됐다. 저를 만나러 온다는 백현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아이라며 데리고 온 그 아기의 존재를, 또 자신을, 백현은 반겨줬을까. 무엇보다도 ○○은 그런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키워왔던 것 같다. 백현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이 먼저 끝나있을지도 모른다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언젠가는 금방 죽고 싶어지고, 쉽게 죽어있을지도 모른다고.
" 밥 먹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래도 밥을 사줬어야 했는데. "
" 전 이게 좋은걸요. "
" 너 다음 아르바이트 시간 때문에…. ○○아, 아직도 연락할 방법이 없는거야? "
백현은 ○○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안다. 집 안이 망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다 알고있다. 그녀와 연락을 할 수 없는 이유도, 그래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S 고등학교에 직접가서 ○○을 찾으려고 했다. 그녀가 있을만한 곳이 17세의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전에 카페에서 극적으로 마주친 것이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을 보고 백현은 사실 다 깨달았던 것이다. 학교 대신에 돈 버는 걸 택했구나, 네 사정이 조금도 좋아지질 않았겠구나.
" …아마도요. "
○○이 가볍게 웃었다. 웃음이지만, 기쁜 빛은 없었다. 어떻게보면 익숙함과 체념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은 여전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휴대폰도 없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학교도 연락처나 주소를 제대로 알지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은 자신이 살고있는 그 가난한 동네를 백현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가난한 동네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됐다. 그 전에 백현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된 가로등 하나 보기 힘든, 그 좁고 작은 험한 동네. 하늘 가까이에 있지만, 절대로 그 예쁜 하늘에는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가끔 보이는 큰 달, 높고도 먼 가을 하늘, 분홍, 주황 잔뜩 머금은 하늘이나 구름 따위가 있는 그 동네. ○○은 그 가난한 동네를 떠올리면서, 어쩐지 자꾸 다른 쪽으로 생각이 새버렸다. 그 어둡고 좁은 골목에 늘 기다리고 있던 그림자 하나. 늘 같은 교복 차림으로 저를 지켜보던 사람. 커다란 눈, 마주친 시선. 그리고 별 하나 없는 그 곳에서 입 맞췄던 그 날 밤 같은 것들이. 한 순간, 별똥별 만큼이나 빛났던 도경수를 ○○은 자꾸만 기억하고 있었다.
백현에게 저가 살고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이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했다.
" 그래도, "
멍하게 생각에 빠져있던 ○○이 백현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 카페 안에서 마주친 시선도 따스했다. 백현의 웃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좋았다.
" 이제 그 시간대에, 그 카페로 가면 널 만날 수 있겠네. "
환한 백현의 웃음이 ○○의 마음에 들어왔다. ○○역시 웃었다, 환하게. 네. 밝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만나 느꼈던 죄책감은 잠시만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슬퍼만 하기에, 아파만 하기에 백현은 여전했고, 두 사람의 만남은 아름다웠으므로.
*
두 가정 사이에 교류가 많았던, 몇년 전의 어느 날들은 참 행복했었던 것 같다. 성적과 학원, 친구관계 같은 것들이 사소하게, 가끔 삶에 개입해줬을 뿐 큰 문제가 없던 시간이었다.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과 놀았던 순간들로 그 인생이 수 놓아졌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흔하지 않지만, 생각보다 흔한 그 이야기가 경수에게도 찾아왔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부터 잘 지냈던 사이였고, 서로 알 것 모를 것 다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던 것 같다. 정말 가족같이 잘 지냈던 ○○이, 그런 감정 이상으로 자신과 잘 맞았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이 예뻐보였고, 저에게 말을 거는 행동, 장난치는 것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던 그 입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귀와 눈이 예뻤다. 챙기는 마음 하나하나가, 꽃 잎 하나하나에 향기가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경수가 ○○○을 좋아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고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소중히 그녀를 보면서, 제 마음을 지켜나갔던 것들이. 그래서 ○○의 집이 망해서, 많은 가난한 동네를 옮겨다니기 시작해도 걱정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듬고 잘 지낼 수 있었다. 경수의 마음은 크고 소중한 것이었고, 순수하고 여렸다.
그런 경수에게 ○○이 말했던 것이다. 그 때쯤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안했던 ○○이 경수 앞에와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아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머릿 속이 혼돈으로 가득찬 더 어린 날의 경수에게 ○○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아이를 낳고싶다고. 상황이 힘들어서 안되는 걸 알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아이를, 그러니까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싶다고. 그러면서 울고있는 약한 소녀를 경수는 힘없이 토닥거렸던 것이다. 혼란이었던 머릿 속이 하얗게 차분해지는 것을 경수는 느꼈다. 최대한 냉정을 찾고, ○○을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어깨를 떨고있는 것 같았던 ○○을 가난한 동네까지 데려다주었다. 소년의 어리고 약한 마음의 한계가 그 쯤이었다.
그래서 그 날 ○○에게 말했던 것이다. 더러워. 그리고 고쳐지지 않았다 그 마음은. 사실은 경수도 알고있었다. 좋아했던 마음 때문에 ○○을 미워하게 된 것이라고. 좋아하니까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고. 경수는 이제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소년은 아직도 그 마음 깊숙이 소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 다녀왔어? "
수시에 합격해도 학교에는 나와야지, 선생님들의 말은 무시했다. 경수는 일찍 학교를 무단 조퇴하고 가난한 동네의 골목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의 시선이 경수에게 멈춰섰다. ○○은 천천히 걸음을 집 앞 쪽으로 옮기고, 우선 그 앞에 섰다. 어젯밤의 입맞춤이 두 사람 모두에게 지금 떠오르고 있었지만, 애써 둘 다 모른척했다. 그나저나, 진짜 또 왔네 도경수. ○○은 앉아서 저를 올려다보는 경수를 본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 날의 고백을. 별똥별처럼 빛낯던 도경수의 존재를. 하지만, 또 애써 부정했다. 모든 것은 신경안정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어제 편히 잠든 이유를, 어제의 기억들을 ○○은 그 알약 몇 알에 담아버렸다.
