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시초는 그랬다.
1942年의 7월 중순은 유독 더웠다. 좀처럼 더위를 타지 않는 종인조차 막연히 더위를 느낄 정도였으니, 알 만 했다. 긴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방문객의 짐꾸러미가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종인은 후덥지근한 날씨 아래서 짐가방에 가득 쌓인 먼지를 털어내다, 문득 눈앞의 풍경을 무심히 훑었다. 초원의 싱그러운 내음이 코끝에 훅 스쳐왔다. 눈앞은 온통 풀숲이었다. 그 잡초 더미들부터, 저 위의 산지까지 모든 부분이 전부 다 초록빛이었다. 다채로운 빛깔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굳이 다른 색을 꼽자면, 풀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갈빛의 곧게 뻗은 나뭇가지가 다였다.
종인은 본래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은 꼭 오년 만이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어 이 산지까지 온 영문은 아내가 위급하니 속히 와보라며 연통을 넣었던 장인의 전보 한 장에서였다. 이름뿐인 양반가에서의 구실좋은 정혼에 종인은 딱히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내는 절음발이였고, 종인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잦은 병치레로 아이를 낳지 못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모두가 염려하는 혼인을 기어코 성사시킨 장인은 부친의 절친한 친우였다. 일찌감치 혼기가 지난 절음발이 처녀를 아내로 얻는다며 주변에서도 말들이 많았던 혼인이었지만, 정작 장인은 썩 흡족한 기색이었다.
기실, 종인은 아내의 얼굴을 열일곱 살이 될 적까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도피하듯 떠났던 열넷의 어느 봄날에도 그랬다. 넉 달 남짓을 이 산촌에서 보내고 성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공부를 핑계로 도망치듯 경성으로 떠났던 자신을 생각하면 결코 정당하지 못한 도피였으나, 본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내를 같이 경성으로 보내자는 설득에도 자신의 학문이 우선이라며 뜻을 우격다짐하다시피 하던 장인의 입장 때문에 난색을 표하던 양친의 모습과, 끝내 제 입장을 굽히지 않던 장인을 기억한다. 열일곱이 되던 해 늦봄에 양친의 권유로 저가 홀로 묵던 경성의 자취방에 아내를 들려보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두 남녀는 이미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단지 부부란 사실을 입증해줄 단서는 혼인날 서로 나눠낀 비취 가락지 뿐이었다.
불이 꺼졌다. 숙인 고개를 들게 하자 둥그런 얼굴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수심어린 얼굴빛에 연민이 들었다. 저를 용서치 마세요, 조용히 제 치부를 토설하기 시작하는 젊은 여인을 종인은 굳이 막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날이 밝자마자 급작스레 나타나 아내를 강제로 끌다시피 해서 돌아가던 장인을 마지막으로, 종인은 그 이후로 아내의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남루한 행색, 학업을 중단하고 막 돌아와서였는지는 몰라도 종인의 옷차림은 굳이 말하자면, 오년 전의 그날보다는 상대적으로 남루했다. 크게 격식을 차린 편은 아니었다. 그저 흰 셔츠에 간단히 바지를 걸친 것이 다였다. 타이조차도 매지 않았다. 종인은 문득 그 날의 제 차림을 회상했다. 몸에 맞지도 않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열차를 탔던 지난날이다.
종인은 딱히 처가에 신뢰가 없었다. 장인의 목적이 그 당시 열넷이었던 자신의 눈에도 빤히 보여서이기도 했다. 혼삿날 보았던 장인의 후처도 매한가지였다. 온갖 비취 장식으로 몸을 꾸몄던 후처는 장인보다 퍽 어린 기색이었다. 기억대로라면 그 당시에는 갓난쟁이 아들이 있었다. 필시, 만석꾼으로 유명한 부친의 재물을 노리고 그런 일을 벌였을 것이 뻔했다.
- 연硏이 열과 함께 위독하다
열과 함께 위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날 자신의 뇌리에 누군가가 깊게 새겨졌던 요인은 무엇이었던가?
종인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오년 전의 기억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종인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을에서의 일화를 되살리게 만드는 장본인이었다. 맨 처음은 종인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제 앞길을 가로막은 길게 쭉 뻗은 몸 위로 흰 적삼과 바지 저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곧, 마른 팔이 제 옷깃을 잡아왔다.
- 너야, 누이와 혼인한다는 사람이?
- 찬열아.
