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에 上
w.꼬밍
백열등은 방 하나도 제대로 밝히지 못할 만큼 수명이 다해있었다. ○○은 이런 희미한 빛이 더 보기 싫었다. 차라리 그냥 깜깜하던가, 아예 환하게 밝았으면 좋았을텐데. ○○은 저 수명다한 백열등을 볼 때마다 자신을 떠올리곤 했던 것이었다. 살고자하는 마음만 간신히 붙들고 겨우겨우 버티면서 사는 삶. 하지만 결국은 그 쓸데없는 의지마저 수명이 다한 순간 무참히 꺼져버릴 일이었다. 닮았네. ○○은 자신을 저 백열등의 삶과 비슷함을 인정했다. 살아있지만, 살고자하는 의지는 쓸데없이 붙어있지만 사실은 저도 알고있었다. 얼마 안가, 꺼져버릴 삶이라는 걸. 자신의 인생은 어둠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힘든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행복하지는 않아도, 그 만큼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있기 때문에.
○○이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방은 어둠에 잠겨있어야 옳아야 했다. 희미하지만 백열등이 이 시간에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잠들지 않은 ○○의 엄마가 앉아있었다. 엄마가 말했다. 이제오니. ○○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야 옳은 시간이기에, 그녀는 '다녀왔어요' 같은 말은 늘 그렇듯 준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비정상적'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은 방 안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엄마는 이미 모든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 학교에 잘 가지 않는다면서. 지각하고, 무단조퇴도 한다면서. "
" 그런 소식은 또 어디서 들으세요. "
집에는 전화기가 없다. 그녀의 엄마에게도 휴대폰이 없다. 담임이 전화를 했다고 해도, 그건 이제 더 이상 엄마의 번호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 곳에 적혀있는 집 주소 역시 이제는 우리집이 아닐 것이다. 지금 있는 이 단칸방은 그녀가 '우리집'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냥 머무르는 곳이지. 심지어는 이 곳 주소도 모른다. 그냥 이 길을 따라가고, 언덕을 오르고, 여기서 이렇게 들어가고 하면 이 곳이 나온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담임이 알 수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담임은 그녀에게 이 정도로 애정을 쏟는 -드라마에서나 보는- 착한 선생도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가 또 이런 얘기를 꺼낸다는 건. ○○은 방 안을 살폈다. 물론 그런 흔적같은 것이 있어도 알아볼리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는 있었다. 아, 손님이 왔었네.
" 학교에는 가렴. "
" …엄마는 제가 뭐하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학교 같은 거, 지금 저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
" 나는 궁금하구나.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니? …너는 뭐가 되고 싶니? "
○○은 갑작스러운 엄마의 질문에 자꾸만 말이 막혔다. 그녀의 엄마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지 몰랐다. ○○의 머릿속에는 이미 긴 문장의 답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이 결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하늘 가까운 어딘가로 데려다주지 못할 거라는 걸. ○○은 그저 하루를 살면서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만 살고 싶었다. 꿈, 꿈이라니. 장래희망이라니. 그런게 어디있을까. 그녀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게 큰 욕심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그 하루를 하고 싶은대로 낭비하면서 살고 싶었다. 어른들은 말했다. 시간은 소중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생도 소중한 것이라고. 그녀도 그런 말은 어릴 때 부터 많이 들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것이 꿈이었다.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도, 흔한 10대들은 그 시간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 처럼. 늙어서 돌이켜보니 소중했다는 것을 알게된다고 해도, 10대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낭비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그녀는 그 흔한 10대들처럼, 그녀의 하루를 마음껏 낭비하면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냥, 그 단 하루만큼을. 그녀에게는 비장한 꿈이었고, 19세 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꿈이었다.
" 주무세요, 엄마. 시간이 늦었어요. "
" 학교에 가. "
" 엄마,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는게 편해요. "
" 네 인생을 위해서 학교에 가. 너의 미래를 위해서. "
○○은 엄마가 왜 이렇게 강하게 저 의지를 밀어붙이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보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헛웃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태도가 간절해보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터져나왔을 웃음이었다. 미래라니. 미래도 오늘이 있어야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없으면, 내일도 없 듯이. 오늘을 살지 않으면, 내일을 살 수 없듯이. 현재를 살아내지 않으면, 그녀에게 미래라는 것도 없었다.
