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아침, 주인님.”
“하암, 좋은 아ㅊ…”
잠이 덜 깨 반쯤 감긴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일어났을 때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내 침대 옆에 누군가가 서서 물잔을 건네주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받았는걸. 전날의 과음으로 입이 텁텁해서 달게 냉수를 원샷하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더라고. 미친,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
“자, 잠깐?!”
언제부터 나 혼자 사는 자취방에 남자 목소리가 들렸느냔 말이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을 하고 침대 옆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어. 내 침대 옆에 남자가 서 있었다고.
빌어먹을, 남친이나 남사친은커녕 남동생도 없는 내 침대 옆에 말이야, 가장 사적인 공간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고!!
“으아아아아악!!”
물론,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어.
“아- 시끄러워. 잠버릇만 흉악한 게 아니었어, 주인님.”
“주인…님?”
“계약 맺었잖아, 기억 안 나?”
“뭐- 계약?!”
“아아, 역시 머리도 나빠. 하여간 주인 복은 더럽게 없단 말이지.”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백발에 가까운 연한 금발이었어. 색소가 부족해 보이는 하얀 피부가 그 다음. 처진 눈꼬리와,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붉은 입술을 마지막으로 거의 넋을 잃었어. 잘생겼다. 외국인인가. 멍한 얼굴로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도 같아.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끌어내리니 검은 사제복이 보였어. 그래, 분명 사제복이었어. 검은 사제들에서 강동원이 입고 나온 옷과 똑같은 디자인이었으니까. 왠 사제복. 미친 신부인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잔뜩 불만을 늘어놓는 남자를 애써 무시하며 주인이니 계약이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이 내 기억에 있는지 머리를 빨리 굴려봤어. 떠오를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지. 집에 하인 같은 걸 둘 정도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식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인간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애완동물 같은 걸 키우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고 계약이고, 지극히 평범한 스물 한 살의 여대생에게 좀처럼 어울릴 만한 단어들이 아니잖아. 역시 정신병자가 맞는 듯. 경찰에게 신고를 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손을 뻗는 순간 오른손 약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어딘가 익숙한 듯한 반지가 보였어.
잠깐, 빌어먹을,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서…설마…”
“이제 기억나시나 봐. 그래, 오늘부터 귀하를 모시게 된 루이 윌리엄스 슈가 애덤스 3세라고 해. 귀하의 소원은 뭐지?”
“루이…뭐? 아니 잠깐만, 그렇게 빨리 대화를 전개하지 마시구요, 지금 장, 장난치시는 거죠? 이거 몰래카메라? 방송국?”
“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장난 같은 게 아니야. 빨리 소원을 빌어, 주인님. 질질 끄는 건 질색이거든.”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는 새하얀 얼굴에 잔뜩 겁을 먹고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었어. 귀하에 주인님에, 굉장한 높임 호칭들을 쓰는 주제에 말투는 건들건들한 게 꽤나 무서웠다니까.
“딱히 소원이 없는걸요…”
한참 후에야 입을 비집고 나온 말은 이랬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눈치를 보았지. 물론 그의 표정은 여전히 뭐 씹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 머리로는 이 상황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모든 걸 받아들이는 기분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그 이상한 모순에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말았어.
“하-. 곤란해, 주인님. 타락천사들은 모신 인간들에 대해 반드시 보고를 해야 된다고. 없으면 짜내.”
“아니, 그러니까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셔도-”
“진짜 귀찮은 주인이네. 정 곤란하면 킵 해둬. 식사 준비를 해야 될 시간이니까 나는 이만.”
그렇게 제멋대로!- 밀려오는 당혹감과 짜증에 소리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그가 돌아섰어.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금발에 하얀 얼굴, 하얀 손과 대비되는 검은 사제복의 끝자락이 휘릭, 소리를 내며 펄럭였어. 개멋있다…멍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는데, 피식-.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듯 비웃는 소리와 함께,
“그만 봐. 닳어.”
“아-안봤거든요?!”
“삼십분 있으면 상 다 차려지니까 씻고 와.”
능글능글, 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말투에 입을 비죽 내밀었어. 역시 기분 나쁜 사람이라니까.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오니 어느새 그는 소매를 걷어부치고 능숙하게 부엌에서 양파를 다지고 있었지. 근데 왜 그쪽이 내 아침식사를 차리는…그리고 내 방이 언제부터 이렇게 깨끗했...?
“설마 당신이 내 방 치웠어요?!”
“응. 너무 더러워서. 아침 메뉴는 페투치니면으로 만든 알리오올리오에 간단한 샐러드와 건포도가 들어간 식전빵으로 준비할게. 괜찮지?”
“아니-! 그냥 제가 할게요! 부, 부담스럽게-”
다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가 남자의 팔을 붙잡는다는 게 손을 헛짚어 후추통과 설탕통을 죄다 엎고 말았어.
뜨아-, 이상한 감탄사를 내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닥치고 해주는대로 쳐먹어, 주인님.”
“네…”
한번만 더 건드리면 아주 잣되는 줄 알라는 표정에 그대로 그가 시켰던 대로 세면대로 발걸음을 옮겼어.
