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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커피 머신에서 증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코끝에 맺히는 그 향긋함에 나는 턱을 괴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사적이고 또 포근한 공간이라고.
조그만 카페.
향긋한 커피.
잔잔한 음악.
그리고 당신.
참 조화로운 곳이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싱그러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문득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에
당신의 미소도 한몫한다는 것을 당신을 알까?
뭐, 아무렴 어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학연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밤색 앞치마가 꽤나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빙긋빙긋 웃는 얼굴로 그는 내 앞에 따뜻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내 맞은편에 앉더니 깍지를 끼고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한 번 더 웃었다.
'아, 그렇게 웃으니까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나는 이렇게 말해버리고만 싶었다.
'그렇게 웃기만 하니까 이렇게 돼버린 거라고'
사실 피차일반이었다.
너나 나나 누구에게 훈계할 처지는 되지 못 했다.
나는 이내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학연은 커피 대신 따뜻한 유자차를 마셨다.
카페 사장이 커피를 싫어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다가도
이내 혀끝에 맺히는 달달함에 기분 좋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며 그저 슬쩍 웃을 뿐이었다.
"준비 됐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네, 말하면 돼요"
내가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가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가만히 연필을 들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날 사랑해?"
문득 그가 말했다.
나는 그걸 적어내려갔다.
그러다 한참을 매우는 정적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계속 하시면 돼요"
웃음이 났다.
학연은 나를 마주 보며 웃더니 이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콧등을 한 번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넌 말만 잘해"
연필이 부드럽게 공책 위를 유영했다.
그의 목소리가 꽤나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마음이 시큰거리는 건 그나 나나 비슷할 것 같았다.
"부끄럽다"
"넌 몰라도 돼"
"넌 늘 그렇잖아"
"뭘 더 바래?"
"..."
"..."
문득 그가 말을 멈췄기에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머리를 긁적대더니 이내 다시 씩- 웃었다.
"이제 생각이 안 나요"
그가 말했다.
"그럼 이 정도만 적을까요 우선?"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자기 쪽으로 공책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에게 연필을 건넸다.
손가락이 닿았다.
"그럼 이제 지우씨 차례!"
그가 꽤나 힘차게 말했기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 참 어렵고도 쉬운 일이었다.
네가 했던 말들을 생각하는 건 너무 아프면서도 또 짜증 나게 그리웠다.
이런 아이러니한 감정들이 싫어 나는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문득 학연도 헤어진 그녀를 생각하며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봤다.
그래, 오늘부터 시작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더 나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었다.
너랑 나는.
"귀찮아"
"맘대로 해"
"성격 참 어려워, 너"
"넌 항상 그래"
"제발 관두자"
"..."
"..."
어김없이 나에게도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학연은 연필을 쥔 채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까맣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양이가 키스하듯 연신 천천히 깜빡이는 그 눈.
그리고 서로 다른 속도로 감기는 눈꺼풀.
도대체 왜 그녀가 당신을 찼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따뜻한데.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기에 나는 두 눈을 가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차이고 싶어서 차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 마음이야 뭐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
헤어짐 앞에는 장사 없다고 차였으니까 차인 거고, 차고 싶으니까 찬 거겠지.
"다 말했어요?"
웃는 나를 보며 학연이 물었다.
"아니, 하나 남았어요"
"말 해 봐요"
그가 연필을 꼭 쥐었다.
"..."
나는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싫으면 딴 사람 만나"
학연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건 심한데?"
"그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공책을 덮고 연필을 내려놨다.
"방금 적은 말들은 안 하는 걸로 약속하는 거죠?"
학연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유자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상큼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갔다.
나는 내 커피 잔 바닥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잘 해봐요"
진심이었다.
학연은 내 손을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그가 손을 마주 잡았다.
예쁜 웃음.
예쁜 동그라미.
"그래, 지우야"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레몬 씨를 심은 것만 같았다.
우리의 이야기.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오늘부터 시작.
에픽하이 -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