" 경수야. "
" 어. "
" …그 사람이 왔어. "
" 누구? "
" 변백현. "
경수의 미간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찌푸려졌다. ○○의 태도는 담담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조금은 의아했다. 사실 도경수가 변했다고 느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개인사를 털어놓거나, 힘든 일을 털어놓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도경수가 말 해보라고 재촉한다고 해도,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은 백현이 돌아왔음을 경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알리고 있었다. 백현에 얽혀있는 2년전의 악몽들을 두 사람 모두 기억하고 있음에도. 어젯밤의 일은 갑작스레 모든 것을 예전으로 돌려놓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말했어? "
경수의 질문에 ○○이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니, 말 못했어.
" 그 사람이 뭐래. "
" 보고싶었데, 내가. "
하, 경수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어냈다. 두 사람의 눈이 좁은 골목, 그 어둠 속에서 마주했다. 경수가 슬쩍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 나돈데. "
" 뭐? "
" 나도, 너 보고싶어서 왔는데. "
그리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경수가 골목을 떠났다. 평소보다 더 짧게 머무른 느낌이었다. 어둠은 불안하다. 가까이,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있는 두 남녀의 눈빛을 멀게 느껴지게 만들어버린다. 두 사람의 눈은 언제나 가까이에서 마주치는데, 어둠은 이를 충분히 어긋나게 만들었다. ○○은 경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보고싶어서 왔어. 도경수의 그 단호한 목소리와 얼굴 표정이 가슴에 남았다. 잔상으로 골목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도경수는 여전히 여렸다. ○○의 말 속에서 백현에 대한 '호(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소년은 소녀의 이야기에서, 둘 사이에 있던 어둠보다 불안한 감정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한 것이었다. 내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욕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저만의 소중한 감정, 조심스러운 대처였다.
○○은 집 안에 들어가서 신경안정제를 입에 밀어넣었다. 전 날보다 먹은 양이 반이 줄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과 몸 한 구석이 금방 풀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은 기억해냈다. 자신이 오늘 담배 하나도 피지않았다는 사실을. 약이 몸에 흡수가 되기도 전에 가벼운 피로와 적당한 잠이 자신을 찾아왔음을.
*
학교를 인생에서 지웠다. 어쩐지 굳이 학교에 갈 이유가 없어진 것 같았다. ○○은 그 동안 왜 자신이 몇 번은 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했다. 악몽이 찾아온 이후에는 선생님도 그녀를 더 이상 감싸주지 않았다. 몇번은 학교에 오라고, 그녀를 찾으러 다녔었지만 그 때마다 ○○은 그 기대에 실망으로 답했다. 그런데, 내가 왜 학교에 갔었지. 엄마의 강요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엄마를 찾아왔던 도경수 때문이었다. 저를 향해, '학교 안 와?' 묻곤했던 도경수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경수는 말했다. 이제 자신을 계속 보러올 것이라고. 도경수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이제는 ○○을 만나러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왜 이제 학교에 나가려고 하지 않지?
" 어디 가니? "
신발을 신고있던 ○○에게 그녀의 엄마가 물었다.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엄마의 목소리는 깊은 수심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침울한 느낌에 ○○이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돈 벌고올게요. ○○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뒤 따라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그녀는 ○○에게 또 말했다. 학교에 가.
" 다녀올게요. "
" ○○아. "
학교에 지금 가서 배울 것도 없다. 도경수 같은 수시합격자들이 나오고 있을 것이고, 모두가 수능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집중하고 있을 시기였다. 심지어 자신은 수능원서도 접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엄마는 학교에 가라고 말했다. 요 근래, 그런 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학교에 가렴. 그 때마다 그녀의 엄마는 또 덧붙이곤 했다. 오늘처럼.
네 삶을 위해서 가렴. 이제는, 네 인생을 살아.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뭔가,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 안에 있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자신을, 그 집을 짓누르고 있는지 ○○은 몰랐다. 그 날 이후 집이 밝았던 날이 언제 있었던가. ○○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을 살기 위해서, 이 하루를 살기위해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카페에서 일하다, 저를 만나러 온 백현을 보고 반갑게 웃음지었다. 백현의 웃음을 보고,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아, 오늘 신경안정제 안 들고왔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상하다고 ○○은 느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고, 발을 내 딛을때 마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가을이라고 한 들, 그 서늘한 기운이 자꾸 저만 파고드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은 집 앞에와서, 그 날도 와있던 경수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도경수에게 시선이 더 갔을텐데, 자꾸만 시선이 집 문 앞으로 떨어졌다. 경수가, ○○의 이름을 자꾸 부르는데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듣지못한 사람처럼 멍하게 서있다가, 뜬금없이 경수를 불렀다. …경수야. 경수가 ○○을 지켜보고 있었다.
" 가지말고, 잠시만, 잠시만 있어줘. "
언제나 불안한 기운은 사람의 착각이지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수 많은 착각을 하면서 산다고 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걱정거리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꼭 이럴 때만은 냉정하게도 그런 직감이 어긋나지 못한다. 집안은 언제나 깜깜했는데, 오늘은 그 기운이 전과는 달랐다. 소녀는 사실은 다 알아차렸는데도, 부정하듯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흐트러져있는 그녀의 엄마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알고있었다. 오늘 자신의 숨을 조여왔던 그 무거운 공기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지금 이 집 안을 지배하고 있는 서늘한 느낌이 무엇 때문인지. 그녀가 며칠전 샀던 신경안정제 통이 창틈으로 새어들어온 빛 아래 형편없이 굴려다니고 있었다. 안은, 누가봐도 비어있었다.
신은 참 무정하다 생각했었다. 불행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살고자하는 의지는 불태워주었다고.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살고자하는 마음이 악착같이 있던 제 자신이 우스웠고 안타까웠다. 아마, 하늘은 그런 소녀의 불만을 들었던 것 같다. ○○은 그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아, 죽고싶다. 소녀의 마음에서 살고자하는 의지가 불타 사라졌다.
