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준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회장을 가득 매운 팬들을 향해 슬쩍 웃으며 한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해를 거듭 할 수록, 활동을 하면 할 수록 익숙해지는 팬사인회. 이제는 눈 앞에 가득한 대포에도, 돌잡이하듯 저를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에도 여유가 생겼다. 남준은 제 옆에서 오질 않는 팬을 힐끔 보고는 다시 턱을 괴었다. 태형의 앞에서 넘어오질 않는걸 보니 태형이 팬인가보다. 시선을 돌려 눈 앞에 대포들을 슥- 훑었다.
세번째 줄, 가운데즈음에 앉아 렌즈에 [태형] 을 달고 있는 누나가 보였다. 잠깐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다시 그 작은 얼굴을 카메라 뒤로 숨긴다. 찰칵 소리도 아닌 차르르르. 쉬지않고 눌리는 셔터 소리에 남준은 보조개가 푹 파일 정도로 씨익- 미소지었다. 하지만 누나의 카메라는 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태형아 잘생겼어-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태형이 꽃받침을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어쭈. 남준은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는걸 느꼈다. 제가 웃을땐 누르지 않던 셔터를, 김태형이 꽃받침을 하니 미친듯이 누르고 있었다. 세번째 줄이 사인을 받으려 우르르 일어나자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앨범을 들고 일어나는 누나가 보였다.
허, 원피스를 입었어?
남준은 기가 찼다. 다리가 예쁘니 치마 좀 입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편한게 좋다며 매일 청바지를 고집하는 누나였는데. 김태형이 좋긴 좋나보네. 원피스를 다 입고? 남준은 살짝 찌푸린 미간을 다시 펴며 제 앞으로 넘어온 팬에게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에요? 물었다.
[남준] 질투는 나의 힘.
w.지젤
어지간히 안넘어오네.
남준은 옆에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빨개진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보는 제 여자친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빨리 넘어오게 하려고 제 앞의 팬은 (미안하지만) 후다닥 사인해 넘겨버렸는데 정작 누나는 넘어올 생각을 안하고 태형의 앞에서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아아~ 왜그러는데에~ 태형이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누나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남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이건 뭐 말도 못하고. 어쭈. 입도 가리고 웃네? 지난번 팬사인회 때 태형과 손깍지를 끼길래 스케쥴이 끝나자마자 문자를 보냈었다.
[ 손깍지 끼니까 좋아? 한번만 더 그래봐 아주 ]
분명 미안하다고 다신 안그러겠다고 맹세하는 답장을 받았던 것 같은데. 한손도 아니고 양손으로 태형과 손깍지를 끼는 누나에 남준은 노골적으로 허- 하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앞으로 넘어온 앨범에 대충 사인을 했다. 무릎 걸음으로 종종 제 앞으로 넘어오는 누나에 여느때와 같이 이름이 뭐에요? 물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무섭게 to. 이름을 써버린건 비밀이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마알간 얼굴에 남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자주보네요 우리?"
제 말에 푸흣- 소리내서 웃는 그녀에 남준도 덩달아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제도 봤는데. 어제도 보고. 씩 웃은 누나가 손가락을 내밀어 앨범에 있는 포스트잇을 가리켰다. 포스트잇 해줘 남준아.
펜을 고쳐쥐며 눈으로 포스트잇에 정갈하게 적힌 글씨를 읽었다. 그럼 그렇지. 나한테 포스트잇을 써올리가 없지. 일행의 포스트잇을 대신 받는 듯 홈 오픈 1주년 축하 메세지를 적어달라는 문구에 남준이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슥슥- 1주년 축하해요. 를 적었다.
무심하게 대충 적고 앨범을 탁 덮는데 다급히 손을 잡아오길래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터치 아니면 잘 안하려고 하는데 왠일로 내 손을 잡지? 살짝 놀라 급하게 얼굴을 내려다보니 다시 주섬주섬 앨범을 펼친다. 뭔가 싶어 펼쳐진 앨범을 보니 밑에 포스트잇도 적어달란다. 난 또 뭐라고.
지원 누나에게 애정이 담긴 한마디 적어줘 남준아! (설레게!)
