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들은 자기 자신이 미성숙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교 안은 전쟁이다. 특히 그 끝자락에서 질주하다 잠시 멈춰섰을 때, 그들은 주위를 둘러본다. 이 즈음이면 앞서왔겠지?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헛물을 켜기 일쑤다. 어느 새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인물들은 등 뒤로 부쩍 다가와 있다. 살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다. 그렇게 이유 모를 전쟁에 한 걸음 내딛고 내딛으며 점차 원래의 순수를 잃어가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덜 여문 시기가 십대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모순으로 다가온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리고. 수없는 교사들의 채찍질에 어쩔 수 없이 쉴새없이 뛰다 보면 어느 새 고지에 도착해 있다. 그들은 생각한다. 이제 전부 끝났다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고, 모두는 본래의 신분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이제는 낙오자를 정하는 타임도 없어졌다. 살아남은 모두가 낙오자가 되었다. 십대는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이 싸움을 지속한 걸까?
의미 모를 전투가 끝나고 난 뒤의 폐허로 변한 전장은 다분히도 그들에게 공허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어지는 타락이 그들을 구렁텅이로 몰아간다.
현실이 이토록 잔인했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 뒤 기다리는 존재는 다름아닌 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낭떠러지로의 기약없는 추락이었다.
[카찬/백도/세루] 시계태엽 오렌지 01
시계태엽 00
아침을 차린 경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방학이 끝난 지금, 이제 막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일렀지만 등교까지는 이제 시간이 몇 남지 않았다. 가방을 다 챙겼는지 경수는 이내 통장에 있는 잔고를 확인한다. 꾹 다물린 입술이 비뚜름해진다. 잔고가 점점 줄어만 간다. 분명히 저번 학기에 장학금을 받아 모아뒀던 것으로 학비를 어느 정도 메꾸었는데도 그랬다. 한 달에 한번 통장으로 입금되는 양육비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집안의 수입원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경수는 병원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되어 애써 입술을 혀로 축인다. 삼년 전 급작스레 쓰러지신 이후 계속 심장 질환으로 입원중이신 경수의 어머니는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다 나빠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설상가상 형은 군대에 가 있고… 가계부를 뒤적거리던 경수가 말없이 예정되었던 자신의 보컬 수업 서너 개와, 동생 경우가 배우게 해달라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적어놓았던 피아노 수업에 엑스표를 쳤다. 경우에게는 미안했지만, 이 수밖에 없었다. 개학이 모레라고 했나, 아직까지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은우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경수가 이내 일곱시 사십오 분을 알리며 시끄럽게 째깍거리는 오래된 괘종시계를 한 번 쳐다본 뒤 곧바로 구닥다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께였다.
- 경수니?
" 네, 엄마. 저 오늘 개학이라서 학교 가려고요. 다녀오겠습니다. "
- 네가 고생이 많다. 엄마가 아파서 어쩌니. 어떻게든 너희들 대학까지는 다 보내고 죽어야 할 텐데..
" 에이..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엄마, 경우는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까 아무쪼록 몸조리 잘 하셔야 해요. "
- 그래, 우리 아들. 학교 늦겠다. 나중에 전화해.
뚝.
전화가 끊겼다. 경수는 이미 차려진 아침상을 덮개로 덮은 뒤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경수가 집을 나서려는 순간, 여덟 시를 가리키며 시끄럽게 째깍거리던 괘종시계 안 뻐꾸기가 나와서 울었다.
뻐꾹.
오래된 뻐꾸기에서는 쇳소리와도 비슷한 울음소리가 났다.