초면인 이에게서 느껴지는 적의감 어린 시선이 달갑지 않다고 생각했다. 둥그런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종인을 보는 얼굴과 목이 촌사람 답지않게 마냥 희었다. 열아, 말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고 그 이름만이 웅웅대며 남았다. 열아, 열이, 찬열… 종인은 문득 생판 초면에 이런 태도를 보인 그가 조금이지만 고까워졌다.
" 그렇다면? "
언짢아진 속내를 뒤로 하며 맞받아쳤지만, 어딘지 모르게 뒤끝이 허전했다.
그리고 곧이어 고개를 들자 마주한 얼굴에, 종인은 멍해졌다. 어느 새 적의감이 말끔히 사라진 맑은 미소만이 있었다.
- 열넷같지 않게 생겼어.
- 완전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샐쭉히 웃어주는 얼굴이 고왔다.
적어도, 열넷의 종인은 찬열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종인은 열아홉이다.
지금도, 경성에서 조기 입학으로 학교를 한창 다니다 내려온 것이었다. 실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공부에 흥미를 잃어 신식 문학을 독파하는 데에 신경을 집중하기 일쑤였지만, 어쨌건 성적은 썩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장인의 전갈을 받고 내려온 것이다. 문득 종인은 저가 밟고 있는 산지를 보았다. 이것조차 장인의 것이다. 이 산촌의 땅덩어리 중 절반이 장인의 소유라고 들었다. 그중 절반은 양친이 며느리 몫으로 준 혼례 비용이었다. 종인은 거의 반쯤은 팔아넘겨진 제 신세에 자조하며 줄곧 앞을 향해 걸었다. 예전에 찬열과 함께 거닐었던 풀숲들과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곳에 머물렀던 넉달 동안 찬열은 줄곧 저를 데리고 이 산촌 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계속 이어지던 걸음은 결국 찬열이 제 옆에서 누워 잠을 취하던 외진 느티나무에서 멈칫했다. 종인은 그것을 쓰다듬었다.
종인아, 누군가 보고싶을 때는 이 나무 아래서 백 번만 세면 소중한 사람이 나타난대. 열여섯의 찬열이 속삭이듯 말한 전설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더 없이 어리석다고 생각한 종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뜻, 떠나기 전날 새벽의 해괴한 일화가 떠올랐다.
마음에도 없는 혼인에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설쳐 밖으로 나왔던 열넷의 종인은 열여섯의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그가 물어뜯은 혀 부근이 여전히 쓰라렸다. 아물기나 했을까? 아까 전 잠자리에 들면서 양치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피만 멈췄을 뿐 아물지 않았던 혀끝이 알딸딸했다. 짧은 풋정이 그만큼 쓰고 달았다. 저를 보는 상대의 표정이 우스워 피식 웃어내자 상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진다.
" 나, 내일 떠나. "
" ……. "
종인은 눈을 나직히 내리깔았다. 날이 선 둥그런 두 눈이 아내와 닮으면서도 달랐다. 열여섯의 처남은 열넷의 자신보다 한참이나 키가 컸다. 올려다보자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의 시선에 물기가 가득 차올라 있다. 본래부터 찬열은 별스럽게 눈물이 많았다.
" … 누이를 사랑할 순 없어? "
찬열은 아내와 꽤나 의좋은 남매였다. 종인도 모르지 않는 사실이었다. 맨 처음의 그것이 부러 자신을 떠보기 위해서 수를 짜낸 것이라는 것도, 종인이 아내와 혼인하여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미래를 꿈꾼다는 것도, 종인은 절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러 찬열의 당부를 이렇게까지 거역하는 이유는.
" 나는 사랑할 수 없어. "
나는 너를 사랑하거든.
종인은 열넷이었다. 어줍잖은 풋정에 이끌려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된 건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아물지 않은 혀가 마냥 따갑고 쓰린 것을 보면 그것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지독한 애정이었다. 풋내나는 열넷에게 싹튼 애정은 달갑기도 했지만, 그 상대가 다름아닌 처남이라는 점은 달갑지 못한 사실이었다.
" … 나쁜 자식.. "
찬열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종인의 혀를 물어뜯었을 적처럼 다시 종인이 입맞췄기 때문이었다. 찬열은 이번에는 혀를 깨물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단지 멍하게 그것을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 보고 싶으면 편지해줘, 되는 날마다 보낼 테니까.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종인은 돌아섰다.
