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규 - 답가 (feat. 박윤하)
03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졌던 그 주인 잃은 반지를
학연이 어떻게 했을지 나는 조금 궁금했다.
반지 같은 것도 없던 우리는 차마 버릴 것도 없었는데,
차라리 그런 게 있었더라면 정리하기 조금 더 쉬웠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있었더라면 나는 너를 조금 더 빨리 잊을 수 있었을까?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둘이 남겨진 카페는 아주 조용했다.
그 적막을 나는 깨고 싶지 않았고, 그랬던 만큼 그의 슬픔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
그 노래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그녀에게서 들었던 그 말들이,
내가 너에게 들었던 그 말들이.
나는 한참 동안 창밖을 보며 가만히 앉아있었고,
학연도 제 자리에 앉아 얕은 숨만 내뱉었다.
낯설게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문득 슬퍼 보였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이럴 때 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보낸다는 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너를 보내려 일 년을 앓았고,
아마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인 학연은 더 많이 아플지도 몰랐다.
그가 더 슬픈 노래를 틀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금 더 쓴 커피를 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카페에 올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쓴 커피를 나에게 건네던,
얼마나 슬픈 음악들로 나까지 눈물 흘리게 하던,
나는 분명 다시 이 카페로 돌아올 것이었다.
서로의 사랑 이야기와 서로의 이별 이야기를 훔쳐 들은 우리에겐
이 정도의 의리는 필수라고 나는 혼자나마 믿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연도 그랬던 것 같다.
그도 나의 사랑을 그리고 이별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험을 함께 해주고 있는 거겠지.
이 어처구니없이 희망적인 사랑의 고찰을.
사랑의 의미를.
*
다음 날 그 거리에 들렀을 때 나를 반기는 건
깜깜하게 불이 꺼진 카페와 며칠간 쉰다는 간단한 메모뿐이었다.
또박또박 눌러쓴 그 메모지에는 언제 다시 문을 연다는 필수적인 내용마저 빠져있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그 종이를 바라보다 이내 카페 테라스에 앉았다.
날씨가 조금 추워져서 그런지 의자가 차가웠다.
발치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저녁의 쌀쌀함이 숨을 뱉을 때마다 하얀 김이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는 가만히 그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앉아 음악을 들었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노래가 괜히 쓸쓸했다.
빨간 목도리를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가로등 등불이 피어나는 저녁이었다.
도시의 소음들은 멜로디 같았고, 사람들의 속삭임은 가사만 같았다.
저녁에 하나둘 떠오르는 별들이 낯선 그런 하늘.
그 별들을 세다가 나는 이내 눈을 돌렸다.
하얀 칸, 까만 칸.
빨간 불, 초록 불.
그리고 그 그림자.
참 애석한 일이었다.
아주 멀리 있어도, 또 아주 가까이 있어도
나는 널 찾을 수 있었고, 나는 널 알아볼 수 있었다.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나를 바라보고던 너를.
택운은 회색 목도리에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은 단정하게도 짧았고,
눈에 띄게 흰 피부는 참 투명하기도 했다.
어두운 저녁의 그 희미함을 뚫고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서 있는 그 자태마저도 질투 나게 멋있는 남자였다.
택운은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초조한 눈으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기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나는 겁쟁이었고 너는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지금 마주한 너의 그 눈동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도 나를 사랑했다고,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빨간불이 채 초록색으로 바뀌기 전에 나는 길가로 걸어가 택시를 잡았다.
문득 택운이 반대편에서 주춤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차들이 쌩 쌩 달리는 차도를 가로지를 만큼 그가 무모하지 않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내가 택시 문을 여는 순간 횡단보도 불이 바뀌었다.
그걸 나는 분명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택운이 그 순간 뛰어오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굉장한 용기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굉장한 용기로 너를 외면했다.
굉장한 용기로 나는 도망쳤다.
비겁하게도.
무작정 올라탄 택시는 행선지도 없이 출발했고,
한 발 늦게 도착한 택운은 가쁜 숨을 내쉬며 내가 탄 택시를 바라봤다.
하얀 김은 연신 뿜어대는 그를 나를 백미러로 보고 있었다.
그냥 괜히 눈물이 났다.
그건 너를 사랑했던 날들 때문이었고,
또 내가 나에게 했던 말들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았던 일들과 나빴던 일들이 번갈아 생각이 났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항상 같았다.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들.
그 말들이 생각나 나는 눈물이 났다.
*
며칠 동안 나는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 했다.
평일에 문학잡지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일찍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한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때론 날카로운 말들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 차가움 만큼이나 따뜻한 말들을 쏟아부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어쩌면 아주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나에게 해줬고,
나는 그 이야기가 몇 달 전 인터뷰한 소설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고,
그녀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너무 아팠었다고 말했다.
그는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입술이 아주 붉었더라고 말했고,
그녀는 비 오는 날 무심코 깨물던 그 아랫입술에 숨이 멎을 듯 설렜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사랑에 헤매면서도 잃지 않던 솔직함을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눈빛과 연필을 쥐던 가늘고 기다란 손을 사랑했다.
고양이 발걸음과 풀벌레 울음소리,
빗소리와 당신의 숨소리가 함께하던 그 단칸방을 사랑했노라고.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그건 소설가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녀의 미소는 예뻤고, 뱃속의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따뜻한 커피가 입안에 맴돌았다.