" 학교에 가서, 너를 위해서 살아, 이제는. 가서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더 나은 것들을 배우면서. "
" 피곤하세요, 어서 주무세요. "
" 경수같이 좋은 애들, 많이 만나. "
" 좋은 애들요. "
" 그래도 너희는 아직도 사이가 좋잖니. "
○○은 전등을 껐다.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한 번에 쏟아졌다. 그녀와 그녀의 엄마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묻었다. 그 웃음은 기쁨이나, 행복의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비웃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 엄마가 걔를 잘 모르는거에요. "
○○은 엄마가 먼저 잠들기를 기다렸다. 눈은 점차 어둠에 익숙해졌다. ○○은 몰려오는 피곤함을 느꼈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다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우선 벽에 기대 앉았다. 당장이라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이런 기분으로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찜찜한 기분으로 잠이 들 것 같아. 어둠 속에 홀로 침묵을 지키며 있다는 것은, 많은 생각들이 침입하게 만드는 좋은 조건이었다.
- 나는 궁금하구나.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니?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은 그 때, 긴 문장의 답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곧바로 떠올랐던 단어를 모른척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지금 다시 그녀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을까. 훨씬 짧고, 어쩌면 더 간단했을 대답을 왜 나는 모른척해야만 했을까. 하, 한숨을 짧게 내쉬고 위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시선이 절로 위를 향했다.
…엄마. 엄마, 저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나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주는 아이가 있는 따뜻한 가정 속에서 살고 싶어요.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아이를 꼭 껴안고 잠에 들고 싶어요.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나도 사실은.
*
엄마가 잠이 들었음을 알고, ○○은 밖으로 나왔다. 집 안의 공기가 유난히 답답했다. 찬 바람을 좀 쐬야지.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 늦게 끝난 일의 피로가 온 몸을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집 안의 공기보다는 가벼웠다. 바로 앞, 작은 길을 가운데 두고 있는 맞은편에 우선 앉았다. 뒤에는 낡은 시멘트 벽이었지만, 앞에 계단 처럼 높은 턱이 있어서 앉기가 편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앉으면 하늘이 잘 보였다. 가난한 동네의 좋은 점은 높은 곳에 있고, 주위의 집들은 사람들의 자존감처럼 낮다는 것이었다. ○○은 주머니 안 쪽에 넣어놓은 담배곽을 꺼내들었다. 볼품없이 구겨졌네. 그래도 내용물은 무사하니까.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연기를 훅 뱉어냈다.
불행한 사람들이 즐기는 허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은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그 흔한 여고생들중 하나였다. 담배피는 또래 남자 아이들을 허세로 단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인생이 이렇게되고 나서, 그녀 역시 그 혐오하던 담배를 찾기 시작했다. 살면서 처음이었다. 담배를 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건. 그렇게 자주 피는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필요는 했다. 지금 같이 이 숨막히는 느낌이 들때는 말이다. 이 가격에, 이 한 번의 담배는 꽤 효과가 좋았다. 긴장이 풀려. 긴장할 일도 없었는데, 온 몸이 드디어 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 어떤 손 하나가 ○○의 눈 앞에 쓱 끼어들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가져가버리는 것이었다.
" 학생이 이런거나 피고. "
고개를 들어보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씩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뺏은 담배를 제 입으로 들고가더니 피기 시작했다. ○○은 그 모습을 헛웃음 지으며 쳐다보았다.
" 도경수. "
제 이름이 들려와도 경수는 모른 척 계속 하던 일에 집중했다. ○○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제일 학생같은 복장으로 담배피는 사람이 누군데.
오늘 엄마를 찾아온 사람은 도경수일 것이다. ○○은 확신했다. ○○의 집을 아는 사람은 도경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엄마가 경계하지 않고 문을 열어줄 사람도 경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엄마는 ○○이 경수와 친하게 잘 지낼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집까지 친히 찾아오는 놈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은 그렇다쳐도, 이 상황이 황당했다. 지금 시간이 몇시더라. 가로등 하나 제대로 없는 이 가난한 동네에 도경수가 아직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놈인가보다. 이 늦은 시간에, 이 험한 동네에 아무렇지도 않게 오는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 시간에 내가 나올 거라는 것을 알았나보다, 넌.