" 야, 변백현. "
" 왜. "
" 안 일어나냐? 오늘 개학이잖아. "
" 아, 맞아.. 오늘 개학이었나? "
" 몰랐어? "
나 다 했으니까 이제 너 써도 돼.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찬열이 감긴 수건을 빼고 머리를 툭툭 털었다. 무얼 하려는지 길쭉하고 슬림한 몸뚱이가 나시에 반바지 차림으로 둘이 살기에는 넓은 편인 고급 오피스텔 안을 거닌다. 옷장 앞에서야 멈춰선 걸음걸이는 이내 옷장 문을 열어젖힌다. 서둘러 제 교복을 찾는다고 열심인데, 묘하게 그 뒷덜미가 색정적이라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백현이 이윽고 의아한 눈빛을 한다. 방학 동안 자신이 알던 찬열과 조금 달라져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맸던 찬열의 머리카락이 어느 새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찬열의 머리 색을 뒤늦게야 알아챈 백현이 질문했다. 염색 새로했냐? 백현의 질문에 찬열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 몫의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교복 정도는 찾아 놓아야 했다. 찬열은 뭐든 곧잘 해내면서도 완벽주의자는 아니라서 꼭 무언가를 하나 둘씩 빠트리는 경향이 있었다. 며칠 전 입지 않아 구석에 두었던 제 몫의 교복과, 저 침대 밑에 쳐박혀 있다시피 했던 백현의 교복까지 전부 찾아 세탁기에 돌려놓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새 다려놓는 걸 깜빡 잊었다. 찬열이 한동안 옷장을 뒤지다가 겨우 찾아낸 춘추복은 차곡 차곡 접혀진 옷들 사이에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조금 구겨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온전한 몰골로 곱게 접혀 있어서 안심하며 어디 이상한 점은 없는지 대강 훑어보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백현의 한 마디에 멈칫한다.
" 닮아서 좋았는데. "
" 뭐가? "
" 아니, 그냥. 까맸잖아. "
네 머리, 별 미련을 두지 않고 던진 듯 했던 백현의 한 마디에 들어있는 뜻을 알아차린 건지, 아닌 건지 찬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시하며 꺼내든 셔츠의 주름을 펴내려 다리미를 찾으려는 찬열의 허리를 백현이 감싸안는다. 샤워나 해, 말하면서 한숨을 쉬던 찬열이 말해도 떨어지지 않는 백현을 바라보았다. 싫은데 역시나 대답은 제멋대로다. 재밌는 듯 미소를 짓는 백현과는 반대로 찬열은 희미하게나마 걸려있던 미소가 지워진다. 잠깐의 여유를 갖으려 탁상 위에 놓여진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 팔을 뻗었다. 익숙하게 필터를 물고, 불을 붙이는 모양새가 섹시하다. 나도 한 대 줘, 백현의 요청에 담배를 꺼내어 건네자 그제서야 백현이 찬열의 몸에서 떨어진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던 백현이 물었다.
" 대마는? "
" 안 가져왔어. 넌 과유불급을 잘 모르니까. "
" 너도 모르잖아. 아니야? "
" 난 적어도 선은 지켜. 너랑은 다르게. "
" 그건 위선이고. "
너도 과유불급 운운할 처지는 안 되잖아.
제대로 아픈 곳을 찌른 백현의 어투는 특유의 비꼬는 그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렇게 온화한 편도 아니었다. 찬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의 수긍이었다. 둘은 은근히 비슷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단지 스타일이 좀 다를 뿐, 늘상 한 걸음 앞에 가 있는 백현이나 두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찬열이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소울 메이트일지도 모르겠지만. 찬열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지금 이것은 동질감일까? 찬열의 연민이 담긴 시선이 잠깐동안 백현을 스쳐 지나간다. 어차피 똑같은 처지에 그렇게까지 물어뜯고 싸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 내가 위선이면, 너도 위선이야. "
"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
할 말은 해야 했다. 백현은 입술을 축이는 찬열의 손가락에 들린 필터 끝을 멍하니 쳐다본다. 찬열의 곧고 길게 뻗은 커다란 손가락은 마냥 가녀려 보이는 얼굴과는 전혀 다르다. 기타와 드럼을 쳐서 그런가, 커다란 손은 의외로 투박한 편이다. 그런 주제에 지금처럼 빙긋 웃는 얼굴이나 은근히 섬세한 성격을 보면 웃기기만 할 뿐이다. 커다란 키와 길쭉한 몸뚱이는 정반대의 얼굴과 같이 공존하고 있는데, 은근히 잘 맞아떨어지면서 묘한 매력이 있다. 사실, 누군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백현은 그가 그 누군가와 조금은 닮았다고 생각한다. 은근히 침착한 구석, 누군가를 잘 챙기는 태생적 기질. 백현은 다시, 어쩌면 찬열의 말과 같이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위선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울 메이트라는 허울 좋은 관계와는 달리 몸은 이미 제 선을 넘어 버렸다. 이것은 전적으로 백현의 뜻이 팔십 퍼센트는 반영되었다. 두 눈은 열심히 찬열과 누군가의 공통점을 찾는 데에 열심히다. 백현은 이내, 비수를 꽂는다. 이성보다는 제 본능에 극히 충실하다는 차이점이 백현과 찬열을 가로지르는 선이었다.
