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겨울. 일병인 나는 공군으로 입대 지원을 한 지 1년 째이다. 우리 분대장인 김소위는 부러울 정도로 잘난 인간이다. 매사에 완벽하며 자기가 정해놓은 선을 넘기기라도 하면 지나치게 혹독하게 가했다. 심지어 전대장님과 친한 걸 보면 예쁨을 어지간히 받는 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성격이 그렇게 나쁜건 아닌 듯 하다.) 눈빛은 또 어찌나 날카로운지 부대에서는 이미 개소위라며 불리우고 다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공사 시절 내내 A+을 맞았으며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한다. 어느 하나 모자를 것 없는 피지컬부터 머리까지... 듣자하니 담배에는 손도 안댄다고 하던데. 군부대에 정상적인 윗대가리가 없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 듯 했다. 왠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다. 일상에 감흥이란게 도무지 없어보였다. 아, 부대애들을 데리고 훈련을 뺑뺑 돌릴 때에는 우리들 골려먹는 재미로 버틸 것이다. 사관님들도 이따금씩 보여주는 미소 하나도 김소위한테서 본 적이 없었다. 김소위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불가능이었다. 부대 안에 있는 애들은 김소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좋은 말이라도 건낸다 한들, 돌아오는 말은 알았으니깐 가봐. 라는 말이 전부였기때문이다. 여자친구는 아마 없지않을까. 여태 면회를 온 사람은 여자는 커녕 의사라는 친구 한명밖에 없었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연애 한번 못 해본 쑥맥일 것이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 것 이라는 자부심이 들기까지했다. 여자들한테 인기있다고 해도 남자가 보기엔 딱 봐도 3일도 안돼서 아웃일거라는 촉이 온다. 내가 밤샘근무를 하던 날이었다. 박일병과 함께 앞에 애들과 교대를 하고 난 지 2시간 쯤 흘렀을까,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슬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잠을 깨고 싶었지만 지금 시간에는 라디오방송을 할 리가 없었다. 박일병이 어딜 다녀오더니 문세형님 카세트테잎을 여러개 가져왔다. 부대안에 카세트테잎까지 가져다 둔 사람도 있나 싶었다. "테잎 어디서 났어?" "안에서 테잎이 세트로 있는 거 본 적이 있었던게 가억이 나서. 부대에 이문세 빠돌이가 있나봐. 1집부터 다있던데." "웬열. 사관님들거 아니야? 함부로 들어도 되냐?" "괜찮지 않을까? 잠깐 듣고 제자리에 둘건데 뭐." 박일병이 테이프 여러개를 유심히 훑더니 상태가 왜이렇게 좋아... 새거인 줄 알았네. 라고 중얼거리며 고르기 시작했다. 선택한 음악은 사랑이 지나가면. 나 중학교때 나온 노래다. 누나가 귀에 박히도록 들려준 기억이 떠올랐다. 노래를 듣다 보니 박일병과 나는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짐을 느꼈다. 박일병이 말을 물어왔다. "이 노래 언제 나왔냐? 좀 되지 않았냐?" "87년도에 나왔을걸? 나 중학교때니깐." "그런가... 이게 3집이었던가? 4집?" "4집."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박일병과 나는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봤다. 개소위. 김소위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급히 필승. 분대장님께 인사 드립니다. 라고 외치며 인사를 했고, 김소위의 손짓에 손을 거뒀다. ...김소위가 방금 4집이라고 말했지?? 좀 조용히 해봐. 박일병과 나는 갑자기 불편해진 자리에 김소위가 얼른 자리를 떴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나 김소위는 멀뚱히 서서 찬찬히 노래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밤샘근무도 아닐텐데 왜 나왔을까. "저...김소위님. 이문세 좋아하시지 말입니다." "...니들이 들고 있는 테이프들 전부 내거야." 박일병과 나는 소름이 돋았다. 