아직까지 덜 여문 풋정이었다. 찬열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할지, 겁부터 났다. 그렇게 종인은 등을 돌려 도망쳤다. 몇 년간의 자취 생활에도 반복되는 몽정과 오지 않는 편지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찬열에 대한 애정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풋정은 현재까지 연장선이다. 종인이 아직까지 찬열을 애정한다는 증거이다. 결국 그것은 더 이상 풋정이 아니게 되었다. 종인은 이제 어린 시절보다 그 기세가 한결 위축된 느티나무의 가지를 매만지다, 이제 더는 믿지 않는 찬열의 그 한 마디가 뇌리에 스쳤다. 그 날도 느티나무 아래였다. 흰 손목이 가지를 매만지다 종인이 다가서자 새하얗게 웃었다. 종인아, 어? 전설이 있어. 소곤거리며 무슨 비밀을 이야기하듯 종인의 귀에 속살거리던 상황이 지금 봐도 우스웠다. 더욱 우스웠던 점은, 그 때의 종인은 고작 제 귓가에 닿는 찬열의 숨결 하나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 누가 보고싶을 때, 이 나무에서 백 번을 세면…
" 하나, 둘… "
셋, 넷.
비록 그 말도 안 되는 전설 따위를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자신도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종인은 눈앞에 펼쳐진 푸른 오솔길을 본다. 낯익은 길이다. 이 길로 계속 내려간다면, 처가가 있을 테였다. 그러나 아직은 가고 싶지 않다. 옹졸한 마음은 여전했다. 부러 백을 세면서도 조바심이 난다.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아는데도, 중간에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서른여섯, 서른일곱.
여든하나, 여든둘.
이미 반쯤은 염두하지 않고 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할 수록 조바심이 커졌다. 수신자를 숨긴 채 간간히 보냈던 제 편지에 왜 단 한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는지, 왜 찬열이 끝내 자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는지.
아흔여덟, 아흔아홉.
그러던 와중, 귓가에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 누구.. "
" …흐으..아,어,살,살려,어,아,아프,아,흐… "
백,
종인아.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여전히 물기 가득한 상대의 눈과 메마른 종인의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상대의 볼에 맺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꺽꺽대는 울음소리마저 났다.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차림새도, 얼굴도 맞았는지 잔뜩 부어오르고 생채기와 멍자국으로 엉망이었지만 마주한 존재는 분명히 찬열이었다. 그저 얼굴이 조금 변했을 뿐이다. 둥그런 눈도 뾰족한 두 귀도 저보다 큰 키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 그가, 제 앞에서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종인은 한동안 멍하게 찬열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찬열의 얼굴도 멍해졌다. 종인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둘은 한동안 그러고 서 있다가, 저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종인이 황급히 찬열의 손을 이끌어 뛰었다. 장인의 후처였다.
- 밥만 축내는 것이 어딜 도망가!
찬열은 여전히 실감을 못했는지 울음을 삼키며 종인을 따라 뛰던 와중, 다시 마주친 얼굴에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표정이 멍해졌다. 종인을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을 종인이 다시 이끌었다. 둘은 그렇게, 주고 받는 말 한마디 없이 근처의 자그마한 동굴까지 줄곧 뛰기만 했다.
" 끄흑,끅,이,이,인아.. "
" 쉿. "
동굴 안에서 훌쩍이는 찬열에게 종인이 들키지 않게 부러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기척이 사라졌다.
문득,
종인은 수년 전 그가 잡아뜯은 제 혀가 다시금 아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카이/찬열] 개망초
(부제 : 망초亡草¹)
¹망초 - 외래종 귀화식물. 일제강점기 시대에 유입되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망초가 되었다.
즉 망초의 뜻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풀. 그 종류 중 하나인 개망초의 접두사 개는 개살구의 '개'와 같은 뜻. 그러니까 망초보다 못한 풀이라는 뜻
추적 추적 비가 내렸다.
울음을 멈춘 찬열은 동굴 안에서 말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용모는 그대로였지만 조금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이전보다 흐리멍텅하고 어딘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종인이 찬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커다란 키와는 다르게, 여전히 갸날픈 얼굴이 눈에 띄었다.
" 맞은 거야? "
대답이 없다. 멍울이 가득하고 부어오른 얼굴을 대강이나마 치료해주고 싶지만 짐가방을 전부 느티나무 밑에 두고 왔다. 오 년만에 만난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기만 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찬열은 연신 제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결국 이 침묵을 참지 못한 종인이 찬열에게 먼저 다가가 질문했다.
