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DOWN
붕괴
*
그렇게 나는
너의 시선이 되어
걸려 있을 테니
그렇게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
-김소형 <그림 찢는 살롱> 중,
*
“…늦었는데 집에 안 들어가고 뭐해.”
“열시밖에 안됐는데 집에 왜 들어가요.”
중학교 삼학년부터 나의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람이었다. 애타게 원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달콤한 향기로 가시를 숨기고 있는 남자.
나의 맹독, 나의 순수.
*
나의 열여섯은 두려울 것이 없는 나이였다. 그가 옆집에 이사를 온 날부터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민윤기의 현관을 두드려대곤 했다.
고작 삼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화폭처럼 섬세한 그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아보려고.
어눌하게 뭉개지는, 묘하게 색정적인 말투와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보려고.
열여섯의 패기를 여유롭게 받아주던 스물 아홉의 민윤기는 노련했다.
안녕, 꼬맹아.
그에게 건넬 때는 쿠키가 담겨 있던 빈 그릇을 찾으러 왔을 때, 현관문을 연 그는 알만하다는 듯이 웃으며 턱짓을 했다.
잠깐 안에 들어왔다 가.
나에게는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다. 보통의 열여섯은 종종 멍청한 착각을 곧이곧대로 믿기 마련이었니까. 나는 그도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가슴에 품으며 수줍게 그의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귀 위에 연필을 걸고 있던 민윤기의 집은, 그를 닮아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거실 중간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여러 대의 노트북과 스피커, 신디사이저와 키보드, 기타를 포착한 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최대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던 것 같다.
저기, 직업이 뭐에요?
너, 나 좋아하지.
두개의 질문이 교차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가타부타 뭐라 얘기할 틈도 없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고 그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날 밤 방에 틀어박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감정을 들킨 것에 대한 쪽팔림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크게 내 머릿속에서 고함을 질러 댔다.
나는 근 세달간 그를 피했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등굣길에 빈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보기라도 하면 시간이 늦었는데도 굳이 먼 길로 애써 돌아서 가곤 했다.
그렇게 열심히 도망다녔는데,
안녕하세요. 에…, 일일 강사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된 작곡가 민윤기입니다. 반갑습니다.
결국, 잡혔다.
하필 우리 학교에 강연을 올 게 뭐람. 새빨개진 얼굴로 조용히 투덜거렸는데도 교탁에 선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도망갈 틈도 없이 하교길에 그대로 팔을 붙잡혀 집까지 그와 함께 걸어갔던 그날부터, 나의 길고 서글픈 짝사랑이 공식적으로 막을 열었다.
*
나의 열아홉은 포기를 알아가는 나이였다.
“오늘은 여자친구 안 오나봐요?”
“대판 했거든.”
“그렇게 여친한테 막 굴다 차이면 평생 노총각으로 살아야 돼요, 이 아저씨야.”
“나중에 늙으면 니가 거둬주면 되지.”
우리는 달빛이 드리워진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아 평소와 같이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열아홉은 착각과 진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책임의 수치이다. 니가 나를 거둬라 어째라 하는 민윤기의 덤덤한 말투가 진심과 거리가 멀다는 것 정도는 이제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장난 섞인 빈말에 덜컹하는 가슴은 어쩔 수가 없다. 찢어질대로 찢어져 너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처음처럼 일렁이는 마음의 온도만큼은.
“곡 작업은 잘 돼가요?”
“말도 마라, 아이돌이랍시고 곡 써달라고 찾아와서 노래 하나 제대로 못 부르는 걸 보면 얼마나 속이 터지는지. 엿 같아서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야, 요즘 애들은 다 그러냐?”
“때려치우긴 무슨, 작곡 못하면 그냥 백수면서 그래요. 다 그렇게 어렵게 돈 벌어서 먹고 살고 하는거죠.”
“와- 너 언제부터 이렇게 염세적으로 변했냐, 꼬맹이가. 고딩이면 고딩답게 좀 순수하게 꿈과 희망의 동산에서 살아야지.”
“꿈과 희망 같은 소리 하네. 아, 빨리 장가나 가요. 서른 두살이면 진짜 이제 아저씨야, 아저씨.”
민윤기의 어깨를 손으로 툭 치며 괜시리 짜증을 내고 일어났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은 아무리 많이 어림짐작해봤자 이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돈 잘 벌고, 잘생긴 동안인 데다 센스도 좋은 저 남자는 몇 년 후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겠지. 그가 지금 만나고 있는 스물 후반의 단정하고 예쁜 여자친구의 남편이 되고, 그를 똑 닮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깔끔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가 사는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지금처럼 그네에 앉아 종종 박하향이 나는 담배를 몇 대 피우고 그가 좋아하는 영국 밴드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화양아,”
“왜 불러요.”
