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님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전주에서 온 김성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자기소개가 끝난 후엔 짧은 박수소리와 남자들만 가득 있는 교실을 채우는 웅성웅성대는 소리. 비빔밥! 소리 치는 애도 있다. 저런 새끼 있을 줄 알았다. 하하. 근육을 잔뜩 긴장시킨 채 웃고있다가 교탁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애랑 눈이 마주쳤다. 턱을 괸채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맨앞자리에 앉은 게 생긴 것도 모범생처럼 생겼다.
"저기 맨 뒷자리에 앉아라."
네. 대답하고는 얼른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안뇽."
"어, 안녕."
옆자리에 앉은 애가 인사한다. 안뇽이 뭐니 안뇽이. 앞에 앉은 애도 뒤돌아 앉아서는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말을 건다.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얼굴에 머금고 나도 인사를 건네준다.
"전학생 왔다고 남자새끼들이 너무 들뜨지 말고. 수업 잘해라."
담임선생님이 나가고 나서는 여기저기서 다들 몰려온다. 어우 까만 남자새끼들이 몰려오니까 하나도 안 기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착한 척 미소.
"야, 전주는 진짜 비빔밥 맛있냐?"
"씨발 촌스럽게 그런 것 좀 묻지마 호구새끼야."
맞다. 진짜 촌스럽다. 서울촌놈들.
"남녀공학 다녔었냐?"
"어. 합반."
"오오오오!! 합반이었대 대박!! 아는 여자애 있냐? 예쁜애!! 다음에 소개 좀."
좆고딩주제에 무슨 장거리연애입니까 이 새끼야. 현실을 깨우쳐드리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얘네도 나한테 친절한데 내가 먼저 욕을 할 순 없어서 그냥 하하 웃고 말았다. 다행히 수업종이 금방 울려서 시커먼 남자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교과서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옆에 있던 애가 교과서를 툭 던져줬다.
"교과서 없냐? 나 축구부라 수업 안 들어도 돼. 잘 거니까 너 써."
"아, 고마워."
학교가 축구부로 유명하다. 수업시간에 아예 안 듣고 쳐자는 걸 보니 꽤 잘 나가는 애인가보다. 아니면 아직 입시철이 아니라 정신 못 차린 애인 건가. 요즘은 예체능 하는 애들도 공부 해야 한다던데. 상관없지 뭐. 근데 교과서 상태는 영 상관있다. 이게 책이냐. 표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책은 물에 젖었었는지 다 쭈글쭈글. 그래도 씨발 모범생 김성규는 공부를 해야하니까.
1교시가 끝나고 옆에 자는 애 책상에 얌전히 교과서를 올려놓고 앞에 애한테 2교시가 뭔지 물었다. 체육이란다. 아, 체육 싫은데. 9월이라지만 아직 낮엔 덥고. 아니 사실 그냥 몸 움직이는 게 귀찮다. 나이가 들수록 삐그덕 거리는 게. 체육복 없으니까 그 핑계로 빠져볼까.
"아, 너 체육복 없냐."
"어. 그래서 빠.."
빠질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씨발 이새끼가 말도 다 안 듣고 다른 애를 불렀다.
"진기야! 너 오늘도 체육 못 나오지? 전학생 체육복 없다는데 빌려줘라."
아까 내소개 할 때 교탁 앞자리에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쳐다보던 애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뒤돌아보곤 아 그래? 하면서 이 쪽으로 온다.
"아니, 난 괜찮아!"
"나 다리 다쳐서 어차피 못 나가거든. 괜찮으니까 빌려가."
"아 그게 아니고 나 오늘 몸이 별로 안 좋아서 못 할 것 같애."
존나 씨발 여자애도 아니고 뭐 이딴 변명을. 근데 진짜 하기 싫다. 이사하느라 가뜩이나 피곤한데.
"아 진짜? 어디가?"
"아, 나도 다리가 좀 안 좋아서."
어제 이삿짐 옮기느라 무리해서 허리랑 무릎이 안 좋다. 사실이야. 그렇게 아픈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실이야.
"그럼 할 수 없지 뭐. 나랑 보건실이나 가자."
반장한테 선생님한테 좀 전해달라 말하고는 교실 밖으로 나왔다. 보건실로 가는 진기라는 애를 가만히 뒤따랐다.
"남녀공학 다녔다며? 부럽다."
말을 걸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먼저 말을 걸어온다.
"부럽긴. 남고나 공학이나 안생기는 건 똑같애."
"하긴 그래. 나도 중딩 땐 공학이었는데 안생기더라. 근데 너 왜 사투리 안 써?"
"전학와서 쫌 긴장했나봐. 하하."
원래도 사투리가 심한 편은 아니었고 외가가 서울이라 표준어가 익숙한 편이었다. 근데 그걸 다 말하긴 귀찮아서 그냥 대충 말했다. 뭐,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약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라서 학교 생활 조용히 하고 싶었고 그래서 우선은 착한 척 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첫인상이 약해보이진 않았는지 시비 거는 애들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근데 너 눈 되게 작다. 아까 자기소개하는데 나 너 눈 감고 있는 줄 알았다니까?"
푸하하하하하하. 다른 교실은 수업을 시작해서 나름 조용히 웃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나한테는 크게 들린다 씨발. 이새끼도 눈 큰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사막여우 닮았어. 아닌가. 사막여우는 눈 안 작은데. 뭐, 여튼 닮았어."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고맙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받아줬다. 씨발 착한 김성규 코스프레 언제까지 해야 되냐. 남자새끼들끼린데 욕은 써도 되려나.
"난 중딩 때 여자애들이 토끼 닮았다 그러던데."