" 웬일이야. "
" 학교 오라고. "
" 엄마한테 네가 다 말했잖아. 그런 이유로 이 시간까지 있지는 않았을거 아니야. "
능숙하게 담배를 피던 경수가, 이내 담배를 벽에 문질러 꺼버렸다. 그리고 앉아있는 ○○을 보며 다시 쓱 웃는 것이었다. 그냥. 그 대답이 의심스러워 ○○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뒷 말이 경수의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
" 죽었으면 하는 것 처럼 들리네. "
" 글쎄, 너 죽고나면 또 괴롭힐 건 없잖아. "
경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도 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그래, 참 징하구나 너도.
" 이런 인생은 어때, 살만해? "
" 너 안 보이면 더. "
" 안타깝네, 그럴 일은 없을거라서. "
" 도경수. "
○○의 시선이 단호하게 경수를 향했다. 경수는 대답하지 않고, ○○과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가을이라 바람이 찼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네. 언제 가을이 됐을까. 잠시간의 침묵. 바람이 분다면, 그 것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동네의 밤은 조용했다.
" …이런 곳에 시간 낭비 하지말고, 공부나 해. 수능 얼마 안 남았잖아. "
" 알아서 하고 있어. "
" 그래, 너 예전부터 공부 잘했지. "
" 학교에 와. "
" 알아서 할거니까, 이제 오지마. "
" 밑바닥에는,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줘야지. "
마주한 시선은 곧고 분명한데, 어쩐지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가로등하나 없는 밤이라서 그런걸지도 몰랐다. 원래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불안해보이곤 하니까. 경수는 꺼져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발로 짓이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경수가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싫어. "
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은 소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은 그 소년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눈으로 보다가 하늘을 보았다. 가난한 동네는 하늘이 잘 보이지만, 하늘이 가깝지는 않다. 가끔 달 같은 것들이 보이면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하늘은 별 하나 보기 힘들구나. 차라리 인공위성 같은 것이라도, 그 반짝이는 것 하나만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빛 나는 것 하나정도만 있어도, 이 밑바닥 인생이 조금은 살만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굳이 예를들면, 그러니까 말이다. 옛날의 너 같은 것. 예전의 도경수 같은 것.
*
사실 이렇게되면 학교에 오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열심히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오는 것이든, 하루만에 오는 것이든 이런 분위기는 ○○에게 맞지 않았다. 대학이라는 미래라니. 지금 자신에게는 이 곳에 앉아있는 시간까지 사치로 느껴졌다.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결국 학교에 오게된 것은 아침에 저를 향해 또 다시 간곡하게 말하던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젯밤에도 학교에 오라고 말하고 갔던 도경수도 조금 이유에 포함되어 있었다. 놓친 공부를 따라가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무엇보다도 공부를 해야한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반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의 분위기가 소란스러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수능도 얼마 안 남은 친구들한테, 굳이 분위기 변화를 줄 필요는 없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은 놀기 좋아하는 양아치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량스럽게 시비를 거는 학생도 아니었다. 아직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가난한 동네의 가난한 사람일 뿐이었다. 2년 전까지는, 이곳의 여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래서 아무튼 ○○은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체육 창고 옆에 앉아있던 참이었다.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흘러가는 구름 따위를 보았다. 가끔은 잠자리 몇 마리도 날아다녔다. 어쩌면, 이 것이 제가 원했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시간을 마음껏 낭비해보는 것. 그녀는 나른하고, 피곤했다. 그리고 아랫배 부근이 저릿하기도 했다. 그냥 시원하고 따스한 곳에 누워있고 싶었다.
" 학교 왔네. "
끼어드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이 고개를 들어쳐다봤더니, 역시나 경수가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수가 슬쩍 웃었다. 낮에 보니 또 다른 느낌이구나, 도경수.
" 이게 학교에 나온거야? 땡땡이 치고 있는데. "
" 그래도 아침에 나오긴 했네. "
경수가 ○○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고, 날리는 머리카락을 ○○이 한 번 정리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도 않을 것 같고, 긴장이 되지도 않았다. 평화로웠다. 사실 둘에게는 이런 그림이 맞았다.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것. 약간 주황빛을 가진 햇살을 맞으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조용한 어느 구석에 함께 앉아있는 것. 그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그린 꿈이기도 했고, 과거이기도 했다.