" 맞는 말이긴 한데, 한 번만 하고 가자. "
" 미쳤구나? "
" 별로. "
그리고 지금 너, 내 손아귀에 있잖아.
못 빠져나가, 백현은 항상 아픈 부분만 골라서 파내고 찌른다. 찬열은 이제서야 백현이 파낸 상처가 조금 아프다고 생각했다. 백현은 이제 거의 다 타들어가는 심지 끝처럼, 아직까지 채 아물지 않은 제 친구의 상처를 파내는 행위가, 찬열의 견고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양새가 제법 멋지다고 생각했다. 소울 메이트인 박찬열과 변백현의 관계에서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할퀴되 진정한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단점은.
" 넌 나 말고도 은근히 그 애랑도 닮은 구석이 있거든. "
" 그러니까. "
울어 봐, 경수야.
지나칠 정도로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것. 변백현은 이 관계에서 남은 이십 퍼센트가 박찬열이 원해서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십 퍼센트는 찬열이 백현에게 가지는 우정의 일부분이고, 미약한 결핍적 관계를 채워주는 하나의 요소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것을 변백현은 제대로 이용했다. 박찬열이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할 정도면, 적어도 윈윈 아닌가?
" 어서. "
" ……. "
야옹,
두 입술이 맞물린다.
그러나, 끝내 찬열은 이것이 절대 즐겁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익숙해져 버렸지만, 찬열은 제 나시를 벗겨내는 눈앞의 백현에게 안도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을 아름답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새벽이었다.
학교에 빨리 가야 하는데, 오늘도 가방 안에 들었을 무언가를 생각하던 찬열은 백현이 일부러 자신에게 가하는 느릿한 몸짓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째깍,
다섯 시를 알리는 초침 소리가 났다. 집 시계의 태엽이 고장나서 시계가 십분 정도 느린 것을 알지만 두 사람은 귀찮다는 이유로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째깍,
찬열은 눈을 감았다.
기형적이고 뒤틀린 지금은 자신에게는 어울리되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일이다.
공항 게이트에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가까운 곳으로 도착한 루한은 익숙하지 않은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시각은 이제 막 여덟 시 반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중국 땅은 넓다. 자신도 그 넓다는 북경에서 쭉 살았지만 막상 서울 한복판의 복작복작한 시내 위에 서자 영 길을 찾을 자신이 없어졌다. 설상가상 약도는 잃어버렸고, 룸메이트인 이씽은 모레나 온다고 했는데, 이전에 한국에서 잠깐 유학하던 시절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수업을 꾸준히 받긴 했지만, 지금 여기는 어학당과는 정 반대 방향인 것 같다. 어지럽게 스쳐가는 거리 한복판에 선 루한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굴 붙잡고 이야기해야 하나. 눈길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쁘게 좇는데, 막상 말을 걸 용기가 잘 안 난다. 한국어를 못하는 건 아닌데, 영 용기는 안 나고. 발만 동동 구르던 루한이 결국 제 옆을 지나가는 자기보다 조금 키가 큰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요!
" 네? "
" 아, 저, 그게요.. "
아니야.. 루한 됐어요. 다시 가세요.. 울상이 된 채 말을 잇지 못하다 기다리고만 있는 상대가 미안했는지 루한이 휘휘 팔을 저었다. 택시를 다시 타면 되겠지.. 급하게 와서 갖고온 돈은 거의 다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 있는데. 우선 학교부터 찾아야 할 텐데 통 보이지를 않는다. 휴우, 꽁해진 루한이 한숨을 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자신이 가라며 보낸 남자가 제 팔을 잡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대로 상대의 눈과 마주친다. 자세히 보니까, 제법 앳된 얼굴이다.