*
신경안정제 과다복용. 누가봐도 '자살'이라고 적혀있는 이 이유로 어째서 생명보험금이 나왔는지 ○○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찾아오는 편지 한 통 없었는데, 자신도 제 집 주소를 모르고 있었는데. 엄마가 언제 생명보험에 가입하고, 그걸 아직까지도 유지시키고 있었는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삶은 언제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외의 현상들이 존재했다. 이번도 역시 그런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은 멍하게 앉아, 엄마의 영정 사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집을 떠난 아버지가 소식을 어찌 듣고 찾아온다던가, 같은. 하지만 기대하지도 못할 만큼의 사람이 오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삶은 가난한 동네의, 어두운 구석에서, 홀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그 가는 길 만큼은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은 텅 빈 장례식장을 둘러보며, 어쩐지 이 곳이 제 장례식장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앞서자, 곧바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엄마의 장례식장이야, 아니면 내 장례식이야. 멍한 눈동자 안에서 텍스트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때, 카오스 상태의 ○○의 머릿속을 한 문장이 파고들었다.
- 학교에 가.
○○은 알았다. 지금 제 삶은 결국 이런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가난에 헐떡이다가, 언젠가는 이런 이유로 죽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담긴 사진이 저 가운데 어디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학교에 나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엄마가 늘 했던 말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곳은 곧 미래의 제 장례식의 예견이다. ○○은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앉아있던 ○○의 눈에서 갑자기 뚝-뚜뚝-뚝,후투툭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그녀는 그런 소리를 내뱉았다. 그녀 스스로도 왜 울고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울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입에서 '끅끅'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은 소리쳤다. 아,아아,아! 그리고 곧 그녀의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스스로 울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면서도, ○○은 왜 자신이 이러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엄마의 말들이 자꾸만 생각났을 뿐이다. 학교에 가야한다. 네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학교에 가서 네 인생을 살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 ○○은 자신의 행동을 단순한 '울음'이 아닌 '오열'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정의는 곧 '탈진'이라는 단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됐다.
주위에 있던 경수가 놀라 ○○을 붙잡았다. 때마침 찾아온 백현도 ○○을 잡았다. 두 사람은 ○○에 정신이 팔려서, 어떤 사람이 자신과 함께 같은 여자를 부축하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장례식장이 있던 바로 그 병원에 그들은 ○○을 데려다주었다. 하얀색 시트에 흐트러지듯 누워있는 ○○을 내려다보다가,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경수는 백현을 보고 멈칫했고, 백현은 경수를 발견하고 '어?' 소리를 내뱉었다.
*
경수와 백현은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얼굴과 이름, 학교 정도만을 아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였다. 경수는 백현을 '그 놈'으로 기억했고, 백현은 경수를 '○○과 친한 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으로 이어진 인간관계였다. 마치 두 사람이 ○○의 엄마 장례식장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듯이. 그 둘은 ○○의 존재를 통해 서로를 알았다.
장례식장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우선 말없이 각자의 하늘을 감상했다. 가을 하늘은 높고 맑았고, 예뻤다. 두 사람은 -서로는 전혀 몰랐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요 근래 가장 예쁜 하늘이네. 맑은 하늘의 크기 만큼이나 착잡해진 경수는, 결국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던 담배를 꺼내물었다. 하늘을 보던 백현이 그런 경수를 발견하고, 슬쩍 웃음지었다. 너, 담배도 피네. 경수는 연기를 들이마셨다 다시 내뱉으며 말했다. 펴야만 할 것 같은 날이잖아요. 백현 쪽은 쳐다보지않고,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덧붙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 저렇게 하늘이 예쁘기엔, 너무 슬픈 날이니까. "
그래, 그렇네. 백현도 따라 중얼거리며 하늘을 다시 봤다. 설마 이런일로 ○○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고 들었다. 그리고 ○○은 외동이다. 그런데 어머니 마저 저렇게…. 백현은 경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이 집, 어딘지 알지? "
그때야 경수의 시선이 백현에게로 돌아섰다. 백현은 경수와 ○○의 관계를, 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을 처음 봤을 때, 경수가 그 옆에 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지나가다 몇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을 뿐. 백현이 ○○을 알아가고 있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도경수'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는 걸 알았다. 경수가 누구야? 물었을 때, ○○은 웃으면서 친구에요, 친구. 소꿉친구, 어렸을 때부터 엄청 친하게 지냈어요. ○○이 아무렇지도 않게 환하게 웃었기 때문에, 백현은 한 번도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멀어졌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장례식장에 또 찾아온 경수를 보니, 아직도 두 사람은 친한 사이일 것이고, 경수라면 ○○의 집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 네. "
경수가 짧게 대답하고는, 담배를 콘크리트 벽에 문질러 껐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그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선명하게 세워서는 백현을 봤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느끼기 어려웠지만, 경수의 대답에는 많은 무게가 실려있었다. 그건 수 많은 걱정들, 언짢음, 안타까움, 아쉬움, 서운함, 미움 등등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감정이었다. 경수가 백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요?
" 걱정되니까, 이렇게라도 알아둬야지. "
" …형. "
" 어? "
" 형은 왜 그렇게 ○○○에 대해서 알고싶어해요? "
경수의 표정은 무뚝뚝한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백현은 이때야 조금 알았다. 경수의 말에서 어떤 무게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백현이 경수의 감정까지 읽어낸 것은 아니었다. 백현이 경수를 보면서 슬쩍 웃었다. 그리고 불렀다. 경수야.
" ○○이가 내 얘기, 너한테 안 해? 둘이 많이 친하잖아. "
" 들을 때도 있죠. "
" 그럼, 너도 알거 아니야. ○○이도 사실은 알테니까. "
" 그러니까, 뭘요. "
" 내가 ○○이 많이 좋아하는거. "
" ……. "
" 좋아하니까 걱정되고, 생각나고, 찾아오고, 위로하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 거 …당연한 일이잖아. "
경수는 멍해졌다. 당연한 일, 당연한 일이라고. 경수는 2년동안의 제 삶을 되돌아봤다. 백현이 당연하다고 말한 일들을, 자신은 어떻게 하고 있었던걸까. 경수도 알고있었다. 17세 이후에는 부정해보려고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경수는 ○○을 좋아했고, 좋아하며, 앞으로도 -지금 제 생각으로는-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백현도 말한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고. 변백현과 도경수의 감정이, 정확하게는 한 소녀에게 닿는 감정이 똑같은 것이다. 위로하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 거, …그러니까 ○○○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경수는 어땠던가. 소년과 소녀의 관계는 어떠했던가. 둘 사이에 행복이라는 것이 있었나, 웃음이라는 것이 있었나, 위로라는 것이 있었을까. 나에게 넌 좋아하는 사람인데, 너에게 난 어떤 존재였을까. 그 2년의 시간동안.