가지런한 글씨체가 이렇게 얄미울 줄이야. 자기 남자친구한테 할 소리냐 이게. 애정이 담긴 한마디라니. 작은 가로를 치고 설레게! 까지 적은걸 보니 더 부아가 치밀었다. 남준은 포스트잇을 한번, 누나를 한번 보고는 펜을 고쳐쥐었다. 슥슥- 포스트잇에 적힌 질문을 매직으로 까맣게 지워버리고는 남준은 애정이 담긴 한마디를 적었다. 앨범을 탁, 소리나게 덮으며 남준이 입꼬리만 끌어당겨 미소지었다.
"누나, 태형이만 찍지 말고 저도 좀 찍어주세요."
미소짓는 남준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
"조심해서 들어가요!"
"안녀엉~"
문을 열고 나가는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태형이를 찍었다. 다시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마운트는 조금 있다가 풀어야지. 세워둔 삼각대를 접어놓고 가방 안에서 앨범을 꺼냈다. 오늘 반대편에 앉은 남준의 홈마인 지원의 포스트잇을 대신 받아줬다. 까먹지 말고 줘야지- 했는데 남준의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헙, 소리를 내며 후다닥 다시 앨범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언니, 남준이가 포잇 안써줬어?"
"어어 보고 그냥 넘겼어 미안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을래?] 라는 포스트잇을 줄 순 없으니까. 사인을 받으며 남준이 한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태형이만 찍지 말고 저도 좀 찍어주세요 누나. 남준아 근데...음...나는 태형이 홈인데... 미안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스스로 합리화하며 카메라 전원을 켰다. 아까 몇장 올리긴 했지만 마지막 단체포즈 프리뷰 올려야지! 하트를 한 상태로 방긋 웃는 태형의 옆에 남준이 정확히 제 카메라 렌즈를 보고있었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 짐 정리하고 프리뷰 올리니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집 앞에서 내리니 몸이 천근만근. 아 장비 다 버리고 싶다 버리고 싶어!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삼각대를 끙차- 다시 어깨에 올리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역시나 노트북 전원부터 켜기. 노트북 전원을 켜고 장비를 내려놓고 바디 안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외장하드로 옮기는 동안 불편했던 원피스를 벗고 집에서 입는 검은 트레이닝복을 꺼내입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화장을 지우고 나오자 사진이 다 옮겨져 있었다. 고화질 고화질~ 오늘 꽤나 태형의 아이컨택 사진이 많았다. 역시 정 가운데 앉아야 아컨이 많아. 마우스 휠을 미친듯이 돌리며 머리띠를 한 사진, 아이컨택 사진 등 당장 올릴 수 있는 고화질을 셀렉했다. 이것도 이쁘고, 저것도 이쁘고. 하 이걸 다 셀렉해서 언제 보정하지? 쌓여만 가는 외장하드 속 태형의 사진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말에 약속 취소하고 보정이나 해야겠다.
딱 맘에 드는 예쁜 사진을 모니터 가득 켜놓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밝기를 조절하고 노이즈를 제거하고.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태형의 얼굴에 작게 난 뾰루지를 없애고 있는데 자꾸만 핸드폰이 울린다. 우웅- 우웅- 아 고화질 빨리 올려야하는데! 이미 다른 팬페이지에서 올린 태형의 고화질에 마음이 급해져 수신자를 힐끔 보고는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준아 미안. 누나가 진짜 급해. 이것만 올리고 내가 전화할게! 마음의 소리를 외치며 고화질을 저장하는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하다 본능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고 노트북 화면을 탁- 덮었다.
"왔어?"
몇시간 전 보았던 화려한 가죽자켓에 올림머리를 한 랩몬스터가 아닌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동여맨, 편한 니트차림을 한 남준이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옷차림과는 다르게 잔뜩 인상 쓴 얼굴에서 빡침이 느껴졌다. 손에 든 핸드폰에는 내가 방금 전 올린 방금 전 올린 고화질이 화면 가득 켜져있었다.
"프리뷰를 그렇게 잔뜩 올렸으면 됐지. 어?"
"그.. 준아.. 그게..:
"내 전화는 받지도 않으면서 김태형 고화질은 올려?"
"아니 그니까 ..!"
"누나 내 사진 찍기는 찍었어요?"
거실 테이블에 올려진 노트북을 슬쩍 본 남준이 코트와 머플러를 대충 벗어 쇼파 위에 내려놓고는 러그 위 나뒹구는 내 장비를 손에 쥐었다. 뭐야 어떻게 보는거야. 카메라 전원을 켜는 것 까지는 성공인데 찍은 사진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몰랐던 남준이 카메라 이곳 저곳을 만지작 거렸다. 저....남준아.... 거기 메모리 카드 없어서... 켜도 안보이는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은 당장 남준의 손에서 카메라를 뺏고 싶었다. 저 파괴왕 손에 내 장비가 망가지면 안되니까.