…아무래도 엄청난 일에 휘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그러니까 그쪽이 원래는 천산데 죄를 지어서 반지에 갇혔고, 반지를 찾아낸 인간 천 명의 소원을 들어주고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중을 들어야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 다행히 아주 멍청이는 아니군.”
“멍청이라뇨!-가 아니고, 그런 판타지 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날리가 없잖아!”
“근데 일어났잖아. 영광인 줄 알아. 내가 얼마나 능력이 좋은 천사였는데. 지금까지 999명의 인간을 만났고 단 한번도 실패를 한 적이 없다고.”
이상한 데서 뿌듯해하지 말라고…
사제복 자락을 툭툭 털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고 잔뜩 오만한 얼굴로 턱짓을 하는데 하는 행동이 너무 사람 같아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어. 내가 상상했던 ‘천사’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거든.
하긴 뭐, 타락천사라니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어딘가 안정된 마음과 달리 내 머리는 여전히 악을 쓰며 소리치고 있었어. 이게 무슨 엿 같은 상황인지 전혀 납득할 수 없다고.
“즈, 증명해 봐요!”
“앙?”
“전 종교 안 믿거든요?! 당신이 진짜 천산지 뭔지 그런 거라면 어디 한번 증명해보라구요!”
호기롭게 말하자마자 심장이 쪼그라들었어.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아닐까 해서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아까보다 기분이 되려 좋아졌는지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어.
“흠…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도록 영감을 준 게 나야. 알렉산더 대왕이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정복할 수 있게 도운 것도 나고,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하도록 조력한 것도 내 역할이었고, 진시황이 병마용갱을 만드는 걸 도운 것도 바로 나, 슈가.”
"...에?"
뼈 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마르고 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웅얼웅얼 내뱉는 말들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실들이었어. 먼 기억을 되살리듯 눈을 위로 치뜨며 생각하던 그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어.
“맞아, 1740년대 중반엔 마담 드 퐁파두르의 애인 역할도 한참 했었군. 루이 15세의 애첩. 들어는 봤지?”
“마담 드 퐁파두르?! 진짜 이 사람이 장난하나-”
“그래도 믿기 힘들다면 주인님, 반지를 빼봐.”
“반지가 뭐요, 으아!! 이게 뭐에요?”
반지가 끼워져 있던 오른손의 넷째 손가락에는 읽기 힘든 알파벳 글자들이 손가락을 휘감은 듯한 형태로 마치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어.
E…X…E…R...
당황스러운 마음에 화장실로 달려가 비누로 문자를 박박 문질러도 보고, 매니큐어를 지우는 아세톤을 솜에 묻혀 닦아도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소용이 없었어. 혼란스러운 눈으로 식탁에 앉아있는 그를 쳐다보자 그가 불퉁한 얼굴로 입을 뗐어.
“exercitus. 라틴어로 주인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 취한 것 같은 웅얼대는 말투를 끝으로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목 끝까지 잠긴 사제복의 단추를 차례차례 풀기 시작했어. 남자라는 것을 확인사살하듯이 툭 튀어나온 목울대를 시작으로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 탄탄한 가슴팍, 군살 없는 배. 정신줄을 놓고 변태마냥 옷을 벗는 그를 쳐다보다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당혹감과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였어. 그래봤자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바람직한 상반신을 전부 본 후였지만. 옷이 부딪치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단추가 풀려 어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사제복을 홱 젖혀 등을 내보였어.
“등이…!”
오른쪽 날개뼈 아래에 깃털이 돋아나다 만 것처럼 생긴 검은 흉터가 길게 뻗어 있었어. 대칭되는 왼쪽 날개뼈 아래에는 내 손가락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글씨체로 조금 다른 알파벳이 보여. 맞은편의 흉터와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간 글자들에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대자 내 손가락에 쓰여 있던 단어와, 그의 등에 새겨져 있는 단어가 밝게 빛났어. 마치 글자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깜짝 놀라 손을 떼자 몸을 움찔하던 그가 어딘가 지친 듯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똈어.
“valet. 라틴어로는 시종이라는 뜻이지.”
옷깃을 여민 그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어. 나른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묘하게 색정적이었어. 무의식적으로 붉은 혀를 내어 선홍빛 입술을 핥는 얼굴을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빤히 쳐다봤어.
아까부터 느껴왔던 거지만 이 남자…
“자, 주인님. 그럼 나는 슬슬 디저트 준비를.”
무진장 야하다.
+)
제목 그대로 하늘에서 죄짓고 내려온 타락천사 민슈가 씨가 너탄을 주인님으로 모시고 소원 하나를 이루어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랍니다! 자까의 부조칸 글솜씨로 이해에 애먹으시는 분은 프롤로그를 보시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 함다...쿨럭.
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슈가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네요...후후후
주인인듯 주인아닌 주인같은 여주에여...부쨩함ㅋㅋㅋㅋ그래도 윌리암스 삼세 씨 첫날이라고 나름대로 엄청 잘해주는 거랍니다. 앞으로는 워...지옥같은(?)나날들ㅋㅋㅋㅋ
반응 연재구여, 댓글, 암호닉, 엄지 격하게 아껴요!
+)암호닉
우선 신청해주신 분들 격하게 사랑해요ㅠㅠㅠㅠ오래 봐요 우리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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