" 너는 왜 땡땡이야. "
" 그냥, 수업 재미없어서. "
" 네가 나한테 학교오라고 뭐라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
" 그래도 …신기하잖아. 햇살 쨍쨍한 날에 학교. "
" 너는 매일보는 거잖아. 뭐가 신기해. "
오가는 말투가 다 틱틱거렸다. 성의 없었고 뭉툭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모든 것에 무뎌진 사람들 같았다. 퉁명스러운 대화가 갑자기 멎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수도 어느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주한 눈은 언제나 분명했다. 밝은 낮이라 그런지, 불안한 느낌도 없었다. 어쩐지 둘다 눈을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보는 것 보다, 이 가까이에서, 이렇게 밝은 곳에서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 그래도, 신기하네. 오늘은. "
경수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어떤 것인지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편하게 잠들고만 싶은 낮이었다.
" 경수야. "
○○의 목소리와 말투에서도, 그런 나른한 기분이 느껴졌다. 뭉툭한 느낌이 아니라, 유한 느낌이었다. 경수는 그 목소리가 새삼스러웠다. 저런 목소리와 말투가 저에게 왔던 것이 언제였더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 왜. "
" …너는 왜 그렇게 변한거야? "
숨이 탁 막혔다. 경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처럼, 침묵이 지나갔다. 귀를 기울이면 교실에서 수업하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아랫배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 기분 나빠. ○○은 자신의 몸이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옆에있는 경수에게 고개를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저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글쎄, 말 못하겠는데. "
경수의 대답에 ○○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돌아섰다. 경수는 제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 쪽을 쿡쿡 찔렀다.
" 기억해보도록 해. 왜 이렇게 됐을까. "
○○은 몸을 일으켰다. 주제가 이렇게 흘러가버린 이상, 옆에 도경수가 있는 이상 절대로 편안한 휴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수가 물었다. 어디가. 아랫배의 통증이 일어나니 더 심했다. ○○이 대답했다. 조퇴. 둘의 대화는 다시 성의 없는 그 느낌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던 그 짧은 순간이 꿈이었던 것 마냥. 그리고 학교를 나서려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경수가 일어났다. 먼저 앞서 걷고있는 ○○을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랫 입술을 살짝 물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 짧은 한숨이 경수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빨리 걸음을 옮겼다. 경수가 ○○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라는 말이 눈에 다 써져있었다.
" 조심 좀 해, 병신아. "
" 뭐? "
무슨 말이야, 더 따지려고 하기도 전에 경수가 교복 마이를 벗었다. 그리고 ○○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굽혀서 몸을 낮췄다. ○○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경수가 마이를 ○○의 치마 쪽에 두고, 안 듯이 소매를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두 소매를 묶고는 일어섰다. 다시 두 사람이 마주봤고, 경수가 입을 열었다.
" 피, 묻었어. 네 치마에. "
" 어? "
" 너도 진짜. "
" 됐어, 나도 마이 있어. "
" …추워. "
" 그럼 너 입어. "
" 씨발, 난 덥다고. "
그리고는 저 혼자 학교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은 어이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학교 밖을 나서다가, 또 한 번 뒤돌아보았다.
도경수 병신. 너도 참 서툴다. 하나만 하라고, 하나만. 너도 참, 바보같다.
*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과 도경수는 사이 좋은 소꿉 친구 사이였다. 주위에서 흔히 듣지만, 또 흔히 보이는 게 아닌 그 '소꿉친구' 말이다. 어머니끼리 서로 잘 알아서 유치원도 가기 전부터 서로를 자주 봤었다. 처음 만났을 때, 경수는 ○○보다 키가 더 작았고 그 큰 눈을 굴렸었다. 엄마 뒤에 숨어있던 경수에게 먼저 나서서 인사한 사람은 기억이 맞다면 ○○이었을 것이다. 낯을 좀 가렸던 어린 날의 경수는, 활달했던 ○○에게 이끌려 금방 친해졌다.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 둘은 자주 싸우기도 했고 먼저 괴롭힌 쪽은 주로 ○○이었다. 둘다 토라져있다가도, 엄마들이 나서서 손을 잡고 화해시키면 둘은 그 손을 꽉 붙들고 놀이터로 달려나가곤 했다. 초등학교를 같이 들어갔고 몇 번은 같은 반이 된적도 있었다. 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었지만, 시간은 금방 지나 다른 중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에 친한 사이라 서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늘 같은 사이처럼 지냈었다. 같이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방 안에서 음악을 틀고 이야기 하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했었다. 조금 과정을 보태서 말하자면, 그 때는 가족보다 더 믿음이 가고 아는 것이 많은 사이였다.