경수는 아까 쓰러졌던 ○○의 모습을 기억했다. 울음을 터뜨리고, 소리를 내면서 꺽꺽 모든 것을 토해냈다. 눈에 초점은 없는데, 그 속은 굉장히 공허한데 ○○은 자꾸만 모든 것을 끌어내 내뱉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경수는 어떤 당황스러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숨이 턱 막히고, 가슴 속에 무슨 응어리가 진 것마냥 딱딱하게 걸리는 것이 생겼다. ○○도, 그러니까 소녀도 사실은 이럴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걸 도경수는 이제야 알았던 것이다. 소녀는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정도로 약한 존재였다. 저렇게나 아프게 울 수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경수는 그동안 제가 ○○에게 던져주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건 …죄책감이구나.
" 그래서 잤어요? "
" …뭐? "
" 그래서 형이 걔를 안은거냐구요. "
백현이 순간 우물쭈물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못했다. 어째서 경수가 저런 것까지 알고있는 것인지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저런 이야기까지 경수에게 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현의 그 움찔거리는 입술사이로, 그걸 어떻게, 라는 말까지 당황에 녹아 나왔다. 경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일단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런것따위가 아니었으므로.
" …형이 알아야 될 일이 있어요. "
경수는 낙태를 하고 난 뒤에 죄책감에 휘말려있는 ○○을 지켜봤었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묵직한 것이었구나. 죄책감을 가진 소녀를 위로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소년. 경수는 ○○의 죄책감을 방치해둔 죄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알게되었다. 그리고 백현에게 말하기로 한 것이다. 소녀가 가지고 있을 죄책감에 대해서. ○○이 그동안 가지고 살아야했던 그 무겁고 아픈 감정에 대해서. 도경수는 절대로 이 이야기를 백현에게 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날 이후의 경수는 ○○을 미워했던 것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백현을 미워하고 원망했으므로. 이는 단순한 감정원리로는 질투에 해당하고, 실제로는 더 복잡하고 아픈 감정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2년 전의 일을 전하고 난 뒤에 덧붙여 말하게 된다.
- 형이라면, ○○이도 괜찮아지겠죠.
도경수는 괜찮았다. 그리고 경수는 알아도 된다. 소녀에게 주었던 그 아프고 건조했던 시간들이, 그 2년동안 준 아픔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도경수는 지금 어리고, 2년전에는 더 어렸으니까. 그냥, 그것만 알면됐다. 경수는 ○○을 좋아했었다. 2년전의 그 날에도, 그 날이후에도 경수는 ○○을 좋아했고, 좋아한다. 좋아해서 그랬던 것이다, 어려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경수는 그 때를 돌이켜보며 큰 것이다. 소년은 이렇게 성장한다.
*
집 안은 노곤하고 따뜻했다. 하얀 조명에는 가볍고 따스한 노란빛이 함께 감도는 것 같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봄 같이 포근포근했다. 부드러운 색감이 집안 곳곳에 퍼져있었다. ○○은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이 집안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옆 주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정다웠다. 무언가를 써는 소리, 무언가 끓이는 소리, 보글보글, 지글지글. 그리고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는 조용하고 깨끗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 평화로운 아침이야. 입고있는 교복을 정리하면서 ○○이 생각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버지는 안경을 올렸고,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그리고 ○○의 얼굴을 한 번 보면서 웃음지었다.
" 좋은 아침이구나. "
네, ○○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분주한 손길에 의해서 식탁이 채워졌고, 앞치마를 벗으며 엄마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오늘은 늦지 않고 일어났네. 그녀의 엄마가 ○○을 보면서 웃었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자, 엄마가 여보, 부르면서 눈치를 줬다. 아버지는 아 참, 하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왜 안 드세요. "
" 얘도 참, 아직 가족이 다 앉았는데 먼저 먹으면 어떻게 해. "
그녀의 엄마가 ○○에게 핀잔을 줬다. ○○이 '가족?'하면서 의아해하자마자, 갑자기 어디서 토도도독 하는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딱 듣기에도, 전체적인 체구가 작은 어떤 것이 이쪽으로 온다는 게 소리였다. ○○이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주방쪽으로 한 아이-보다는 한 애기-가 빠른걸음으로 위태롭게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은 아 맞다, 하면서 이제야 깨달았다. 나, 아이가 있었지.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리가 짧고 인상이 예쁜, 스트라이프 옷을 입고있는 귀여운 남자 아기였다. 걸음마를 이제 떼기시작한 듯, 위태롭고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뒤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아이를 들어올리더니, 품에 안았다. 그는 아기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볼에 입맞추고는 이쪽을 보며 또 웃었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
그러자, 엄마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아이를 받아들더니, 우리 애기 일어났어? 에구구 하면서 웃으셨다. ○○은 어쩐지 멍한 기분이었다. 그 때 ○○에게로 그가 다가왔다. ○○은 이 사람을 알고있었다.
" 백현 오빠. "
백현이 다가오더니, 자세를 낮춰서 ○○의 볼에 입맞췄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맞은 편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아, 입맞추면서 귀에 작게 속삭이듯 말하며.
- 잘 잤어? 여보.
그 순간,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이 사람과 결혼했구나. '결혼했었지'도 아니고 '결혼했구나'였다.
식탁에 사람이 더 생기니 더 다정하고, 화목한 기운이 돌았다. 그제야 그녀의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어, 잘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교복과 아기와, 결혼이라니. 충분히 이질적이었지만, 그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이 집 안 분위기에의해서 조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였고, 백현은 음식을 칭찬했다. 장모님, 오늘 찌개 너무 맛있는데요. 그러면 엄마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웃었다. ○○은 이 낯선 풍경을 낯설어 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음식을 입 안에 넣었다. 음식은 맛있었다. 어떤 맛이라고 설명은 못하겠지만,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정말 맛있다기 보다는 '맛있다'라는 느낌이 떠올랐다. 백현이 ○○의 밥 위에 반찬 하나를 얹어주면서 웃었다. 많이 먹어, ○○아. 언제나 처럼 백현의 웃음은 참 예뻤다. 옆을 돌아보니 아이도 해맑게 웃음짓고 있었다. 정말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웃는 모습이 똑같아.
