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찬열] 사신밀담 11
(부제: 폭탄선언)
" 야, 일어나. "
" 우음... "
" 야, 박찬열. "
일어나라고.
다 왔는데도 잠에 빠져있는 찬열을 보고 종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찬열을 깨웠다. 비몽사몽인 채로 잠이 깬 찬열이 쩍 하고 하
품을 했다. 존나 추하다. 종인이 놀리자 바로 두 눈이 가늘어졌지만 기분이 끔찍할 정도로 짜증나는 건 아니었다.
" 빨리 일어나, 거의 다 와간다고. "
" 아, 알았어.. "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 찬열이 샤워실로 들어갔다.
" 아, 그런데 루한. "
" 응? 왜 세훈. "
용궁 있잖아요.
세훈이 얼린 복숭아 여러 개를 으깨서 얼음을 동동 띄운 복숭아 화채를 다른 사신들과 함께 나누어 먹다 말을 꺼냈다. 옹기 종기
모여 앉아있는 열 명 모두가 아이스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루한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응, 용궁! 용왕 전하가 몇 살이셨죠? 올해로 이만구천 살 정도 되실걸?
준면이 얼린 복숭아가 든 아이스티를 쭉쭉 빨면서 대신 대답했다. 루한은 항상 되도 않은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을 말리는 우판
이 복숭아에 정신이 팔린 새에 루한은 넷북을 켜서 다른 사람들이 말려서 미처 보지 못한 더킹 투하츠를 키려고 했지만, 우판의
충직한 심복 중 하나였던 타오가 편하게 누워있는 이씽의 곁에서 부채를 부쳐주다가(이씽은 사실 찬열만큼 나이가 어리지 않았
다. 루한의 절친한 친구였고 고로 그의 나이는 구라였다.) 루한을 보고 곧바로 저지했기에 보지 못했다.
" 루한, 보지 마세요! 뚜이짱이 그랬다. 루한 그거 보면 안돼! "
" 왜? 루한 볼 거야! 루한 은시경 보고 싶어! "
넷북을 뺏어들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타오를 보고 루한이 세훈에게 떼를 썼다. 세훈, 루한 은시경 볼래. 보고 싶어. 타오한테서 넷
북 가져오면 안 돼? 안 된대요 루한, 루한 보면 안 돼요. 당황하며 루한을 달래는 세훈을 본 준면이 루한에게서 더킹은 get out이
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걸 본 우판은 준면에게도 네이트판을 좀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도 해도 너무 오글거
렸기 때문이다. 윤중간지왈이라는 이상한 닉네임은 또 뭐고..
" 루한 은신 좋아, 은신이 어떻게 되는지 봐야 한단 말이야. "
" 그래도 보면 정신건강에 해로워요. 막 총 나오잖아. "
" 루한 어린애 아냐! 루한 이천구백 살이야! "
" 루한 저번에 뿌리깊은 나무 볼 때도 나쁜 말 배웠잖아요. "
" 지, 지랄이 나쁜 말이야? "
" 그럼요. "
루한을 살살 달래는 세훈을 보고 우판은 애가 어른보다 낫구나, 하고 실소했다. 사실 루한은 좀 정신연령이 어린애같은 면도 있
긴 했다. 거기에도 슬픈 사연이 있었다. 루한은 환인의 막내아들이었지만 하필이면 황룡으로 태어나 예언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예언하는 신전 안에만 파묻혀 있어야 했다. 신전 안에서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던 와중 만났던 존재
가 이씽, 우판, 준면, 민석, 그리고 찬열이었다. 곧 자연스레 종인이 그 안에 합류하였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지만 찬열이 죽자
루한은 다시 반강제로 신전 안에서 세뇌당하다시피 했다. 그것도 루한이 선택한 것이었다. 찬열을 살려야 한다며 울지도 못하고
입술만 삐죽대던 루한을 차마 말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세훈을 잘 키워놓은 걸 보면 가끔 가다 정신연령이 어른으로 돌아가기
도 하는 모양이었다. 휴우, 한숨을 쉬는 우판은 찬열에게 전생의 기억을 말해줘야 하나 루한에게 의논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루한에게 우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바로 루한의 표정은 굳어졌다.