그리고 17세,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 어제보다 늦게오네. "
어두운 골목 안에서 경수가 말했다. ○○은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마이 없는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하늘이 가까워서 그런건지, 정말로 가을이 와버린건지 날이 많이 쌀쌀했다. ○○은 팔에 걸쳐둔 마이를 경수에게로 내밀었다.
" 왜 왔는데. "
" 이거 찾으러. "
마이를 받아드며 경수가 말했다. 그런 경수를 서서 지켜보다가, 바로 맞은 편인 집 앞 계단에 ○○이 앉았다. 좁은 골목. 떨어진 거리는 당연히 멀지 않았지만, 어둠은 늘 그랬다. 이 가까운 사이도 멀어버이게 만들정도로,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경수가 마이를 걸치고는, ○○을 보았다. ○○은 경수에게 더 이상 시선을 두지 않고, 또 다시 담배를 하나 물었다. 경수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 너 아르바이트 어디서 하는데? "
" 상관없잖아. "
" 왜 안 알려주는데. "
" 거기까지 네가 나 괴롭히러오게 두라고? "
17세 어느 날, ○○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회사가 부도났다. 이런 불행을 함께 이겨낼 틈도 없이, 그녀의 아버지는 도망쳤다. 어디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막대한 빛이 모녀에게로 쏟아졌고, 그녀는 살아야 했다. 살아있음에 느끼는 행복은 잃었지만, 그만큼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더 강렬해졌다. 삶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살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다니, 신도 참 무정하지. 그녀는 그 이후로 가끔 생각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처럼 삶이 힘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어쩌면 이미 이 끔찍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색하고 냉랭한 기운이 지나갔다. ○○은 순간 자신의 말이 너무 차가웠던게 아니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말을 고치거나 수습할 일은 없었다. 그런 것이 불필요한 사이였기 때문에. 17세 그 불행의 어느 날, 그 소중했던 친구 도경수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 …몸이라도 파니? "
" …뭐? "
길게 늘어진 ○○의 재물음이 아팠다. 그녀는 순간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잘못들은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기엔 경수의 얼굴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무덤덤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이라, 아플 지경이었다. 경수는 아래로 둔 시선을 올리고, ○○을 봤다. ○○의 불안한 시선이 경수의 눈에 와닿았고, 경수는 더 눈에 힘을주었다. 그 시선 만큼 불안하게 흔들리는 제 모습을 숨기고자. 그리고 더 분명하게 말했다. 아까의 흔들림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단호한 물음이었다. 너, 몸 팔고다니냐고.
" 도경수, …너 오늘은 좀 지나치다. "
" 팔래? "
" 야, 도경수, "
" …나한테. "
화를 내려던 ○○의 입이 순간 닫혔다. 나오려던 목소리가 목에 탁 걸려서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사람에게 공존하는 느낌은 '아픔'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곳, 또 서로 다른 곳을 함께 찔리고 있었다. 오늘만큼 밤이 불안한 날이 또 언제였더라. ○○은 때 아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별 하나 없는 밤이 또 언제, 언제부터 있었더라. 내 최악의 불행은 17세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었나보다.
" 도대체, 왜 이래 …나한테? "
" 아, 그러다가 애라도 생기면 어쩌지. "
" 경수야. "
" 상관없나, 너는 좋아하지. 아니, 싫어했던가. "
" 야, 이 미친새끼야! "
" 그 새끼는 되고, 난 안돼? "
멍하게 제 할 말만 내뱉던 경수의 눈길이 다시 ○○과 맞닿았다. 다 아프고 못된 말이었는데, 마지막은 그 느낌이 유난히 달랐다. 중얼거림 같은 것 보다, 더 선명한 말이었다. 그건 진짜 ○○에게 던지는 강한 물음이었다. ○○의 눈길이 흔들렸다. 또 다시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경수가 다시 말했다. 그 새끼는 되고, 왜 난 안되는데.