" 나 몰라? "
연신 눈만 끔뻑거리던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아,나, 종인이 알아아…. 맑게 웃는 웃음은 그대로였다. 종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아내와 똑같아 미간을 찡그리자 살살 제 눈치를 봐온다. 고개 들어. 이전보다 변한 목소리가 무서운지 훌쩍대며 고개를 들어오는데 그게 꼭 낑낑대는 강아지 같다.
" 왜 답장 안 했어. "
" …몰라아,나,몰라. "
편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얼굴을 확 굳히는 찬열을 종인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제 시선을 피하기만 한다. 모호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인이 찬열의 턱을 들어 고개를 억지로 숙이지 못하게 하고 줄곧 시선을 마주하자 찬열의 시야가 어디로 갈 지를 모르겠다는 듯 허공으로 향했다. 언뜻 귓가에 발그레한 홍조가 돈 것 같기도 했지만, 종인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추위에 덜덜 떠는 찬열에게 제 와이셔츠를 벗어다 덮어주자, 찬열이 종인의 시선을 더욱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소낙비가 그치자, 종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동굴에서 나와 잔뜩 젖은 제 짐가방들을 느티나무서 들고 찬열과 함께 처가로 내려왔다.
찬열과 자신은 오 년 전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동굴 앞에서부터 풀밭 사이사이까지 가득 핀 망초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장인의 말은 그랬다.
처남과 같이 열병에 걸린 아내가 백치가 되어 두어달 전 떠돌이 사냥꾼에게 보쌈당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종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믿을 리가 없었지만, 애써 침착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부친에 의해 이 산촌을 장악하다시피 한 장인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이를 부득 간 종인이 가만히 듣고만 있다 그만 일어나보라는 장인의 한 마디를 보기 좋게 끊었다.
" 어르신. "
- 무슨 일인가, 김 서방.
" 처妻가 난임難姙이라는 사실을 왜 말해주지 않으셨습니까? "
-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모르는 일이네만.
" 그이가 자취방에 찾아와 그러더군요. 어린 시절 열병을 크게 앓은 이후로 몸이 맑지 못하다 실토하기에,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
표정없는 종인이 가볍게 받아치자 당황감에 물든 장인의 얼굴이 종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 자신을 경성으로 다시 쫓아내려는 작정이었을 테지. 그러나 종인은 이미 약점을 잡은 이상 한동안 이 산촌에서 머물기로 작정했다. 찬열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아내가 왜 사라졌는지, 그리고 어째서 찬열은 맞고 있는 건지 파헤쳐야만 했다.
" 당분간은 이 곳에서 지낼 작정입니다. 휴학계를 내고 찾아온 길이라, 갈 곳이 없어서요. "
맥이 빠진 장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종인이 그만 가 보라는 말에 허리를 숙이며 일어섰다. 자취방이 멀쩡하게 있었지만 부러 거짓을 말한 이유는 최소한의 약점마저 잡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랑채에서 벗어나 짐을 푼 손님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종인의 시야에 저 별당 앞의 툇마루가 눈에 비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앞에서 다섯 살 남짓해 보이는 젖먹이에게 맥없이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찬열이 비쳤다.
인상을 찡그린 종인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어째서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러는지는 저 자신도 알지 못할 따름이지만, 분명했던 것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는 점이다. 성큼 성큼 걸으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옮기자,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멀어서 잘 들리지 않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종인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 병신, 병신! 미쳐서 피하지두 못하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가장 끔찍했던 점이라면, 찬열은 미처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흐느끼고만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발끈한 종인이 저도 모르게 달음박질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제 이마 부근으로 날아온 돌맹이 서너 개가 그대로 부딪혔다. 찬열이 겁을 먹었는지 헉, 하는 소리를 낸다. 어린것이 움찔 하는 모양새가 보였다. 속내에서 시꺼먼 무언가가 끓어 올랐다. 제 앞에서 흐느끼는 찬열의 눈물을 보자 더 화가 치밀었다. 서늘한 눈초리로 아이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였다.
" 네가 이랬더냐? "
- 그런…데요?
말없이 바라보자 짐짓 무서웠는지 마구 울며 악을 쓴다. 미친 년! 미친 년! 소리치며 엉엉 우는 어린것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안채에서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정貞아! 목소리는 분명 장인의 후처렷다. 찬열의 몸이 얼핏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종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흥미어린 눈길의 후처와 무감각한 종인의 시선이 서로 맞부딪혔다. 그녀가 건성으로 종인에게 사과했다.
- 어린 것이 그저 장난을 친 것 뿐이니, 용서해 주게나.