궁상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아 재빨리 등을 돌리고 아파트 단지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메는 목을 숨기려 퉁명스럽게 응답했고, 눈치 빠른 그는 지포라이터를 딸각이는 것으로 뜸을 들여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을 시간을 준다. 당신을 너무 잘 알아서 헛웃음이 나. 등을 돌리고 서 있어도 당신이 지금 짓고 있는 표정, 앉아있는 자세,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의 입모양까지 전부 하나하나 빠짐없이 눈에 빤히 보여서.
하아-. 더운 한숨이 차가운 공기에 닿자 뿌옇게 김이 서린다. 서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코가 닳은 낡은 운동화만 애꿎게 내려다보았다.
“나 요즘 도희랑 결혼 얘기 오가고 있어.”
“….”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누군가가 표백제를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민윤기의 결혼. 물론 언젠가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전에는 구속되는 게 그렇게 끔찍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민윤기가 포함되어 있던 일상의 기억들만 하나하나 텅 비어 있는 머리를 치고 올라왔다.
나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놀이터에서 그가 낯선 여자와 오랫동안 입을 맞추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열여섯의 겨울,
그릇에 담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그의 문을 두드리자 샤워가운을 입은 그 여자가 발그스름하게 물든 얼굴로 민윤기 대신 나를 맞던 열일곱의 가을.
그가 다섯 개의 히트곡을 낸 후로, 전에 비해 확연히 바빠져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열 여덟의 봄은 겨울보다도 차가웠다.
또 뭐가 있었지. 날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금 기억을 더듬어 본다.
참, 방황하던 열 여덟의 어느 여름 밤에는, 그에게 담배를 피우는 법을 배웠다.
한모금을 들이키곤 매캐한 연기에 쿨럭쿨럭 기침을 하자, 푸스스 웃으며 따뜻하고 섬세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습한 여름의 온기를 기억한다.
어린애처럼 펑펑 우는 나를 다독인 후에,
응, 자기야-. 늘상 그렇듯 무심한 목소리로 애인의 전화를 받으며 천천히 담배를 태우던 그의 작은 버릇들을 가슴 한 구석에 접어 넣는다.
“…지 마요.”
“어?”
“…결혼…하지, 마요…”
그리고 토해낸다. 종이학처럼 구깃구깃 접힌 마음들을. 응어리진 기억들을. 내 것이 될 수 없는 남자의 화사함에 분해 울었던 십대의 치기 어린 사랑을.
신경질적으로 비어져나오는 눈물에 내 등 뒤로 다가오던 민윤기의 발자국 소리가 멎는다. 나는 끕끕대며 목에 차는 울음을 애써 삼킨다. 그의 앞에서 어린애처럼 징징 우는 건 딱 질색이다.
“너…”
“아저씨도 알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상냥했어요? 나는 꼬맹이라서,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도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
“꼬맹아.”
“아저씨가 뭔데 나를 무너뜨려…”
결국 바보처럼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진짜 꼬맹이처럼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성큼성큼 다가온 민윤기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지만 나는 고함을 지르며 매몰차게 그의 손길을 떨쳐냈다.
굳은 표정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다시 잡아 자기 쪽으로 내 몸을 돌려세운다.
“울지 마.”
“아저씨는, 진짜, 나빠요, 흐으-”
“미안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미안하다.”
그의 품에서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눈물에 젖은 뺨 위로 민윤기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나뭇잎이 날아온 것처럼 가볍고 산뜻하게 닿았다 이윽고 천천히 떨어져나간다.
시원한 박하 냄새가, 그네에 나란히 앉아 같이 담배를 피우던 어느 여름밤의 공기처럼 따뜻하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느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순간 순리처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년하고도 4개월동안 품어왔던 나의 외사랑이, 어느덧 끝을 맞이했다는 것을.
안녕, 아저씨.
안녕, 외사랑.
안녕, 나의 여름.
놀이터에서 민윤기와 작별인사를 나눈 가을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
안녕하세요, 봄혹은겨울입니다 :) 큰 기대 없이 첫 편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고, 독방에서도 추천을 해주셔서 정말 많이 놀랐어요!
부족한 글솜씨지만 예쁘게 봐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일일이 답글을 달지는 못하지만, 제 글을 읽어주시고 예쁜 댓글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전부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수줍)
참, 이번 에피소드인 BREAKDOWN에는 스페셜 번외가 있어요! 이번 에피소드의 번외는 열번째 이야기를 마친 후에 올릴 예정이랍니다.ㅎㅎ
다음 에피소드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방탄소년단/민윤기] 나쁜 남자 민윤기 A to Z (02. BREAKDOWN)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1/06/22/7b251badad56cc3d020e38c77a573e2c.jpg)
현재 sns에서 난리난 눈쌓인 포르쉐 낙서 박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