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선 향기가 나, 짜증날 정도로 달콤한 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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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자명종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때리고, 순식간에 소리를 덮어버린 난 다시 이불 속으로 푹 들어간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잠. 따스함을 느끼며 발끝을 꼼지락댄다.
포근하다 포근해. 포근한....권순영. 으, 나 방금 뭐래? 순식간에 잠이 번쩍 깼다. 포근한 권순영? 와 김여주 돌았나 진짜. 이불속에서 번쩍 뜨인 눈은 쉽게 감길줄을 몰랐다.
눈을 멀뚱멀뚱 깜빡이는데, 찬찬히 기억들이 제자리를 맞춰 온다. 살면서 머리가 아파서 정신까지 잃어본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애들의 소문에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긴 했나보다.
속닥대는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마다 정신이 어질 하고, 누군가 머리를 밀쳐대는 것처럼 사방이 핑핑 돌았다. 그 혼란의 끝에 다다랐을 때에는, 한 순간에 어지러움이 멈추고. 포근하게 나를 감싸는 손길만이 느껴졌다.
그래. 권순영. 어제는 권순영이었다. 근데 일어나자마자 어떻게 걔가 떠오르는건지 어째 자존심이 상한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가 세수를 벅벅 한다.
'너한테선 향기가 나, 짜증날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한번 더 얼굴을 벅벅 문지른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방에 들어와 스킨을 바르는데, 화장대 옆으로 아무렇게나 놓여진 분홍색 향수통이 보인다.
16살이 된 기념이라며 작년에 엄마가 선물해 줬었지. 음, 안 뿌린지 좀 됐는데.
'향기가 나잖아.'
절대 권순영 때문은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향수나 뿌려볼까. 아니 학교가는데 무슨 향수를 뿌리고가. 그래도 한번 정도 뿌려 볼까?이걸 뿌려, 말아. 몰라 그냥 뿌릴래. 칙-
*
수업시간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권순영이 쳐다보고 있을까 싶어서. 근데 뒷통수가 슬슬 따가워진다. 내 짝지가 시계를 돌아보다 흠칫 놀라더니 그 뒤로 내 눈치를 본다.
백퍼센트 권순영을 본 거다. 수업시간에 안 자는걸 보고 깜짝 놀란거겠지.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것도. 확신에 차 뒤를 휙 돌았는데, 어라. 권순영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갑자기 책상 옆에서 고개를 쑥 내밀더니 소리 없이 낄낄 웃는 권순영. 아 뭐야 쟤는. 책상 밑에 숨어 있던 거였다. 권순영의 입이 열리더니 뭐라고 속삭인다.
너-방금-나-찾고-있었지-
권순영은 뿌듯한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다. 왜 저래. 찌릿 째려봐 주며 입을 벌렸다.
공부나-해-바보야-
고개를 다시 돌리려는데,
니-냄새-맡고-싶다-
자기 양 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코에 대소 숨을 들이마시는 시늉을 하고는 웃는다. 또 저래. 저 변태 자식. 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응징한다. 권순영은 갑자기 풉, 하고 웃더니 내 얼굴을 가리킨다.
너-얼굴-빨개졌어-
아 뭐야. 왜 얼굴은 갑자기 빨개져가지고.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아 쪽팔려. 누가 보면 권순영 좋아하는 줄 알겠네. 손틈새로 빼꼼 권순영이 보인다.
아-귀여워-
한마디 뱉고는 또 혼자 자지러진다. 얼굴이 더 화끈거린다. 권순영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권순영."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다. 선생님이 들으셨나 보다. 꼴 좋다 권순영. 내 저럴줄 알았지. 권순영은 아직도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실실거리고 있다. 저러면 안될텐데.
선생님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충격 그 자체다. 입학때부터 수업시간에 얼굴 한번 보인적 없던 노란머리가. 저렇게 시원하게 웃어대고 있으니. 놀랄만도 하다.
"권순영."
불안한 얼굴로 다시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 권순영은 이제야 웃음을 그치고 조용히 대답한다.
"네."
선생님은 권순영이 미쳤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얼빠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씀하신다.
"바, 밖으로 나가 서있어라."
애들의 얼굴도 만만치 않았다. 그 얼굴을 지켜보는 게 생각보다 재밌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감자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몇몇 애들은 아예 입을 쩍 벌린채로 권순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진짜 웃겨. 나만 아는 즐거움에 속으로 뿌듯해하고 있는데. 순간 권순영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때렸다.
"김여주,"
응?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뒤를 쳐다보니 권순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김여주도 같이 떠들었어요."
*
그렇게 결국 나란히 복도에 서 있다. 나쁜 놈. 탈모와서 머리 다 빠져버려라. 길가다 개똥밟고 자빠져버려라. 권순영을 저주하며 노려보는데 권순영은 아까부터 바람빠진듯 끅끅 웃어대고 있다.