그러나,
멍청한 것이 밥값이나 축내고…. 작게 뇌까리는 카랑카랑한 목청을 종인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종인은 더 이상 사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울음을 삼키는 찬열의 입술이 잔뜩 깨물려서 핏방울이 맺혔다. 딱지가 터진 것을 보아하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절로 욕지기가 입가로 샜지만, 반쯤은 억지로 참아냈다.
" 가자. "
" 이,인아. 그,그치만.. "
" 가자고. "
망설이는 찬열의 팔을 끌었다. 종인은 지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의 원흉들을 버러지 보는 것마냥 서늘하게 쳐다보다, 결국에는 무작정 찬열과 함께 처가를 빠져나와 저 위 산지 부근으로 나가 버렸다.
찬열은 연신 놓아달라는 듯이 팔을 비틀었지만, 종인은 놓아주지 않았다. 표정을 굳히고 한 걸음 두 걸음 산을 올랐다.
하늘은 이제 비가 막 그쳐서인지 희끄무레한 빛을 띄고 있었다. 산지 중턱에 올라서자 망초꽃이 만발한 전경이 펼쳐졌다. 장인이 오년 전 사람을 시켜다 산지 전체에다가 뿌렸던 것들이 결실을 틔운 것이다. 망초꽃이 가득한 풀밭을 밟고 선 종인이 그제서야 손을 놓아 주었다.
" 화도 안 나냐? "
" ……. "
" 당하고만 있으니 좋았어? "
" 흐윽… "
훌쩍이기만 하던 찬열이 결국 종인의 앞에서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우는 얼굴을 보자 또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질책은 이쯤 하고 돌팔매에 맞은 상처를 보기로 했다. 가뜩이나 멍울로 얼룩진 얼굴이 돌팔매에 맞아 잔뜩 찢기고 생채기가 났다. 갈아입은 옷의 주머니를 뒤지자 자그마한 연고가 나왔다. 가까운 약숫물이 나오는 쪽으로 찬열을 이끌어 세수하게 한 뒤 찢겨진 상처 부근에 그것을 발라 주자 차차 울음이 그친다.
" 조,종인아. "
" 왜. "
" 너,너도 상처 나,났는데.. "
" 나는 됐어. "
그,그치만 피 나아, 울상인 얼굴이 손에 들려있던 연고를 뺏어 종인의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이 나쁘지 않다. 간만에 시선을 피하지 않길래 빤히 쳐다보았더니 다시 얼굴빛이 변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몸짓이 얄궂다. 제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아쉬워진다. 내가 싫어? 종인이 작게 물음을 던졌지만 역시나 찬열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종인은 괜시리 밑에 깔린 망초꽃들을 지근지근 밟기만 했다. 망조가 들어도 꽃은 꽃이라고 달큰한 향이 퍼졌다. 오년 전 망초를 처음 이 산촌에 들였을 때는 이제 막 종인이 산촌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늦겨울이었다. 친일파였던 장인은 어느 날 갑자기 이것들을 일본의 '케이 상'이라는 흔해빠진 장사치에게서 잔뜩 사들인 뒤 그것을 아름답던 산촌 전체에다 모조리 심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개보다 못한 풀을 말이다. 종자가 장인의 소유인 산천에 가득 퍼지는 것을 자신과 찬열은 그저 지켜만 보아야 했다.
- 안 심었으면 좋겠는데….
심어진 종자를 보던 찬열이 울상을 지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어째서 아버지는 이것을 심으려 하실까? 의아스런 눈초리는 종인에게도 찬열에게도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목적은 초봄에서야 밝혀졌다. 개망초와 달리, 망초는 억세고 단단해 농사를 흉작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울부짖는 농민들의 땅덩어리를 잘도 사들이던 장인의 모습에, 저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며 찬열이 제 곁에서 몸을 떨던 것도 같았다.
종인은 회상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아름답던 산촌이 전부 다 망초 범벅이 되어 버렸다. 달큰한 향에, 기분이 다시 불쾌해졌다.
" 흐흐흐, 계란꽃이다. 흐히히.. "
그런 망초꽃을 계란꽃이라며 좋아하는 지금의 찬열은 벌써 한 아름이나 망초꽃을 따고 있었다. 괴랄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팔랑팔랑 뛰어다니는데, 엇, 아니나 다를까 휘청하는 몸을 종인이 그대로 일어서서 잡아주었다.
넘어지려는 몸을 어깨를 잡아 지탱하자 찬열의 두 동그란 눈이 아주 크게 뜨였다. 미끄러지면서 찬열이 갖고 놀던 망초꽃들이 둘 사이의 허공에 폴폴 날렸다.