" 저기 루한, 우리 그냥 찬열에게 말하면 안되나 싶은데. "
" 안 돼. "
그거, 찬열한테도 종인한테도 못할 짓이야.
루한은 자꾸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낌새가 이상해. 가끔 이래. 상은 이미 잠든 지 오래 되었는데 루
한은 최근 들어 불안한 얼굴을 하다 고개를 젓곤 했다. 설마 상이 살아있나?
에이, 그럴 리가.
우판이 복숭아 아이스티를 빨대로 쭉쭉 빨았다. 이씽이 온갓 멋을 다 내려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우판을 비웃었다.
여전히 은시경이 보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루한을 보던 민석이 단 한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다.
" 야, 은시경 죽었는데? "
" 응..? "
" 총 맞아 뒤졌어, 그대로 끽. "
세훈은 1초(의 시간이 얼마나 긴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뒤 곧바로 울려퍼지는 루한의 울음을 다시 달래며 용궁에 있을
두 사람을 생각했다.
"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하신데..종인이 형 그 성격으로 잘 버텨낼 수나 있을까.. "
루한이 울음을 그친 것은 경수와 함께 아이스티 만들기를 돕고 있던 신수들이 다시 아이스티를 가져온 다음이었다.
그리고,
" 저어.. "
" ……. "
" ……. "
세훈의 우려대로 찬열은 현재의 상황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상황이 말도 못하게 뻘쭘했다. 할아버님과 김종인의 팽팽한 분위
기에 차마 끼어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꿇은 무릎과 두 발이 점점 저려왔다. 용궁은 말도 못하게 화려했다. 꼭 진짜 드라마 세트
장을 보는 느낌이랄까. 옥으로 되어있는 멋진 소파에 앉아있는 용왕님은 동화 속 용왕답게 긴 수염을 멋지게 늘이고 있었건만 성
격은 안타깝게도 영감님답게 괴팍하신 모양이었다. 하긴, 동화책 토끼와 간에도 용왕님은 찌질하시더라.
" … 그래서, 네 놈은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을 꺼낸 용왕님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뭔가 기류가 이상했다. 찬열은 종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야, 안
돼! 그러던가 말던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비웃는 종인을 보고 찬열은 완전히 게임 끝이라고 절규했다. 도대체 쟤는 얼마나 패
드립을 시전할 예정인가.
" 용왕님께 끼쳤던 명예 실추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
" 허! 그럼, 네 놈이 용궁에 저지른 죄목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고? "
" 저는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잘못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전하께서 억지를 부리시는 거겠죠. "
" 아니,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
제대로 화가 난 얼굴의 용왕이 종인의 뺨을 때리자 찬열은 정신이 확 깨었다. 안돼! 나름대로 찬열은 종인을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폭력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틀 전 나름 빚도 졌으니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 요, 용왕님. 그만하세요! "
" 어허, 무엄하다! "
" 아무리 그래도 얘 아직 어리잖아요. 열 아홉밖에 안 됐는데! "
" 어딜 감히 전하께 큰소리야! "
" 진짜 그건 아니에요.. 때리는 건 정말 아니잖아요.. "
그리고, 용왕의 화를 묵묵히 받아내는 종인의 표정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여서.
말하고 나서야 조금 후회한 찬열이 데록데록 눈알을 굴렸다.
용왕의 심복으로 보이는 도미가 찬열이 주작인 줄 모르고 쩌렁쩌렁 호령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찬열이 썩 못마땅한지 용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누군데 이 곳으로 왔느냐? 초면에 반말을 하는 도미를 보고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그럼 자신도 예
의 빵점이 되는지라 찬열은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 저는 주작입니다. 이름은 박찬열이구요. "
" …아니, 주작이 이 곳에는 어쩐 일로? "
" 어쩌다 보니 같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좀 일이 있어서.. "
" 허나 어찌 그대가 청룡을 감싸는지 듣고 싶네만, 청룡과는 무슨 관곈가? "
찬열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무어라 말하기도 뭐하고, 사실대로 말하면 또 자신을 의심할 테고. 다리는 저리고,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고. 패닉에 빠진 찬열을 종인이 애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야 그냥 넘겨. 그렇게 입모양으로 말하는데 이렇게 된 상황이
나름 자기한테 좀 부끄럽기도 한 모양인지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찬열은 불행히도 입모양을 읽었지만 용왕의 꼬장꼬장하고 무
서운 눈빛에 겁에 질렸고, 결국 말도 안되는 답변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 저, 저희가 깊은 관계라서요! "
" … 뭐라? "
" ……야. "
" 그냥 그렇게 됐어요! 하하하... "
폭탄 발언과 함께 찬열은 애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종인을 바라보았지만, 종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
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핑계가 엄청난 결과로 되돌아올 줄 둘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야. "
" 왜. "
" 나 미쳤나봐.. "
어쩌자고 그렇게 말했냐고.. 망연자실한 표정의 찬열이 제 얼굴을 침대 매트릭스에 파묻고 절규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말하랬
냐? 종인은 여전히 무표정인 그대로 찬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찬열은 아까를 생각하면 아주 몸이 다 떨렸다. 갑자기 온화한 표정
을 짓던 용왕이 무언가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던 한 마디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 우리 손주며느리가 왔구나!