" 어디 가는 거에요? "
" 그게.. 학교 찾는데, 루한 지리 잘 몰라요. 서연예고랬는데.. 어? "
인터넷에서 본 교복이랑 똑같은 교복이다. 루한이 눈을 크게 깜빡이며 놀란 티를 내자 상대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거기 알아요. 지금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 툭툭 던지는 말투에서 조금은 온화한 기운이 묻어났다. 루한은 상대의 차림새를 자세히 살핀다. 사실 엉거주춤 걸쳐진 교복도, 대강 걷어올린 셔츠 소매도 그다지 모범생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루한은 아직 이 학교의 사정을 눈꼽만치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지금 앞의 이 사람이 어쩌면 신입생 대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루한의 팔을 아프지 않게 잡고 질질 끌었다. 루한은 생각했다. 교복은 내일쯤 맞춰야지.
옆모습을 보자 코가 오똑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순둥한 인상이었다. 왜 이런 차림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루한은 지금 제 앞에 있는 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가만히 질질 이끌려가던 루한이 이내 상대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걷고 또 걷는데, 얼마 못 가서 조금 으슥한 길이 나온다. 루한은 그제서야 자신이 길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아챘다. 이렇게 깊숙히 있는데, 게다가 이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도 몇 없다.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의구심을 품은 채 루한이 으슥한 길을 걸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
루한은 제 앞에서 따라 걷는 소년의 명찰을 흘깃 쳐다보았다. 오세훈, 이름이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학교가 나왔다. 다 왔어요, 운동장에서 팔을 놓아준 세훈이 등을 돌리려 하자 루한이 다급히 세훈을 잡았다. 저기요!
" 고, 고마워요. "
고마워요 세훈,
세훈이 호의가 담긴 루한의 인사를 보다가 자기도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서는 돌아서는데, 루한이 등을 돌려 정 반대 방향으로 걷는 상대의 팔에 나 있는 주사 자국 두세 개를 보고 멈칫했다. 어디 아픈가? 다친 건 아니겠지? 어렴풋이 이상한 조짐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고개를 도리질치며 지워낸다.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교무실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운동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홉 시. 수업에 늦을까 우려가 되어 서둘러 달음박질을 한다.
두 눈은 새로운 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빛나고 있었다.
세훈은 루한과 헤어지고 난 뒤 휴대폰을 꺼냈다. 입학식을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이 학교에서 룰은 곧 깨트리기 위한 존재라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수업이 곧 시작되는데도 사람들이 없어 텅텅 비어있는 교실 안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훈이 누군가의 번호를 찾더니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받은 존재는 묵직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 형이야? "
- 어, 이제 일어났어.
" 연락 할 시간이 없었어, 중국인을 도와줬거든. "
- 중국인? 그 온다는 교환 학생?
" 그런 거 같던데, 나도 잘 모르겠어. 학교 올 거야? "
- 글쎄, 어차피 가봤자 별 의미도 없을 거 같고.
" 어차피 제대로 연습할 곳은 여기밖에 없잖아. 별로 멀지도 않은데 오는 건 어때? "
- 좋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 글쎄, 우선 대마초랑…. "
코카인 좀, 금단 현상이 심하거든.
으슥한 구석인 학교를 등진 뒤에는 걸어서 이십오 분 거리로 빈민가가 있고, 거기서 십 분을 더 가서 좀 더 지나면 허름한 아파트 한 채와 그 옆에 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그로부터 차로 한 시간 거리로는 또 빈민가. 말도 안 되는 수도권 안 마약상들이 멀쩡히 판을 치는 희한한 장소였지만 학교가 망한 이후에는 그 누구도 아닌 학생들이 이 곳을 거의 뚫어둔 가게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인생도 버리고 미래도 버린 실패자들의 장소라 불리우는 헬게이트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말도 안 되는 범죄 소굴이 판 치는 그 빈민가에서 세훈은 비교적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세훈이 대담하게 상대에게 코카인을 부탁하자, 상대가 알았다고 수긍했다. 전화를 끊으려던 세훈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한 존재에 다시 상대에게 질문했다.
" 아, 연습실 안에 있는 건 어쩔 거야? 내가 확인할까? "
- 아니,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됐어. 끊는다.
" 어, 기다릴게. "
곧 끊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세훈이 주머니 안에는 금연껌 범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휴대폰을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문득, 머릿속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그 중국인이 맴돌았다.
세훈은 시계를 본다.
아홉시 십 분,
아직까지 세훈의 반 학생들은 오지 않는다.