○○이 자연스럽게 웃음 짓고 있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어제도 이런 아침이었고, 그 전 날에도 이런 아침이었다. 그리고 분명 내일도 이런 분위기의 아침이겠지. '행복하다'라는 느낌이 저장된 것 처럼, 알람처럼 떠오르는.
가족의 화목한 웃음소리가 좋은 BGM처럼 집 안에 퍼졌다. ○○이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앉힌 ○○이 후우- 하고 편한 한숨을 짧게 뱉어냈다. 여유로워. 그러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은 흠칫했다. 아, 놀라라. 방 문 바로 옆에 누군가가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 진짜 도경수. 왔으면 말을 하지. "
어렸을 때부터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가고 했다. 상대방이 없어도, 상대방에게 굳이 알리지 않아도 각 집의 부모들은 두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래, 어서오렴. 같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고는 이렇게 서로의 집에 먼저와서 같이 등교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은 경수의 등장이 낯설지 않았다. 익숙한 것이었다. 경수는 ○○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 너, 학교 안 가? "
" 학교를 왜 가, 오늘 쉬는 날일텐데. "
" 그럼 너는 왜 지금 교복입고 있는데. "
" …그러게, 왜 입었지? "
내가 멍청한가봐. ○○이 웃음지으며 이 주제를 넘겼다. 그런데 경수는 그 자리에서, 팔짱을 긴 상태로 ○○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감돌 때 쯤, 다시 경수가 입을 열었다.
" 학교, 가야지. "
" 야, 학교를 왜 가. 오늘 쉬는 날이라니까? "
" 학교 가자. "
" 경수야 너 술이라도 마셨어? 왜 이래 오늘. "
평소처럼 ○○은 장난을 치며 웃었다. 경수는 그만큼 웃지는 못했다. 그저 ○○을 보면서, 그에 대한 답 없이 살짝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은 웃음으로 자꾸 분위기를 풀어내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계속 불안한 기운이 둘 사이에 멤돌고 있었다. ○○아. 경수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 네 인생을 살려면 가야지, 학교. "
그리고 그 순간 ○○은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경험했다. '뭐지?' 싶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압박감이었다. 자연스럽게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건 ○○이 이 상황에 긴장을 하고,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은 밖에서 들려오던 그 웃음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살고있던, 자신이 쓰고있는 방은 여전했다. 분명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겠지. 그러다가, ○○은 바닥에 돌아다니는 하얀 통을 발견하게 된다. 속 안이 비어있었다. …약통일까.
" 아, 알았어 알았어. 가면 되잖아, 학교. "
그러면서 ○○이 책 상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었다. 가자, 하면서 앞서서 방문을 열려고 했다. 그 때, 경수가 ○○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놀라 뒤 돌아봤더니, 경수가 진지한 얼굴로 ○○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 당황했다. 뭐,뭐 왜, 경수야. 하지만 경수는 말없이 시선을 문고리로 옮기더니, ○○을 슬쩍 밀어내고 문을 잠궜다. ○○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 학교가자며 도경수. "
" 응, 가야지. "
" 근데 문은 왜 잠궈. "
" 방해못하게. "
뭐? ○○의 표정이 있는대로 찌푸려졌다. 지금 경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오늘 따라 태도는 왜 이런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놈이 지금 장난을 치나. 아니 이게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만큼 어려운 느낌이 자꾸 들었다. ○○은 순간 경수에게 드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은 경수가 낯설었다.
몇 년을 친구로 지냈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집을 얼마나 많이 방문했는데. ○○은 그런 경수가, 지금 눈 앞에 있는 도경수가 낯설었다.
" 그 쪽이 아니야. "
경수가 ○○을 지나쳐, 한 쪽 벽으로 갔다. 적당히 큰 창문이 있는 곳이었다. 경수가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쌩-하고 찬 바람이 힘차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쏟아졌다나 침공했다가 더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다. ○○이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경수가 ○○을 보면서 손짓했다. 이 쪽으로 와. ○○이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일단은 그쪽으로 갔다. 도경수가 오라는데, 뭐. 그리고 그 곳으로 다가가, 경수가 열어놓은 창문 밖을 본 ○○은 굳어섰다. 어?
" 지금 아침 아니야? "
경수는 대답이 없었다.
○○은 창 밖에 펼쳐져있는 깜깜한 풍경에 당황했다. 이게 뭐지. 얼마나 어두웠으면 아무런 물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로등도 안 켜졌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곳은 높은 곳이다 정도였다. 찬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밑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손을 뻗어도 허공만 멤돌 것이라는 것을 ○○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 여기로 갈거야. "
" 뭐? "
" 여기로 나가야지. "
" 도경수? "
경수가 ○○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을 창문 쪽 가까이로 밀어붙였다. ○○은 이 상황에 온 몸이 긴장해있는 상태였다. 무슨 짓이야, 경수야. 이게, 이게 무슨 일인데. 그런데 경수는 힘을 주어 ○○을 그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이대로라면 상체가 먼저 넘어가서, 그대로 떨어질 것 같았다. 여기 너무 높아, 도대체 무슨 장난을 치는거야. 그렇게 ○○이 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멈칫했다. 아? 우리집은 주택인데, 1층인데. 그 때 경수의 움직임도 멈췄다. ○○이 경수를 봤다. 그리고 경수의 팔을 붙잡았다.
" 경수야, 나 학교 안가면 안돼? 나 이렇게 가기 싫은데. "
" ……. "
" 밖은 너무 어둡고, 춥잖아. 그리고 여긴 너무 높아. 나가기 무서워. 그런데 여기는 따뜻하잖아. 밝고, 부드럽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백현 오빠도 있고, 또또 우리 아이도 있고. 난 여기가 정말 좋은데, 나 여기 있고 싶어, 경수야. "
" ○○아. "
경수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또 다시 경수를 낯설어했다. 이 곳에, 이 집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야. ○○은 아까 식탁에서 느끼지 못한 이질감을 오랜 친구에게 느끼고 있었다. 가족보다 더 가깝고 소중한 친구에게서. 경수가 ○○의 두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 손으로 다시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은 멍하게 경수를 지켜봤다.