하... 진짜 끝도 없다. 할 말이 그렇게도 없니. 동물애호가냐? 근데 듣고 보니 쫌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어, 쫌 그런 것 같네. 하고 또 받아줬다. 나 진짜 착해.
다행히 보건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침대에 눕자 어제 못 잤던 잠이 갑자기 쏟아졌다. 이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늦춰지는 바람에 전학 오기 하루 전인 어제 이사를 했다. 뭐 왠만한건 이삿짐센터에서 다 옮겨주고 했지만 자잘한 것들 옮기고 어머니 도와주느라 잘 안 쓰던 힘 좀 썼다. 그리고 왠지 서울에서의 첫 날 밤이라 자기 싫어져서 내일 정리하면 되는 내 짐들을 다 정리했다. 그랬더니 벌써 새벽이어서 잠을 별로 못 잤다. 수업시간엔 그래도 긴장했는지 졸린 걸 몰랐는데 침대에 누웠더니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잠이 들려는 그 순간에, 동물애호가새끼가 말을 걸었다.
"자?"
자는 척 씹었다.
"이건 사실 비밀인데..."
열살난 기지배도 아니고 뭔 비밀이야 비밀이.
"나 사실 다리 일부러 다쳤다? 체육이 존나 하기 싫었거든. 흐흐."
반수면 상태에서 동물애호가새끼의 말이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은 머리로 이해했다. 체육 하기 싫은 건 나랑 비슷하네 뭐. 근데 범생이 같은 얼굴에 존나라니 조오오오온나 안 어울린다.
"너 근데 눈 작은 거 되게 섹시해."
지랄!!! 뭐야 갑자기. 씨발 뭐 저딴 소리를 해? 소름이 오도도 돋아서 잠에서 확 깼지만 티는 안 냈다.
"섹시한 사막여우. 섹시한 비빔밥."
지 혼자 낄낄대더니 금방 잠들었는지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린다. 난 잠이 다 깨버려서 도저히 다시 잘 수가 없었다. 쟤 게이인가? 계속 고민을 하다가 서울에서는 남자끼리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촌놈 같은 생각을 했다. 근데 정말 그럴 수도 있잖아. 어머니가 전라도 남자들이랑 서울남자는 다르댔어. 바로 저런 걸 거야.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한테도 못 들어본 섹시하다는 말을 남자한테서 듣다니. 뭐 저딴 애가 다 있지 씨발? 결국 한 잠도 자지 못했는데 종이 쳤다. 저 새끼랑 같이 있기 싫어서 먼저 가버릴까 했는데 종소리가 나자마자 옆에서 부스럭부스럭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성규야."
움찔. 근데 아까는 몰랐는데 이 새끼 좆고딩 주제에 목소리가 되게 낮다. 그래서 쪽팔리지만 잠시 좀 위축됐다.
"종 쳤어. 일어나."
자다 일어난 척 멍한 표정을 지으며 스륵스륵 일어났다.
"난 교무실 좀 들렸다 갈게."
또 싱글벙글. 저 새끼는 인생이 행복한가보다. 그래도 찝찝했는데 같이 안 가서 다행이다. 어. 대충 대답해주고는 얼른 교실로 돌아갔다. 체육이 끝나고 들어온 애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자리에 가만히 앉으니까 축구부가 옷을 다 갈아입고는 말을 건다.
"잘 쉬었냐?"
"어. 아까보단 좀 낫네."
"진기 착하지?"
진기? 아, 동물애호가새끼. 착하지. 아주 착해. 나한테 섹시하다고 칭찬도 해줬어. 갑자기 다시 생각나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걔가 말도 별로 없고 가끔씩 존나 이상한 개드립을 치긴 하지만 애는 진짜 착해."
"말이 없어?"
"엉. 말 별로 없잖아. 드립 뭐 칠까 생각하느라 말 잘 안해."
그럼 아까 섹시하다 말 했던 것도 그냥 다 드립인가. 그래! 게이라니 말도 안 돼. 섹시한 비빔밥이라는 이상한 드립일 뿐이야. 원래 말없는 스타일인데 착해서 전학생이라 어색할까봐 계속 말 걸었던 거야. 동물도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몰라. 아까 생각없이 대화할 때는 뭐 저런 쓸데없는 소리만 시끄럽게 늘어놓나 해서 짜증났는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런가보다 싶다.
"쟤한텐 욕도 못하겠다니까."
축구부는 지 자리에 가서 또 쳐잔다. 그나저나 동물애호가 빼고는 이름 아는 애가 없네. 교과서도 빌려줬는데 축구부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너 이름 뭐냐 하고 물어보기도 쪽팔리고. 그나저나 쟤가 자서 교과서 빌려달라고도 말 못하고 이번 시간은 필기만 해야겠다. 노트를 꺼내고 앞을 보니까 어느새 동물애호가는 교탁 앞 자기 책상에 앉아서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 모범생처럼 생겨가지고는 진짜 모범생인가보다. 그러면서 옆에 애들이랑 떠들기도 한다. 수업종이 치고 애들은 지자리로 슬슬 들어가 앉는데 동물애호가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려서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뭔가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킨 것 같아서 쪽팔렸지만 그렇다고 눈을 피하는 게 더 쪽팔릴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저 동물애호가는 원래 웃는 상인 것 같은데 눈이 마주치니까 더 싱글벙글. 아까 뭔가 오해해서 계속 맘 속으로 새끼새끼 한 것이 미안해 같이 방긋 웃어줬다. 그랬더니 입모양으로만 뭐라뭐라 한다. 그리고는 고개를 딱 앞으로 돌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분명 뭐라 그랬는지 보긴 봤는데 잘 이해가 안 가네.
귀여워.
지랄!! 씨발 쟤 진짜 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