사관님들 것도 아닌 김소위님의 테잎이라니. 박일병은 몇분 전의 자신을 한탄하고 싶어졌다. 노래가 몇집인줄 알고 테잎까지 모으는걸 보면 이문세빠인건 분명했다. 김소위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새차게 입김이 몽글몽글 피워나왔다. 김소위가 웃는 건 처음 보는 거였다.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거구나. 박일병도 할말이 없어진 듯 했다. "뭐. 왜 그렇게 보는건데." "기...김소위님도 웃을 줄도 안다는 걸 몰랐지 말입니다." "뭐라는거야." "노래를 들을 줄도 안다는 걸 몰랐지 말입니다." "됐다, 수고해라." 그 때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건지 모르겠다. 분명한건 나는 김소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는 거다. 하지만 딱히 달라진건 없었다. 그 때처럼 피식 웃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박일병은 테잎안에 편지가 여럿 들어있는 걸 봤다고 했다. 분명히 여자로부터 온 거라고. 첫사랑이 준게 아닐까? 박일병과 나는 김소위한테 첫사랑이라니 말도 안돼 하면서 넘기려했으나 그래도 인간인데 한번 쯤은 있지 않겠어? 하며 여러가지 추론을 하기 시작했다. 주말 저녁이 부대원들이 모두 모여서 티비를 보고 있을 때 프로그램이 끝나자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연말이어서 조금 너그러워져서 그런지 의자에 꿋꿋히 앉아서 책을 읽던 김소위도 아무런 호령이 없었다. 자신들의 학창시절 얘기, 친구 얘기, 그리고 첫사랑 얘기까지. 문득 부대원들은 박일병과 내가 해준 이야기때문에 김소위의 첫사랑이 궁금해졌다. 누가 물어볼 것인가 그게 문제였지만 한국인들은 뭉치면 없던 용기가 생긴다. 굳게 결심한 나는 손들 높히 들며 나직하게 외쳤다. "김소위님 첫사랑 얘기 궁금하지 말입니다." 부대에는 침묵이 흘렀다. 김소위는 책을 읽던 눈이 위험하게 가늘어지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대원들은 물타기를 시작했다. 처...첫...첫사랑! 첫사랑! 첫사랑! 첫사랑! 김소위는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침이 꼴깍하고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단체 기합을 받을까 순간 걱정이 되었다. "...궁금하냐?" "궁금하지 말입니다!!!" 김소위는 둥글게 앉아있던 우리들 앞으로 와서 앉더니 뭐. 뭐부터 말해줄까. 라고 말했다. 부대원들은 이런 김소위가 좋은건지 신기한건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김소위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 살던 동네에 동갑내기 친구가 나 포함해서 다섯이 있었는데 한명이 여자였어. 진짜 못볼꼴 다보고 자랐는데 그래도 여자라고 언제 부턴가 신경이 쓰이더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지 말입니다. 있지. 당연히 있지. 나 15살때 형이 아파서 병원신세를 좀 했었는데 부모님이 형 간호하시느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셨어. 그 날도 집에는 못 오셨는데 하필이면 내가 집 열쇠를 잃어버린거야. 그 날에 늦은 장맛비가 엄청 왔었어. 우산도 없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 막 서러워서 엄청 울고 있는데 걔가 와서 우산을 씌워주더라. 뭔가 싶었지. 아무 말없이 자기 옷소매로 내 얼굴 닦아주더라. 그래서 좋아하게 됐지 말입니까. 아마도. 나도 뭔가 싶다. 분명 뭔가에 홀린거지...홀렸어. 야, 얘가 행동이 좀 드셀뿐이지 얼굴은 정말 예뻤거든. 얘 올림픽 피켓걸까지 나가고 그랬어. 오오, 티비로 보셨지 말입니다. 당연히 봤지. 그거 녹화까지했어. 피켓걸 못 나갈뻔 했었는데 나온거 보고 내가 다 좋더라. 웃음이 절로 다 나와. 엄청 좋아하셨는지 말입니다. 크크. 엄청...좋아했지. 수학여행때 얘 마이마이타게 해주려고 걔네 학교 수련회에 가서 춤까지 췄으니깐. 근데 괜히 그랬나싶어. 내가 돈 모아서 마이마이 사줘서 선물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아, 내가 이문세 좋아하게 된 것도 다 얘때문이다. 고1때 사랑이 지나가면을 내 마이마이로 같이 들었어. 