" 가, 도경수. …가라고! "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날이었다. 경수는 그런 ○○의 말을 듣고 있다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리고 ○○의 입에 있던 담배를 뺏어 바로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가버렸다. ○○은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면 또 어두운 방이 저를 반길 것이고, 그 곳에서는 잠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잠이 들면 꿈을 꿀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악몽을 꿀 것이다. 정말 지독하고, 아픈 악몽을. 17세 때, ○○은 제 모든 악몽이 끝났을 것이라 여겼다. 다시는 나쁜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악몽을 꾸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 악몽은 말이다, 그러니까.
차가운 철금속에 의해 사라진 아기 같은 것. 내 뱃 속의 아이 같은 것이.
*
집 안이 망하고, 도망치듯 쫓겨나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던 날. 17세의 그 어느날, 늘 그렇듯 ○○은 악몽을 꿨다.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꿈이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날 ○○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방 안의 어둠이 자신을 삼킬 듯이 다가온다는 환상에 사로잡혔고, 그 길로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무작정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낡은 동네엔 가로등 하나도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그녀는 정신없이 상가가 많은 거리로 뛰어왔다. 그러다, 어떤 사람과 부딪혔다.
- ○○이? 너, ○○이 맞지?
평소에 서로를 마음에 품고있던 두 사람이 만났고, ○○은 그 곳에서 작은 별을 봤다고 이 날을 기억한다. 집으로 들어가면 어둠이 나를 삼킬거에요. 횡설수설하는 ○○을, 그 사람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품에서 떨어지고,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간절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한 번에 서술하기는 어려운, 미묘하고 긴장되고, 아름답고, 소중한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고, 그 사람은 원래 예정된 유학을 갔고 ○○은 남아서 확인하게 된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생리 이후,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나던 아이의 존재를.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털어놓은 사람이 경수였다. 웃으면서 무슨 일이냐 묻던 경수의 표정은, ○○이 입을 여는 순간부터 급격히 굳어갔다. 횡설수설, 정신없는 상태로 ○○에게 질문만 해대던 경수가 입을 다물게 된 것은 ○○의 대답 때문이었다.
- 낳고싶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집안은 무너졌고, 살아야 했다. 엄마를 살리고, 자신을 살려야 했다.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낳고싶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어쩌지, 경수야. 나 어떻게 해, 경수야. 그러면서 ○○이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경수는 멍한 상태에서도 그녀를 토닥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닥거리면서, 경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었다. 그래, 어떻게하지. 나는 어쩔까.
경수가 잘 아는 의사를 통해 아이는 없어졌다. 낙태는 불법이기 때문에, 어떤 죄의식 같은 것들이 병원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눌렀다. ○○은 구중에서도 불법이라는 것 이외에 제 아이를 없앤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경수는 이런 상황에 낙담했었다. 병원은 컸다. 큰 병원에 여러개의 과가 있었고, 두 사람은 산부인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움츠러들었다. 누가봐도 학생인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어른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는 아이들이 그 곳에 들어갔다. 많은 생각이, 감정이 피어오르는 시간이었다. 약으로 지우기에는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차가운 철금속이 직접 아이를 떼어내고 죽이는 수 밖에 없었다. 너희는 아이를 죽였단다.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들은 그런 말을 들은 사람처럼 밖으로 나왔다. 경수가 힘이 빠진 ○○을 부축하고, 그 가난한 동네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경수는
- 경수야.
그 ○○의 부름에 멈칫 굳어섰다가, 얼굴 한 번 쳐다보지않고 외면했다.
- 부르지마. 더러워.
*
○○은 오전 시간대에는 카페에서 일했다. 도경수를 비롯한,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 거리가 좀 있는 곳이었다. 점심 시간,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몰려드는 바쁜 시간대였다.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맞으시죠. 벨 울리면 이 쪽에서 찾아가시면 됩니다. 바로 앞에 있는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문을 받기 일 수 였다. 그런 그녀의 귀에 'S고'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녀가 소속되어있지만, 사실상 거의 나가지 않던 고등학교의 이름이었다.