내 말에 큼큼 헛기침을 한 남준이 쇼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휙휙,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거실을 둘러본 남준이 어색하게 테이블 한쪽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는 노트북을 열었다. 번쩍이는 노트북 화면에 태형의 얼굴이 가득 찼다. 마우스를 쥐는 남준을 밀치며 급하게 윈도우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사라진 포토샵 창에 남준이 아씨, 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 허, 소리를 내며 모니터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강남에 요정이 나타났어요."
"...."
"세젤멋 김태형."
"...."
"김태형이 너무 멋져서 손이 떨립니다?"
바탕화면에 저장된 파일명을 소리내어 읽는 남준에 귀가 다 화끈거렸다.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점점 더 짙어지는 미간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나...남준아...뭐라도 마실래..? 커피..?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남준의 옆을 지나치는데 손목이 턱 하고 잡혔다. 앉아봐요. 손목을 휙 잡아 끌어당기는 남준에 털썩, 러그 위에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가져다 댔다.
"나도 좀 찍어달라니까. 어? 한장도 없어. 한장도."
"..아냐..! 찍었어!"
내 오른손을 붙잡은 상태로 마우스를 움직여 오늘 찍은 사진을 휙휙 넘기는 남준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내가 남준이를 오늘 몇장이나 찍었더라?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기억을 되짚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오늘따라 태형이가 신났었단 말야! 잔뜩 신난 태형이를 찍느라 남준이는 몇장 안찍었던 것 같은데 싶어 찍었어! 라며 큰소리는 쳐놓고 마음이 불안해 잡힌 손목을 빼내려 이리저리 꼼지락 댔다.
"지금 딱 두장 나왔어요."
"ㄷ.. 두장보다 더 많이 찍었어!"
"두장이라고 쳐준 것도 고마워해요. 한장은 눈 감고 있는거 찍은거잖아요."
무표정한 얼굴로 휠을 내리는 남준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찍은 수많은 사진 중 남준의 사진은 딱 두장. 하나는 태형과 귓속말을 하는 사진, 또 하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은 사진이었다. 아니 그니까 남준아...내가... 널 일부러 안찍은게 아니구우...
입 안에서만 맴도는 변명에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는 남준에 다시 바닥 어딘가로 눈을 내리깔았다. 후. 한참 어린 연하 남친이 무서워 눈을 내리깔다니. 내 신세도 참 처량하다 싶어 티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려는데 양 뺨이 남준의 손에 붙잡혔다.
"나 질투나요."
"...."
"누나가 팬으로서 태형이 좋아하는거 알아요. 나랑 김태형이랑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거 아는데."
"준아.."
"아는데도 질투가 나요. 속 좁다고, 어리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나 정말 질투나요. 심각하게."
진지한 얼굴로 질투가 난다고 얘기하는 남준에 가슴 한켠이 간지러웠다. 내 얼굴을 감싸쥔 남준의 손을 떼어내고는 남준의 허벅지 위에 살짝 걸터앉았다. 갈 곳 없는 손을 어쩔까 하다 남준의 어깨에 슬쩍 올리고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남준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알아. 미안해."
"...."
"질투나게 해서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남준의 무릎에 앉아 최대한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쌍의 눈, 곧게 뻗은 코, 도톰한 입술, 살짝 파인 보조개, 까무잡잡한 얼굴. 잘생긴 이 남자가 내 남잔데. 이런 남자가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게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꺼. 내 남자. 내 남준이.
제 무릎위에 앉아 애교를 부리는 내가 귀여웠던건지 남준의 눈이 어느새 웃고 있었다. 나는 남준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더 뻗어 남준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앙 다문 남준의 입술에 쪽, 쪽, 입을 맞췄다. 한번, 두번 입을 맞출 때마다 남준의 입꼬리가 더 짙은 호선을 그렸다.
질투는 우리의 힘이었다.
"아 맞다."
"응?"
"지원누나에게 애정의 한마디? 설레게?"
"어? 아니 그거는..!"
"내가 한번만 더 그런 포스트잇 가져오면 혼난다고 했어 안했어!?"
"아니아니 남주 .. 남준아..! ㄴ..준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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