자기는 테잎이 있는데 누나가 라디오를 절대 안빌려줘서 들을 수가 없다고, 개정팔 이거 나랑 제발 같이 듣자하면서 내 방 찾아왔었어. 야, 얘 나한테 막 개정팔이라고 불렀어.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 노래 하나하나를 설명해주는데 그게 정말 좋았다. 얘랑 이문세 콘서트도 갔었어. 단 둘이. 너희 잼콘서트라고 들어는 봤냐? 추억에 빠져들어 자신의 첫사랑을 얘기하는 김소위의 모습은 영락없는 남고딩으로 돌아간 듯 했다. 김소위의 사적인 이야기는 처음듣는 지라 모두들 숨죽이고 들었다. 뭐...솔직히 좀 재밌기도 하고. 이따금씩 김소위는 웃기도 했다. 그럼 선물을 해주신적 없지 말입니다. 있었지. 고2 크리스마스 때. 걔가 분홍색장갑을 갖고싶다고 노래를 그렇게 했거든. 내가 장갑사서 걔네 동생한테 가져다 주라고 시켰는데 이 자식이 날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가져다줄 생각을 안하는거야. 지금 생각해보니깐 좀 어이가 없긴 했겠다. 자기 누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친구가 있다니. 근데 걔가 내가 준 장갑은 안 끼고 다른 장갑을 끼고 다니길래 왜 안 끼냐고 물어봤었어. 걔가 계속 고민을 하더니 정팔이 너가 준건 왠지 못 끼겠어. 나중에 낄게. 라고 하더라. 소위님이 여자분 좋아하는걸 의심한 것 같지 말입니다.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래. 신경이 쓰이니깐 못 꼈겠지. 그래, 그게 맞을거야. 그 후로 버스에서 마주쳤었는데 내가 준거 잘 끼고 다니더라. 애가 단순한건지 멍청한건지...내가 준 이유도 모르고 말이야. 얘가 또 나한테 생일선물로 핑크셔츠를 준 적이 있어요. 그것만 생각하면 진짜. 아오. 형이 여자친구한테 선물로 똑같은 핑크셔츠를 받았는데 내가 핑크셔츠를 안입으니깐 형한테 줘버렸다고 생각해버린거야. 그거 오해 푸느라 시간 오래걸렸지. 내가 구구절절 다 설명해주니깐 그제서야 씨익 웃더라. 손은 잡아봤습니까? 제대로는 못 잡아봤어. 아, 콘서트 갔을 때 얘 다리 삐어가지곤 부축해주느라 손잡아 준 적 있었다. 나 그때 좋아서 돌아버리는 줄 았았다. 김소위님 은근 순정파지 말입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좋아하신지 몇년 되셨습니까? 한 10년 가까이...? 오래도 좋아했네. 솔직히 공사가면 잊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 걔한테서 받은 핑크셔츠 괜히 갖고 있나 싶었고, 걔와의 추억을 잊기가 싫어서 테잎이 닳아질정도로 이문세 노래만 들었거든. 잊으려고해도 떨어져있는 5년동안 마음에 쌓인 걔는 계속 불어나더라. 걔한테 고백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 이미 친구 한 놈이 걔를 좋아하고 있어가지곤 내가 포기를 했어야 옳은 것 같았어. 친구들 우정은 깨기 싫으니깐. 그 놈이 더 절실해 보였으니깐. 친구 한명이 내가 여자는 안만나고 사천에서 삭히기만하니깐 내가 고백하는 걸 보고 죽는게 소원이라고 하더라. 이때다 싶었지. 내 마음을 표현하는건 이번뿐이 기회겠다고. 임관반지 주면서 걔한테 고백했어. 애들이 장난식으로 끝내버렸지만 나는 진심이었어. 나 또한 절실했었나봐. 헐, 야 대박. 박일병은 저게 실제로 있는 일이냐며 나에게 재차 물었다. 10년 가까이 짝사랑이라니... 그것도 김소위가. 부대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한명이 그래서...그래서 어떻게 되신겁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점호를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김소위는 손목에 있던 시계를 한번 보더니 여기까지. 하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으나 불같은 김소위의 호령에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자세를 고정시켰다. 김소위는 한번 쓱 훑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주말마다 서울 가는거 모르냐? 나 걔가 차려주는 밥먹고 내려와." 김소위는 마지막말을 한 뒤 부대를 나갔다. 금요일 저녁이니 아마 퇴근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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