"야...너..."
말을 잇다가 다시 웃음이 터진 권순영. 난 미운 마음에 정강이를 살짝 발로 찬다.
"아!"
다리를 문지르며 몸을 굽히는 권순영. 심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여다 보는데 나랑 눈이 마주치더니 다시 실실거린다. 휴, 됐다 됐어. 난 허리를 펴고 복도를 노려본다. 권순영은 한참 후에야 숨을 고르고는 나를 내려다 본다. 몰랐는데 권순영 키 크구나. 아니 내가 작은건가?
"아 거기서 내 이름은 왜 부르냐고."
투덜대는 내 말에 권순영은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너도 같이 떠들었으니까."
"그러게 누가 수업시간에 그렇게 웃으래?"
"그러게 누가 수업시간에 그렇게 귀여우래?"
와, 방심했다. 짜증나. 말문이 막혀 고개를 옆으로 떨어트리는데 권순영의 시선이 자꾸 내 얼굴을 따라온다.
"아 계속 쳐다보지 말라고."
복도를 잔뜩 노려보고 있는 내 옆으로 또 실실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 또 얼굴 빨개진다."
"아 보지마!"
수치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아랑곳하지 않는 권순영은 고개를 꺾어가며 내 얼굴이 붉어져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권순영이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은 애였지?
고개를 푹 숙인 내 머리 위로 뭔가 무거운 것이 놓인다. 권순영이 두어번 머리를 쓰다듬더니 고개를 잡아 부드럽게 들어올린다.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권순영은 나를 마주보고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을 가져간다.
"예쁘니까 이쯤에서 선물?"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눈을 감더니 깊이 들이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땐. 웃고 있는 권순영과 함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이제 깨달았다.
난 권순영의 그냥 눈빛에 꼼짝 못하는게 아니라. 내 향기를 맡을 때의 눈빛에 꼼짝 못하는 거였구나.
처음 만났을때도. 계단 벽에서 나를 밀쳐 왔을때도. 옆자리에 앉혔을때도. 그리고 지금도. 온 몸이 마비된 것 처럼 멈춰서 권순영을 바라보고 있다.
"어어, 또 이런다."
권순영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웃는 표정으로 돌아 온다.
"너가 이럴때마다 이유가 궁금했는데."
"..."
"이제는 상관 안해."
"..."
"나야 좋지."
"..."
"네 향기 더 잘 맡을 수 있으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권순영은 손을 내려 뒷목을 감싸더니 내 목덜미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심장이 뛴다. 얘는 진짜 사람 헷갈리게 한다. 내 향기를 좋아하는 거면서, 나를 좋아하는 척. 흔들려선 안된다. 난 쟤한테 관심 하나도 없다. 지금 심장이 뛰는 건, 그냥. 음. 그래. 권순영 머리가 너무 노래서 놀란 것 뿐이다.
내 냄새를 맡던 권순영이 멈칫 한다. 조심스럽게 떨어져 올라오는 얼굴은 뭔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다. 갑자기 왜? 눈빛으로 묻는 나를 감지한 모양일까. 권순영이 천천히 말한다.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이상한 냄새? 나한테서?권순영의 표정은 급격히 시무룩해진다. 급기야 입이 한발 나온다. 권순영이 저러는 모습 처음 본다. 나 좀 당황스럽다.
"이거 네 냄새 아니야..."
한껏 인상을 구기며 나를 쳐다 본다. 도대체 뭐지? 오늘 뭐 특별히 한거라도 있었나?이상한 냄새, 이상한 냄새, 이상한 냄새,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오늘 아침에 급히 나오며 뿌린 향수. 귀 뒤에 뿌리면 향기가 오래 간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는 뿌렸었다. 설마. 그리고 지금 권순영이 향기를 맡은 위치가. 바로 그 근처. 이쯤 되면 확실했다. 권순영은 내 향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거였다.
"너 혹시...향수 같은거 뿌렸어...?"
권순영은 축 쳐진 목소리로 묻는다. 역시 향수 때문이구나.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거 뿌리지 마, 응?"
난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향수때문이었을 줄이야. 갑자기 민망해진다. 이 향수 왜 뿌렸지. 누구때문에 뿌린거였더라. 아. 오늘 쪽팔일일 되게 많네.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게 느껴진다. 권순영은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설마 나 때문에 뿌린거야?"
세상에. 누가 나 좀 여기서 구해줘. 고개를 파닥이며 젓고 싶지만 몸이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오늘도 향기 맡을것 같아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는 듯 권순영은 입술을 꽉 깨문다.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
"..."
"근데 한번만 더 이러면, 그땐 혼내줄거야."
깨문 입술을 풀고 활짝 웃는 권순영. 그래 이 눈빛은, 이 목소리는, 권순영은. 나에게만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