" 너 용왕님 손자냐? "
" 명목상으로는. "
" 아 진짜 내가 미쳤지! "
" 병신. "
" 형이라고 부르랬지! "
" 내가 왜? "
짧고 굵은 종인의 한 마디가 원망스러웠지만 찬열은 이내 울상을 지었다. 아 진짜 이 오해 어떻게 풀어야 해? 나도 모르지. 종인
이 어깨를 으쓱하자 찬열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종인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지만, 찬열
이 이렇게 절규하는 모습을 보자 딱히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다채로운 표정이 자신의 놀림에 절규하는 모습은 매
우 웃기면서도 간만에 흥미로운 모습이었으므로.
" 아, 어쨌건 이 침대 위로 올라오면 죽는다. "
" 내가 할 소리인데. "
" 야! "
" 존나 떽떽거려 진짜.. "
" 그, 그러니까 넌 왜 할아버님께 패드립을 치고 그러냐! 나이도 많으신데 고혈압으로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
"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은데. "
" 너 하는 말만 봐서는 영락없는 패륜아거든요? "
물론 전후사정 모르고 툭툭 내뱉는 말들은 종인을 발끈하게 만들지만.
종인은 며칠 전 자신이 찬열에게 어깨를 빌려준 일을 조금이나마 후회했다. 아주 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나름대
로 찬열의 심정에 감화되었달까, 그래도 가끔 가다 툭툭 던지는 말이 꽤나 뼈아파서, 발끈한 종인이 자신도 빈정거리는 어투로
툭 던졌다.
" 그럼 그 패륜아 감싸주신 그쪽 저의는 뭔데? "
" 무, 뭐? "
" 감싸줬잖아, 얘 아직 어려요. 이러면서. "
왜 그랬냐고.
종인은 사실 찬열을 자극하기 위해 그 말을 한 것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물론 예상은 하고 있
었다. 쓸데없는 동정심이라던가 그런 부류의 것이 분명했지만서도, 저 오지라퍼를 옹호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종인의 성격이 워
낙 모나서 그런가?
하지만, 뜻밖의 답변을 들은 종인은 이내 멍하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 부당해 보여서. "
" 뭐? "
" 네가 뺨 맞는 거,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
어쨌든 나 씻을 거니까, 나가 있던가 해. 창문 열어둬!
멍해진 표정의 종인을 뒤로 한 채 찬열이 수건과 속옷거지를 들고 욕실 안으로 쌩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종인은 한동안 멍
한 표정 그대로 멈춰 있었다. 사고 능력이 잠시간 정지되었다가, 이내 마른 세수를 한다. 한 번을 하고, 두 번을 하고 계속 해도
쉽사리 하얘진 머릿속은 채워지지 않는다. 더불어, 뭔가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심장도.
" 아 씨발.. "
종인이 뜻대로 안 풀리는 제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말도 안 된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견고한 제 이성을 흔들어 놓다니, 자신도 박찬열 때문에 미친 게 분명했다.
종인은 마른 세수를 하다가, 절규를 하다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하는 바보짓을 한동안 반복했다. 찬열이 샤워
를 다 끝내고 나올 때까지.
그렇게, 종인은 아직 미약하게나마 뛰는 제 심장을 아직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뭐 이런 쓰레기가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연금복권 당첨자 폰 알림창 상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