그래서 문득 학연이 생각났다.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사랑에 대하여 생각했다.
택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진아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물었다.
"뭘?"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감싸 쥐며 물었다.
"사랑한다면 해선 안될 말"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할까?"
"...모르겠어"
내가 대답했다.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무진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사랑받는 눈이었다.
"그럼 한 번 해봐"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슬며시 웃었다.
"좋은 공부가 될 거야"
하고 그녀는 웃었다.
"아프면서 배우는 거니까"
헤어질 때가 돼서야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한 번 더 물었다.
항상 그랬듯 그녀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게 다야?"
무진은 물었다.
"뭐가?"
"단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 쓸 거리가 필요해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멋쩍게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무진은 웃으며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손이 따뜻했다.
"바보 같긴"
그녀가 말했다.
"눈이 부실 거야"
"뭐가?"
"눈물도 날 걸?"
"뭐가아-"
나는 말꼬리를 늘렸다.
그녀가 즐겁게 웃었다.
"다, 모든 게 다"
"저주처럼 들리네"
"축복이야"
무진은 예쁜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반할 것 같은 미소를.
"다음에는 더 즐거운 이야기 들려줘"
그녀가 이내 손을 흔들었다.
"정말 예쁜 얘기"
*
주말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 카페에 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지 아직도 문은 닫혀있었다.
꾹- 꾹- 눌러쓴 그 메모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가 그녀를 정리하려 애를 쓴 시간 동안
나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이름이 생각이 났다.
숱한 밤들을 그 노래와 정택운과 우리의 사랑, 이별,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문득 차학연이라는 이름에 잠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달콤한 말들과
시큰하게 쓰라리던 그녀의 시간차.
달달하게 우려 나오던 그의 눈빛과
마음 아프게 내려앉던 그녀의 단어.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조금 겁이 났다.
이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당신은 들어줄까?
그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다시 한 번 테라스 그 자리에 앉았다.
하늘은 아주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우기가 끝난 우유니 사막처럼, 한 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높고 맑아 돌이라도 던지면 물의 파동처럼 멀리 퍼져나갈 것만 같았다.
한참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어요?"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학연은 가게 열쇠를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말라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 해사한 미소만은 여전했다.
괜히 혀끝이 시큼해졌다.
"네"
"미안해요, 일이 있었어서"
그가 멋쩍게 웃으며 열쇠를 돌렸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문을 열고 나를 마주 봤다.
눈빛에 담긴 이야기들을 조금 흘려보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런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눈으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일인지 ... 알죠?"
문득 그가 물었다.
"뭐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왜 며칠 동안 가게 문 안 열었는지"
나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별일 없었다기엔 많은 일이 있어 보이는 그 눈동자를.
마치 헤어진 다음 날 거울 속에 비친 내 동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 알아요"
학연은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고는 가만 멈춰있다 이내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고 메모지를 떼어냈으며
이내 카운터 뒤에서 손을 닦고 앞치마를 둘렀다.
나는 조용히 창가에 가서 앉았다.
그가 준비를 하는 동안 가만히 책을 읽었다.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그래도 햇살은 밝았고 하늘은 여전히도 예쁜 하늘색이었다.
파스텔 물감을 뿌린 듯 아름다운 날이었다.
어떤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마법처럼 믿고 말게끔 만드는 그런 날이었다.
문득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학연은 밀크티가 담긴 하얀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손님도 없고 심심한데 말동무나 돼줄래요?"
그가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학연은 한 번 더 웃어 보였고 나는 또 한 번 시큼해지는 혀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달달한 밀크티 향이 공기를 타고 같이 흘러들어왔다.
취하기라도 할 듯 아주 달콤한 향이었다.
"아..."
문득 학연은 탄식을 뱉어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마른 세수를 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였다.
"그러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극복이 안 돼요"
"헤어짐이요?"
내가 물었다.
학연은 고개를 들었다.
"네"
그가 대답했다.
"그쪽은 어떻게 했어요?"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는 내 이별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찼잖아요"
학연은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나름 진중해 보였다.
"그래도 힘들었잖아요"
그 한 마디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학연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마주 봤다.
"먼저 이별을 말하고도 힘들었잖아요 당신은"
밀크티 향이 달콤한 유혹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 따뜻한 잔에 입술을 댔다가 이내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잔잔한 파동이 찻잔 안에 존재했다.
"다 들켰네요"
나는 웃었다.
"사실 아직도 힘들어요"
"많이 사랑했어요?"
그가 물었다.
"학연씨 만큼 사랑했을 거예요"
내가 웃었다.
"사실 그런 건 비교할 수 없는 거지만"
"..."
학연의 눈.
다문 입술.
그는 이내 차가운 레모네이드가 담긴 자신의 유리 잔으로 눈을 돌렸다.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기회인지도 몰랐다.
"사실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 소리에 학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빨대를 잡은 그의 손이 머뭇거렸다.
왼손에 반지는 이제 없었다.
"...어떻게요"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사랑을 하면 돼요"
학연은 나의 말을 듣고 가만 멈춰있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에 나는 잠깐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봤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를 가진 남자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속에 레몬트리를 심고 사는 것 같다고.
"그게 말처럼 쉽나요?"
학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준비는 다 돼있었다.
너만 있으면 됐다.
"내가 쉽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
"차학연씨"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학연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노랫소리가 흐려졌다.
"나랑 연애할래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