" 이제, 가자. "
" 경수야. "
" 같이, 돌아가자. 이젠, …이젠 가자, ○○아. "
" …너, 울어? "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 경수가 운 걸 본적이 없었다. 어렸을 땐, ○○이 살짝만 때려도 울던 놈이. 조금씩 성장한다고, 남자 흉내를 내겠다며 울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경수에게서 '운다'라는 개념을 멀리했었다. 그냥 우는 것과 경수를 ○○은 연결시키지 못했었다. 연결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런데, 그런 도경수가 지금 울고있는 것이다. 자신보고 자꾸 밖으로 나가자며, 울고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 창틀 쪽으로 올라섰다. 왜 자신이 이런 위험한 짓을 해야하는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지만, 하려고 했다. 경수가 울고있으므로, 저렇게 애절하게 나가자고 말하므로. 그건 경수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용기였다. 하지만 그런 용기는 내도, 막상 바로 앞에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있다는 것은 충분히 두려운 일이었다. ○○은 쉽사리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때, 경수가 ○○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있는 ○○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같이 가자고.
○○은 눈을 감았다. 몸의 떨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은 경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래, 저 바닥의 끝에 무엇이 있든, 세상이 얼마나 춥고 어둡든. 도경수가 옆에 있으므로.
몸이 기울어진다 싶자, 갑자기 몸이 위 아래로 뒤집어져서 휙-하고 떨어졌다. 정수리부터 갈라져서 온 몸을 때리는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그 때, 경수가 ○○을 더 품에 넣었다. 왜 바닥이 나오지 않지. 그들은 빠른 속도로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경수가 ○○의 귀에 들릴정도로 속삭였다.
" 좋아해. "
언제 들었는지 모를 익숙한 소년의 고백이, ○○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그리고 그 순간, 추락하던 두 사람이, 쿵.
*
그날 밤에 경수는 열심히 뛰었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이제 겨울을 알리기 까지하는 그 시기에,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축 늘어진 소녀가 경수의 등에 업혀있었다. 경수는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것이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수는 열심히 뛰었다. 그냥, 뛰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문고리를 돌려보았더니, 문이 열렸다. 경수는 문을 열자마자, 그 곳에 있는 공기를 느꼈다. ○○의 엄마가 자살했던 그 날, 옆에 있던 경수가 함께 느꼈었던 그 때의 공기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굴러다니는 하얀색 약통들이 보였고, 낙화한 꽃마냥 흐트러져 있는 ○○을 발견하게 됐다. 구급차를 부르면 됐었다. 그런데, 큰 절망과 당황을 느낀 소년에게 이성이란 이미 없었다. 그리고 이 높고 가난한 동네에 구급차가 빨리 와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 곧 사라졌으므로- 들었다. 그래서 경수는 무작정 ○○을 업었고 뛴 것이었다. 뛰었다, 정말로. 정신없이.
그리고 ○○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다. 저를 보며 울고있는 경수를. 제 손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그 울음 사이로 간간이 고맙다,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살아줘서, 살아줘서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성인이 되지 않은 두 청소년들이 느끼기에는 너무 크고, 격한 감정이었다. 혹은 정말로 소중한 감정.
○○은 눈을 뜨고, 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 좀 멍하게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첫마디가, 죽음의 세상 근처에 갔다가 돌아온 소녀의 그 첫마디는.
" 경수야. "
그의 이름이었다. 경수가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으며, 제 눈을 소매로 쓱쓱 크게 문지르며 일어났다. 그리고 충혈된 눈을, 그렇지만 평소처럼 크고 동그란 그 눈을 ○○과 마주했다. ○○은 그 모습을 보고, 힘없이 미소지었다. 미소라, 웃음이라. 그건 이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정말로 큰 것이었다. 경수는 그 순간, ○○이 제 앞에서 이런 느낌으로 웃은게 언제였었지, 라고 생각했다.
" 고마워. "
너 때문에 산거야. 네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어. …네가, 그 끝에서 나를 기다렸으니까.
긴긴 마음과 이야기는 '고마워'라는 한 마디에 다 축약되어있었다. 물론 경수는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와 느낌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장한 소년은 이를 앙 다물며 다시 오려는 울음을, 눈물을 참아내려고 애썼다. '고맙다'는 말이 가지는 파장력은 굉장히 컸고, 그 말은 두 사람에게 정말로 아름다웠다.
소녀는 죽음의 끝에서 들려왔던 '좋아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건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 건 그 날 밤 경수가 뱉었던 고백의 기억이기도 했고, 오래 전부터 간직해온 그 소년의 말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소년에게 가지고 있었던 소녀의 감정이었음을. 소녀는 소년 때문에 살고싶어졌다. 죽음의 끝에서 경수는 소녀에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주었다.
사실 그렇게 아프면서 소년과 소녀는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아파하고, 좋아하면서.
*
" 좀 어때? "
" 괜찮아요, 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
백현은 ○○의 얼굴에서 한결 편안해진 모습을 알아차렸다. 그래, 진짜 다행이다. 백현이 안심하며, 그제야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은 앞에 놓여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백현을 보았다. ○○의 몸에서 전체적으로 긴장이 빠져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뒤에, ○○은 모든 무거움을 그 곳에 버려두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백현도 ○○을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부드럽게 퍼지는, 어떤 것이 있었다. 백현은 언제나 ○○을 유하게 만들었고, ○○은 백현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경수에게 말했던 것처럼. 웃게 만들어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고. …좋아하니까, 많이.
" 오빠. "
" 응? "
"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오빠도 사실은 아셔야 하는 일이니까. "
" 무슨 말인데? "
" 저, …아이를 가졌었어요. 근데 앞으로의 상황이 두려워서 지웠어요. …근데 그 아이가 그 날 생긴 아이에요. "
" …○○아. "
" 우리 아이였어요. 오빠랑, 제 아이요. "
○○이 조심스럽게, 힘겹게 고백했지만 백현은 충격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백현은 ○○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뿐이었다. 입가에 예의상 미소를 띠고.