- S고등학교에 가봐야 해. 찾아야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고 느낄 때 쯤, 그 사람이 바로 앞 주문대에 왔다. ○○은 습관적으로 '주문하시겠어요'라고 말했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 그리고 눈 앞에 있던 그 사람 역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 아, 찾았네 바로. "
" 아, "
" ○○아, …잘 지냈어? "
" …백현 오빠. "
17세, 그 날의 별이 어째서 ○○의 앞에 있는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
확인창에는 수험번호와 이름을 쓰라고 적혀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쓰고 엔터를 눌렀더니, 파란 글씨로 '합격'이라고 적혀있었다. 경수는 그 화면에 멍해졌다. 주위 친구들이 대신 소리를 지르며, 경수를 껴안거나 머리를 헝클였다. 축하해, 임마. 야, 도경수 일냈다. 미친, 이 새끼 대박이야. 어지러운 말들이 그의 주위를 멤돌았다. 후에 교무실에서 담임이 경수를 불렀다. 축하한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릴 만한 학교의 첫번째 합격자가 되었구나, 네가. 너는 네 미래를 위해서 좋은 대학에 합격했고, 이제 네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살면되겠구나. 선생은 뭔가 멋들어진 말을 자꾸만 갖다붙이며, 은근히 자신의 공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경수는 예의상, 선생님 감사해요, 덕분이에요 라고 덧붙였다. 그 것이 예의라는 것을, 선생님들이 원하는 말이라는 것을 경수는 알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누구나 느껴야하는, 기본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머리로, 이론적으로 알면 뭐할까. 경수는 사실 그런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미래를 위해서, 대학에 간다라.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는데, ○○ 생각이 났다. 기억해보니, 아까 합격을 확인하고 멍한 상태에서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이었던 것 같다.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벌써부터 칭찬했다. 그런데, ○○○은? 걔의 인생은, ○○의 삶은?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는 그 녀석한테 미래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궁금했다. ○○이 원했던 미래는 뭐였을까. 집 안이 망하고 난 뒤에, 아이를 낙태하고 난 뒤에, 그 애의 삶은 어떻게 변했지.
그런 수 많은 생각들이 합격 이상의 감정으로 경수를 짓눌러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툴렀던 소년은 깨달았다.
- ○○○이 보고싶다.
이 생각 내내 떠오르는 그 소녀의 존재를. 그가 지금 이 소녀를 자꾸 떠올리는 이유를. 보고싶다.
*
약사는 신경이 예민해지고, 잠이 못든다는 ○○의 말에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주었다. 조금 독한 약이야. 건강한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죽는다고 그런 건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정량만 먹도록 해. 젊은 학생이 고생이 많나보네. 쯔쯧 혀를 차면서 아주머니는 따뜻한 홍삼액 하나를 ○○의 손에 쥐어주었다. 집에 들어가서 약 먹을 틈이 있을까. ○○은 우선 물 없이 알약을 입에 넣었다. 물 없이 넘기기는 힘든 일이라, 입안에서 약이 슬슬 녹아내렸다. 알약 특유의 미끈하고 비린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렇게 가난한 동네에 발을 들여놓고, 언덕을 오르고, 또 골목을 만나고 만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엔 도경수가 서있었다.
" 오늘은 좀 일찍왔네. "
도경수는 며칠만에 왔다. 특별히 ○○이 경수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짜를 세고있던 자신을 알았다. 그렇지만 경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반갑지는 않았다. 17세 이후에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이 경수를 만나고 반가웠던 적이 있었을까. 오가는 것은 독하고 나쁜 말들 뿐이었다. 제대로 깎이지 않은 모난 돌 같은 말과 행동이 오갔었다. 그리고 ○○은 알았다. 사실은 알고있었다. 도경수가 참 많이 서툴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은 ○○도 그를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모처럼 약을 먹고,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을 날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을 경수가 뒤에서 붙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그 맞은편 벽 앞에 ○○을 앉히고, 저도 그 옆에 앉는 것이었다.
" 도경수. "
" 오늘 피곤하고 기분 좋다. "
" 경수, "
" 나 수시 합격했어. 수능 안 봐도 되는 전형. "
" 아,…. "
" 그래서 왔어. "
그리고 경수가 웃음지었다. ○○이 멍하게 그 웃음을 쳐다보았다. 신경안정제 효과가 벌써부터 나타나는 것 같았다. 온 몸의 긴장이 풀리고, 어쩐지 편안하고 나른한 것들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생각했다. 오랜만이다, 그런 웃음.
