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텅 빈 도시에서 홀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늠름하게 빛을 발하는 그 풍정에서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휩쓸리고 패거리를 만들고, 친해졌다 배신하며 서로 속고 속이며 넘어가는 우리는
그 고독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끌려드는 거라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버리는 우리가 그것을 동경하는 것이라고.
-도쿄타워 (릴리 프링키 저) 中-
*
지금은 새벽 4시 반, 결국 4시간도 못자고 일어났다. 이상한 꿈을 꿨다.
빨간 책으로 꽉 찬 책장이 있었는데, 책장이 엄청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는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울지말라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전혀 그치지 않았다.
근데, 내가 책을 한 권 꺼내자 울음이 그쳤다.
책장이 울먹이며 내게 말했다, 고맙다고. 그 책 읽어달라고.
결국 뒤척이느라 30분을 까먹고, 잠이 오지 않자 방을 나갔다. 물 한잔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언제 사온건지 말라 비틀어진 곱창 한 접시가 있었다.
왠지 좀 오래된거 같고 아무도 안먹을 꺼같아 버렸다. 뭐 남자는 둔하니까 눈치 못 채지 않을까.
접시를 싱크대에 놓고 물을 마시려 하는데,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가 눈에 거슬렸다. 아마 또 새벽에 들어온 한상혁 것이겠지.
물컵도 마져 싱크대에 놓고 옷을 들어 접어 의자에 걸어 놓았다.
나는 어느새 이 집, 이 환경에, 이 사람들 속에 익숙해져 가는 듯 했다.
원래 있던 것 처럼
*
"누가 곱창 먹었어! 누구야!"
천장이 떠나가라 아침부터 한상혁이 소리질렀다.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아점으로 먹으려고 남겨둔 곱창이 증발했다면서 고래고래 떠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곱창 너무 오래되서 못먹을꺼 같아 버렸다고 바로 얘기했다. 그러자 한상혁은 지구가 멸망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맛있는건데.."
...
"..곱창 먹으러 갈래요?"
이 집에 있으면서 한 번도 돈을 쓴적 없으니 내가 곱창을 사기로 했다. 내가 사준다고 하자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때 보면 완전히 얘 같았다. 처음 봤을 때 무서움이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김별빛, 오늘 완전 땡잡은 줄 알아. 여기가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야."
신세계를 맛보게 될꺼야, 한상혁은 내게 젓가락을 건네며 큰소리로 아저씨를 불러 곱창 2인분 달라고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한상혁은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학교 다니나?"
"아니요"
"그럼 여기 오기 전까지 뭐했어?"
"알바,."
"가족은?"
"없어요."
"어, 나랑 같아"
아, 정택운에게 들었던거 같다. 혁이는 가족이 따로 없으니까 잘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그 땐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린가 했다.
"엄마는 나를 낳고 바로 몸이 너무 아파서 돌아가시고,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때 돌아가셨어."
그는 얼굴을 떨구며, 자신을 그림자 속으로 가렸다. 그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 했다.
당신도 외로웠구나, 힘들었구나, 슬펐겠구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결국 꺼내지 못했다. 지금 말해봤자 결국엔 동정이라고 밖에 생각 안하겠지. 나 또한 그랬으니.
*
한상혁은 음식이 나온뒤부터 술을 곁들여 먹었다. 나는 초반에 몇개 집어먹고는 못먹었다.
침묵을 둘러싼 한상혁의 공기가 나에게는 너무 무거웠다.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채우는 그를 보며 나는 그냥 ,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결국 한상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게 기대어 집에갔다.
그는 하루하루를 걸러 다른 사람인거 같은 얼굴을 하고 다녔다.
마치 중국에 벗겨도 벗겨도 나오는 가면 마술 처럼,
"정신 좀, 차려봐요"
아니, 자신이 잡아둔 여자에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있어도 되는건가? 아마 이 집사람들은 내가 도망가니 않는다는 걸 아는거 아닐까.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해줬다.
이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왔을때 그들은 나에게 오늘 뭐하고 지냈냐고, 밥은 먹었냐고, 먹으러 가자고, 여자면 좀 꾸미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라고,
그 꾸중마져 난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아, 이런게 바로 가족이 아닐까 라는 환상을 품은거 같다.
정말, 정말 미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어도 괜찮을 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한상혁을 일단 내가 쓰는 방 소파에 눕히고, 조각 담요를 가져다가 그의 배를 덮어주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지고, 그의 얼굴은 계속 그림자 안에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화장실에 손을 씻으려가려고 하는데 한상혁이 입을 열었다.
뒤돌아보니, 그의 팔은 어느새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그냥 회사원이였어. 어미없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사는 평범한 회사원"
"아빤 어느날 부터 몸에 멍을 달고 오기 시작했어. 나한테는 넘어졌다, 굴렀다라고 그냥 넘어가려했지.
근데, 딱 알겠더라고. 아빤 회사에서 왕따당하고 있었던거야.
힘들게 문장을 이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저 그의 입모양을 보면서 서있어야 했다.
괜찮겠지, 버티겠지 했지. 한 번 찾아가볼까 생각했었지만 나는 무서웠어. 일에서 잘리면 나는 누가 먹여살리나. 내 앞날만 생각했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빠는 시체로 돌아왔어. 얼굴 한 가득 멍이 든 시체.
경찰에서는 자살이라고 마무리 짓고 나한테 찾아왔어. 누가봐도 때려죽였구만.
나는 가서 따졌지, 아니라고, 회사 사람들이 우리 아빠 왕따시킨거라고 때렸다고. 근데, 나중에 알게된거지만 회사에서 돈을 먹였더라고 경찰들한테.
어쩐지, 아무도 안들어주더라.
"그래서 죽이기 시작했어. 내 죗값을 치를려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눈물이 나는 소리가 그의 떨리는 입술로 전해졌다.
그 말을 뒤로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가면으로 무장을 하고 있던 그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게된건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 가면을 벗기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리, 뭘 숨기는지.
이게 진짜 모습이라면,
나는 여태 봐왔던 상혁이의 모습을 전부 잊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
장미빛 고래에요.
이번엔 전개가 좀빨라서 ㅠㅠ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어쩔수 없더라고요ㅜ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혹시 모를까봐 한개 스포할께요
별빛이 꿨던 꿈에 나온 책장은 상혁이와 비슷한 아이인거같죠?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가여운 책장.
항상 감사합니다.
암호닉신청해주신분 너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