" 알고있어. 들었어, 경수한테. "
" 아, "
" 나는 그 때의 너한테 있어주지 못한 걸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해. 정말 미안해, ○○아. "
" 오빠…. "
하고 싶었던 말은 많았다. 둘다 많았었다. 하지만 길게 끌지 않고, 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그들은 이 이야기를 묻어뒀다. 확실한 건 , 그 것이면 됐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했다는 것.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었고, 그 것이 아팠다고 해도, 지금의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웠기에. 그 두사람만은 여전했으므로.
" ○○아. "
" 네, 오빠. "
" 이번 겨울에 나랑 같이 갈래? 우리 학교에 유학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걸 어떻게 잘 준비해보면 너도, "
" 오빠. "
백현은 ○○의 미소에서 진작에 깨달았다. 아, 우리는 여전하구나.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이 상태 그대로, 여전하구나.
" 전 고등학교에도 돌아가지 않을거에요. 엄마는 죽는 날까지, 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안 가요. 그건 학교를 가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진짜 내 인생을 나 답게 살라는 말이였으니까. 그래서 전 일단 떠날거에요. "
" 어디로? "
" 그냥, 일단은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내가 아는 모든 풍경들이 없는 곳으로 갈거에요.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아는 장소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어차피, 그 집을 '우리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요. "
백현은 늘 그렇듯, 비슷한 미소로 ○○을 봐주었다. 언제나 백현이 ○○에게 보여주는 시선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은 그 때마다, 사람의 따스한 손길을 받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그런 손길.
"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널 찾기도 힘들어지겠네. "
" 또, 만나요. 오빠. "
백현이 옆에 있던 메모지에 가지고 있던 펜으로 무언가를 써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메모지를 ○○에게 주었다.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었다. 종이를 보던 ○○이 다시 백현을 쳐다보았다.
" 하지만 언제든지 네 연락을 기다릴게. 괜찮아지는 날이오면, 그냥 모든 것에서 진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면 연락 줘. 언제든지 반갑게 답할테니까. "
○○이 백현의 말을 들으며 웃음지었다. 그리고 메모지를 곱게 접어서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백현은 느꼈다. 평소에도 제 앞에서는 ○○이 몇번씩 잘 웃었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미소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그러니까 절망의 바닥에 있던 ○○의 웃음과는 달랐다. 생각보다 더 자주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편하고 가벼웠다.
어머니의 보험금은 빚을 갚고, 장례식을 준비하는데 거의 다 썼다고 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사실상 금전적으로 크게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은 여전히 가난한 동네의 주민이었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해도 그 지역의 가난한 동네의 주민이 될 것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을 것이고, 또 다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아오는 여유는 컸다. 가장 큰 것은,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라 살고싶어졌다.
" 고마워요, 오빠. 저는 오빠를 정말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오빠와 함께 있었던 그 날 밤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그 때, 나는 너무 무서웠고 오빠는 진짜 나한테 큰 힘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충동적인 날이 아니었어요. 난 오빠를 좋아했기 때문에, 오빠가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니까. …고마워요, 정말. "
좋아했다는 말은 과거형이다. 그걸 놓칠 정도로 백현은 얼이 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감정은 진행형이지만, ○○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사실,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날의 기억을, 그 날 때문에 생겼던 아이와 그로 인해 닥쳐왔던 불행들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건, ○○이 백현을 좋아했기 때문이므로. 어둠 밖에 없던 제 세상에 반짝반짝 작은 빛이었으므로.
" 우리 아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오빠 아이에요,가 아니라 나랑 너의 아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 "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알았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구나.
*
가난한 동네는 여전했다. 여전히 높았고, 어두웠고, 좁고, 험했다. 이 곳에서 산 사람이 떠나버렸지만, 그 것은 이 동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하늘을 본 ○○은 잠시 멈추어섰다. 그래도, 엄마는 저 좋은 하늘 근처에 계시겠지. 만나지는 못했지만, 사랑했던 내 뱃속의 아이도 저 곳에 있겠지. 내일이면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서, ○○은 꽤 많은 걸 담아두려고 천천히 걸었다. 내일이면, ○○은 더 이상 이 동네의 주민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내일이면 ○○의 앞에 있는 저 그림자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 도경수. "
벽에 기대어있던 경수가 ○○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디갔다와? "
" 그냥 어디 갔다왔어. 집에 있기 싫어서. "
" 그래도, 돌아왔네. "
" 너, 또 기다리잖아. "
○○이 경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라면 거의 피하거나, 맞은편에 주로 앉았을텐데. 경수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경수 역시 ○○을 따라 앉았다. 겨울을 부르는 가을 바람은 꽤 차가웠다. 경수가 슬쩍 ○○을 봤다. 안 추워? 물었다. 그러자 ○○이 경수 쪽으로 엉덩이를 더 끌어붙였다. 거의 닿이지 않았던 두 사람의 팔이, 옆 선이 닿았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그리고 ○○이 말했다. 안 추워.
" 경수야. "
" 왜? "
" 너는 내가 백현 오빠의 아이를 임신한 것 때문에, 나한테 실망한거야? "
가볍지 못한 주제를, ○○이 쉽게 던져냈다. 그래서 당황한 것은 오히려 경수 쪽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몸을 떨고, 체념하고, 두려워했던 사람은 원래 ○○이었는데. 경수가 시선을 ○○쪽으로 슬쩍 돌렸다. ○○은 하늘을 보면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수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난 제 행동들에 그는 이제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주제가 경수에게 더 불편해진 것이다. 물론 그 예전에도 좋아했던 주제는 아니었지만.
경수의 침묵을 긍정으로 대충 생각한 ○○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은 없었다.
" 하지만, 경수야. 어쩌면 그 날, 너를 먼저 만났다면. 그 아이의 아빠가 네가 될 수도 있었어. "
백현 오빠를 좋아했지만, 그 때의 나도 어쩌면 그 만큼 널 좋아했을지도 모르니까.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의 속 안에만 담아두었다. 경수의 표정이 이제 오히려 담담했다. 한,두 달 전의 소년처럼 쉽게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성장한 소년은 담담하게 생각했다.