" 도경수, 하나만 해, 하나만. "
" 뭐가. "
" 미워할거면 제대로 미워해. 예전에 친구같은 감정으로 자꾸 걱정되고 챙겨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하나만 하라고. 너, 서툴러. 언제나. 내가 미워죽겠으면서, 그러면서도 예전에 정이 있다고 은근히 챙길거는 또 챙기잖아. 입으로 독한 말 나쁜 말 자꾸 내뱉으면서, 그러면서도 너 나 찾아오잖아.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너 엄청 바보같아, 도경수. "
쏟아지는 말에, 웃음과 함께 열려있던 경수의 입이 차츰 조용히 맞물렸다. ○○은 그런 경수를 보면서, 어쩐지 욱하는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노력했다.
알고있었다. 도경수가 저를 온전히 미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랜 친구사이라고 걱정하고, 챙기려는 그 뻔한, 가끔은 미련해보이기 까지하는 착한 마음이 보였다. 독한 말, 나쁜 말을 툭툭 내뱉어도, 진심으로 저를 미워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도 공존하는 그 어려운 마음 같은 것이 항상 느껴졌다. 그래서 답답했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다. 왜 우리 관계는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완전히 틀어진 것 보다, 이도저도 아닌 이런 관계가 더 어려웠다. 회복 가능성은 없고, 무의미한 희망 비슷한 것만 자꾸 주는. 병주고, 약 줄까말까 하는 모습 같은 것들. ○○은 그 모든 것들을 경수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 그러니까, 수시 합격했으면, 이런 날에는 친구나 부모님이랑 외식도 하면서 시간 보내라고. "
" 다, 틀렸는데. "
" 아니, 오히려 내가 너보다 더 잘, "
○○의 말이 막힌 것은, 그 전처럼 숨이 막혀서는 아니었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년은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어가려는 소녀를 보았다. 소년은 몸을 틀고, 고개를 살짝 틀고 소녀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두사람이 입술이 만났고, 소년은 더 다가섰다. 소녀는 놀란 눈을 깜빡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년을 알고 눈을 조용히 감았다. 소녀는 이 모든 것을 신경안정제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화를 내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소년은 소녀에게 저 나름대로 깊게 다가갔다. 평소의 그들의 대화처럼 서툴고 뭉툭한, 못난 입맞춤이었다. 서툴고 배려없고, 그렇지만 조금은 다정할지도 모르는 서로의 첫키스였다. 이윽고 입술이 멀어지고, 두 사람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소녀는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소년은 소녀를 보고 있었다.
" 너한테서 비린 맛나. 그, 약같은 맛. "
○○의 시선이 경수에게로 올라섰다. 두 사람의 눈길이 가까이서 만났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은 정신이 없었다.
" 나 수시합격했으니까, 이제 학교 안갈거야. "
" ……. "
" 이제 너 보러 올건데. "
" 도경수. "
" 하나만 하라고? 아까 네가 얘기한 거 중에서 할만한 거 없어. "
" 너, 방금 나한테, "
" 난 너 좋아하니까. "
소년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선명했다. 선명해서 빛이 날 정도였다. 소녀는 마치 별똥별이라도 가까이서 본 듯, 그 빛에 멍해졌다. 그러다, 17세 그 날에 자신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이 ○○을 외면했다. 그 꿈의 마지막 장면에는 도경수가 서있었다. 그리고 도경수, 네가 나를 외면했다. 17세 어느 날에 꿨던, 가장 끔찍한 악몽이었다.
소녀는 그것이 왜 가장 끔찍한 악몽일 수 밖에 없었던 가를 기억해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꼬밍이에요.ㅠㅠ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려나.ㅠㅠ
일정이 많이 바빠서 빨리 오고 싶었는데 못왔어요.
추석 연휴를 맞아서, 더 빨리 올리고 싶었는데 내용 구상 때문에 주말 늦게 올립니다.
그러고보니 3인칭이네요, 3인칭...하하
다음편은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상중하,로 될 것 같네요. 아마...)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ㅠㅠ
다들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주말동안 푹 쉬세요!
그리고, (소심소심) 댓글은 정말 큰 힘이에요.
일정 많이 바쁘고 힘들어도, 정말 댓글 달릴 때마다 힘내서 더 빨리오는게 있어ㅇ..ㅛ...(ㅎㅎ)
다들 읽어주셔서 감사하지만, 댓글도 함께 해주시면...(ㅎㅎㅎㅎ)
염치가 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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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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