종인은 실소했다.
근 반년 동안 주기적으로 자신에게 배달되는 믹스테잎은 입학식인 오늘조차도 탁상 위에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꼭 놓여지곤 했다. 종인이 케이스를 확인하더니, 그 안에 든 cd를 오디오 안에 넣었다. 저번에는 자작곡이더니 오늘은 쇼팽이다. 기본 베이스인 야상곡에 드럼 비트를 믹스해서 편곡한 노래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클래식을 리믹스한 것과 다름없는 cd 안의 음악은 분명 매력적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다듬어지고 정돈되어 있다. 전문적인 음악 작업은 종인에게 굉장히 생소한 존재였다. 사실 종인은 몹쓸 아마추어다. 제대로 편곡하는 작업도 잘 모른다. 그냥 음악을 들으면 몸이 움직였다. 그게 전부다. 좋은 곡조를 들으면 그것대로 몸을 허우적댔고 나쁜 곡조를 들으면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넌 몹쓸 아마추어야,
빈민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독설을 내뱉기 일쑤였던 학교에서 처음 몇달 간 종인을 지도했던 레슨 선생의 쓴소리는 크게 종인에게 영감거리가 되지 못했다. 종인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기 자신의 삶이 고루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굴곡 많은 인생에서 큼지막한 것들을 제외하면 영감거리는 좀처럼 없었고 종인은 십대답게 그다지 자제력이 강한 편이 못 되었다. 충동은 강했고 안도를 찾기 위해서는 약물이 필요했다. 빈민가에서 자라온 것처럼 종인의 굴곡은 전부 코카인을 비롯한 모든 마약과 섹스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종인은 때때로 자신과 고장난 태엽을 동일시하고는 했다. 건전지를 바꿔봤자 별 소용이 없는, 수리가 필요한 고장난 태엽 말이다. 태생적인 공허에 대한 치료법은 딱히 없었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좀 다른 점이 있었다. 물론 종인은 제 몸을 허우적대는 것으로 정신적 쾌락을 충족시켰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면 안에 남아있는 빈 속의 비중은 크고 넓었다. 마음을 제대로 주지 않아 곁에 붙어있는 존재들은 넘쳐났다. 정작 종인은 그 껀덕지들에 대해 별 상관도 쓰지 않았지만.
그러나, 종인은 최근 들어 그 견고한 내면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언제부터인가, 일년 전의 굵직한 사건 이후로 점점 제 본성은 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다는 듯이 늘 놓여져 있는 CD를 받고 나서부터 더욱 더 그 근본은 유해졌다. 육체적 쾌락도 사상적 변절도 아니었다. 조금씩 충동이 제 방향을 틀어 안정감을 하나 둘 되찾고 있었다. 대신 좀 이상한 부작용이 생겨났다. 이상하게 다른 노래보다, 이 노래에서 연습할 때에 더욱 몰입이 잘 되는 기현상이 생겼다. 종인은 간혹 이 드럼 비트가 자신의 영감 중 일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분히 상대를 배려하는 견고한 비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빨려든다는 감정을 느꼈던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적어도 이 곡에서만은 내가 몹쓸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인이 CD를 빼낸다. 케이스에 다시 그것을 넣어두고 누운 채 그가 누군가 하는 상상을 다시금 하여본다. 연습실 바닥에 누워서도 여러 번 동작을 연습하는 종인은 의외로 제법 순수한 영혼이었다. 온화한 성품은 아니었지만 태생이 거칠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태엽을 서서히 되돌려놓고 있는 존재 중 하나인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선율은 은근히 자신의 벽을 허물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누운 종인의 시선이 연습실 벽에 부착된 고장난 시계를 향한다.
지레짐작해서 열 시는 부쩍 넘었을 게 분명한데도 태엽의 문제 탓인지, 건전지 탓인지 여섯 시 반에서 그대로 멈춰있는 초침이 눈에 들어온다.
수리되어도 고쳐지지 않는 태엽,
그러나 알렉스¹가 치유되었던 것처럼, 태엽은 복원되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그 고장난 초침을 계속 응시하던 종인이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
째깍.
그 순간, 고장난 초침이 다시 재가동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계는 여섯 시 반에서 멈춰져 있었다.
¹ 원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