"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을거야. 만약 무언가를 했다고해도, 너를 꼭 안아주거나, "
경수가 고개를 돌려 ○○을 보았다. 마주친 두 눈이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경수는 가까운 거리에서 바로 고개만 살짝 빼 ○○의 입에 입맞췄다. 입술은 살짝 닿았다 곧 바로 떨어졌고, 두 사람의 감은 눈도 바로 열렸다. 경수는 살짝 웃었다.
" 이렇게 입만 맞췄겠지. "
" …너 진짜, 언제부터 이렇게 멋대로였어. "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꽤 가벼웠다. 둘의 대화는 17세 불행의 이전으로 흘러갔다. 그 때의 소중함, 그때의 다정함, 그때의 장난스러움으로. 경수는 ○○의 말과 목소리를 듣고 또 살짝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진지하게 자세를 잡고, 그 미소는 유지한채 말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나였으면, 널 두고 어디를 떠나던가 하지는 않지. "
소년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곧고, 짙었다. 어디하나 어긋남이 없이, 믿을 수 있을만큼 굳고 다정한 태도였다. 이번에는 ○○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앞을 보고있는 경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소년의 진심을 읽었다. 동시에 소녀도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그런 말을 해주는 이 소년이 언제부터 제게 남자였던가. 숨기기 힘들정도의 크고 큰 감정을 느꼈다. 경수를 향한 눈길을 따라 어디선가 쿵쿵쿵쿵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가슴 속 부터 시작해서, 손 목 부근, 목과 얼굴, 머리 전체가 쿵쿵쿵 울렸다. 나는 그 동안 이런 감정을 어떻게 눈치채지도 못하고 살았을까. 소녀는 자신을 책망했다.
○○은 경수를 보다가 살짝 몸을 일으켰다. 가깝게 닿여있던 몸의 기척이 느껴지자, 자연스럽게 경수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은 경수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경수는 눈을 뜬채로 당황했다. 그 커다란 눈이 깜빡거리면서, 제 바로 앞에 있는 소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감은 눈이 보이고, 깨끗한 피부가 보이고, 그녀의 속눈썹이 보였다. 그제야 경수는 눈을 감았다. 어정쩡하게 놓여진 손을 ○○의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경수가 좀 더 밀고, 파고 들었다. ○○의 몸이 뒤로 빠지고, 시멘트 벽 쪽에 밀렸다. 무릎을 앞에 세워둔 ○○의 손이 어정쩡해지자, 경수는 남은 한 손으로 그 손을 꼭 붙잡았다. ○○의 왼손과 경수의 오른손이 깍지를 낀 채로 맞닿았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는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 때 했던 입맞춤처럼, 여전히 좀 서투르고 요령없었지만, 많은 것이 변한 기분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성장했고, 그 성장으로 전보다는 서로를 더 소중하게 대했다. 서로에 대한 커진 감정만큼이나 둘의 키스는 길었고, 깊었다.
두 사람이 붙어 앉아서 함께 하늘을 봤다. 경수의 왼팔은 여전히 ○○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의 고개가 경수의 왼쪽 어깨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 넌 언제부터 이렇게 멋대로였는데. "
경수가 장난이 조금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 그 말을 듣고 푸흡 하고 짧게 웃었다. 바람은 찼지만, 둘 사이의 공기가 포근했다. ○○은 말없이 이 분위기를 느꼈다. 이 동네의 하늘을, 공기를, 이 가난한 마을의 모습을, 옆에 있는 벽을, 그리고 제 옆에 붙어있는 도경수라는 존재를 느꼈다. 왜냐면, 이 모든 것은 내일 이후로 자신에게 없는 것이 될테니까.
" 꿈이야, 경수야. "
" 어? "
" 너도, 나도. 우리는 오늘까지 정말로 길고 긴 꿈을 꾼거야. "
경수는 ○○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침묵으로 공기가 무거워지자, ○○이 고개를 돌려 경수의 이마를 탁- 소리나게 때렸다. 아! 왜 때려. 경수가 반사적으로 묻자, ○○이 웃었다.
" 꿈이니까 이런게 가능한거라고, 경수야. 꿈 깨라고! "
분위기 사이에 다시 장난스러운 느낌이 들어갔다. 경수도 그제야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오늘은 정말로 별이 많이 보였다. 무슨 진공청소기가 매연이라도 다 빨아들였나. 가을이라 그런지 하늘이 맑았다.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두 사람은 별을 보면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오늘 별 참 많네. 응, 그러게.
그러다, 두 사람은 다시 조심스럽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별이 빛나는 밤에.
다음날 ○○은 가난한 동네를 떠났다. 주로 지나던 거리를 떠났다. 저를 알고있는 수 많은 얼굴들을 떠났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돈과 옷, 몇가지 생필품, 그리고 백현이 준 메모지 정도 였다. ○○의 짐 그 어느 곳에도 경수와 관련된 것들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일들을 모두 꿈으로 남겨놓기로 결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경수를. 어제까지의 기억 모두, 그녀에게는 꿈이 되었다. 사실 꿈이라는 것을 스스로 정리하기까지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노력했다. 가난한 동네에서의 기억을, 경수와 만났던 모든 기억들을 꿈으로 놓기로. 그리고 꿈은 헛것이므로, 다 잊어버리기로.
경수도 그러기를 바랐다. 소녀는 경수가 이 모든 것을 꿈으로 기억하고 자신을 잊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은 경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널 좋아한다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사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경수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꿈이 되어야 했으므로. 꿈이 너무 달콤하면, 깨어나서 너무 아플 수 밖에 없으므로. 그러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 모든 것을 두고가자.
그리고 5년 뒤, 두 사람은,
드디어 中이 끝났네여.
너무 많은 내용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더니, 엉망진창. ㅠㅠ
댓글들 때문에 정말 감동받아서,
빨리 오고 싶어서 힘들었어요...
조금씩 쓰다가 주말에 여유가 좀 생겨서 완성해서 왔어요ㅎㅎ.
진짜, 댓글 정말정말 감사해요.
댓글 하나하나 제가 다 기억하는거 아시죠.
늘늘늘 감사합니다, 모두모두.
♥ 암호닉 ♥
롱이 / 여기있나영 / 꽃사탕 / 낑깡 / 꿀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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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진심으로, 진짜진짜, 표현 못할 정도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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