다시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찬열의 두 동공이 올바른 빛을 띄고 있다. 잠시나마 정신이 돌아왔나?
" 아…. "
" 김..종인…? "
초점이 뚜렷했다. 망초다, 자그맣게 말하는 목소리도 어눌하던 다른 때와 달리 정상적이다. 이로서 장인이 말했던, 찬열이 열병에 걸려 미쳤다는 되도 않은 가설은 전부 거짓말이 되는 셈이다. 열병에 걸려 정신이 이상해졌다면 정신이 오락가락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찬열의 초점이 다시 흐릿해진다. 종이나, 흐흐. 웃더니 갑자기 표정을 확 굳히며 제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달려나간다. 다시 제게서 도망친 그 모양새를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찬열이 점이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종인은 개망초가 군데 군데 달라붙은 제 머리를 알아차렸다.
물론 정리하면서도, 치덕치덕 어설프게 연고가 발라져 있는 이마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찬열은 그 뒤로 자신과 얽힐 적마다 얼굴빛을 숨기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게 벌써 보름 째였다. 오,오지 마! 오지 마! 소리를 빽빽 지르며 도망가는데 종인이라고 딱히 막을 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하든 말든 돌팔매질을 막아주고 찬열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지르고는 했지만, 그에 굴할 종인이 아니었다. 찬열이 저렇게 되어버린 원인에는 분명 어떤 무엇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종인은 밖으로 쏘다니는 시간이 늘어났다. 온종일 하는 일도 없이 손님방에 틀여박혀 있는 것보다는 저에게서 도망가는 찬열을 찾아다니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일이기도 했고. 애당초 그 집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리는 일 자체가 썩 불쾌하기도 했다. 언성이 오고 간 다음날부터, 제 행보를 진득히 주시하는 여자의 시선마저 종인에게는 더 없이 불쾌한 것이었다.
종인은 중턱에서 찬열을 찾는 게 쉽지 않자 저 위까지 올라가보기로 결정했다. 산은 제법 높았다. 위쪽 근방의 지름길로는 옆마을과 통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마음대로 쏘다니다 옆마을까지 가게 된다면 큰일이다. 험한 산길을 잘도 오르던 종인이 언뜻 인기척을 느끼고 우측으로 쭉 걸어갔다. 평지가 나왔다. 이 곳에 찬열이 있을까, 좁게 뻗은 오솔길을 걷는데 문득 저 위쪽에서 비명이 제 귓가를 찔러왔다.
악!
찬열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종인이 뜀박질을 하는 순간에도 소름끼치는 비명이 귓가를 찔러댔다. 악! 아! 아악! 울음소리는 어느 새 으악 으악 하는 고통에 찬 비명으로 바뀌어 갔다. 씨발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박찬열..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종인은 저가 어디로 뛰는 지도 몰랐다. 악! 인아! 인아! 찬열의 비명에서 제 이름이 터져나오자 그대로 이성을 놓아서였다. 뒤이어 낯선 사내가 찬열을 능멸하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종인은 진심으로 그를 도륙내고 싶었다. 제발 무사하기만 해, 얼마나 뛰었을까. 종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가 서 있는 바위 아래, 평지 뒤에 나무로 둘러쌓인 이상한 숲이 있었다. 주저없이 아래로 뛰어내리자 찬열의 비명이 바로 앞에서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 아악! 인아! 악! "
-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다리 똑바로 못 벌려?
종인의 눈이 돌아갔다. 벌려진 다리, 벌거벗겨진 채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찬열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잔뜩 얻어터지고 눈물 범벅이 된 채로도 필사적으로 남자를 밀어내며 연신 제 이름을 불러오는 찬열의 모습을 보자마자 종인이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찬열의 다리를 벌리려던 사내가 종인의 주먹질에 맥없이 뒤로 자빠졌다. 종인은 치미는 화에 이미 일찌감치 이성을 잃어 제가 몇 번을 쳤는지도 몰랐다. 옆구리를 몇 번이고 발로 차고 얼굴에는 주먹을 날렸다. 기절한 모습도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주먹을 날리려 할 때에, 막은 것은 다름아닌 찬열이었다.
" 이,인아… 하지 마아…. "
종인아.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혼례하기 얼마 전의 일화가 눈에 스쳤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얀 팔이 제 허리를 감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 범벅의 찬열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자 종인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꽂힌 무언가를 발견했던 것도, 비로소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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