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에피소드에는 마약, 폭력과 같은 소재들이 등장합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반응연재입니다. 엄지, 댓글은 작가가 글을 쓰는데 큰 힘이 되어요 :)
*A to Z의 각 에피소드들은 연개성이 없는 별개의 단편들입니다!
*아직 암호닉은 받고 있지 않습니다. 암호닉 신청은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 다섯번째 에피소드를 마친 후에 받을 예정입니다.
*A부터Z까지 26개의 에피소드가 모두 완결된 후에는 독자님들의 투표를 받아 가장 득표 수가 많은 에피소드 하나를 정식으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
(추후에 정식으로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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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성동혁 <여름 정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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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나라에서는 흰노루와 검은 사자들이 보랏빛 강가에 엎드려 물을 마신다. 나는 혼란과 환희, 그 사이 어딘가를 부유한다. 답답한 가슴이 뻥 트이는 기분에 한껏 목청을 키워 즐겁게 소리지른다. 깨질 듯이 어지러운 머리의 통증 따윈 잊어버리고 이 순간을 즐기자. 머리를 뒤로 젖혀 빗물에 젖어 축축해진 그의 어깨에 기대며 나는 모퉁이부터 이지러지는 분홍색 손가락들을 천천히 움직여본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
*
“…페이퍼 줘 봐.”
잔뜩 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깨에 기댄 머리를 옆으로 돌리자 까끌까끌한 청자켓의 깃이 볼에 닿는다. 새벽 바람의 신선한 풀내음이 매캐한 대마초 연기와 섞여 코 속으로 들어왔다. 고무 밑창이 떨어지기 시작한 싸구려 워커 아래로 누군가의 토사물이 질퍽하게 밟혀, 가누기 힘든 몸을 억지로 움직여 슈가의 옆으로 더 바짝 붙었다. 차갑게 언 손의 감각이 없어진 건 오래된 일이다.
덜덜 떨리는 오른 손을 자켓 안주머니에 쑤셔넣고 종이를 찾는다. 구깃구깃한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얼마나 남았어?”
“1온즈.”
“…두대만 더 피우고 남은 건 팔자.”
반쯤 찢어진 페이퍼를 받아든 슈가가 익숙하게 종이를 핥아 대마잎을 말았다. 여전히 정신이 몽롱한 나는 미끄럼틀 위에서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포라이터의 부싯돌이 찰칵이는 것과 함께 종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린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자 연기 한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슈가가 농밀하게 입을 맞추어왔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그의 영혼이 입을 통해 스며든다.
내 더럽혀진 순수를 핥아내린다.
귓가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울렸다. 차가운 손 하나가 뱀처럼 내 셔츠 안으로 미끌어져 올라왔다. 익숙하게 후크를 푸는 손길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그의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아, 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밀어넣는다.
먼 데서 불어오는 살랑바람에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
“…어디 가?”
“토트냄에. 먹을 것 좀 구하러.”
“나, 혼, 혼자 있기 싫어. 슈가, 제발.”
“조용히 하고 잘 들어. 조금 있으면 정키가 올 거니까. 이거, 제대로 건네줘라.”
“싫어, 싫어, 싫다니까!”
"시끄러워."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슈가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자, 대마잎이 든 지퍼백을 낚아챈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불안한 예감에 그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먹을 걸 구해온다는 말은, 적어도 두 세시간은 있어야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안돼. 본능적으로 그를 잡는다.
네가 떠나면, 괴물이 몰려올 거야. 또 다시 나를 범하고, 나를 바닥으로 내던지고, 독이 묻은 혀로 내 살을 핥고,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안겨준 채로 쥐가 가득한 상자에 나를 가두겠지.
두려움에 몸을 공처럼 말았다. 자기야, 그 새까만 짐승들은 나를 손끝부터 먹어치울 거야.
구름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뭉실뭉실하게 내 몸을 채운 행복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한숨을 쉬며 나와 눈을 맞춘 슈가는 말라붙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몇 번 맞추고 일어선다. 등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에 절망했다. 슈가가 내게서 멀어질수록 그들은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파충류 같이 차가운 눈동자들, 인간인지 짐승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들.
“씨발, 꺼져! 꺼지라고. 꺼져!”
무거운 몸뚱아리들이 나를 짓누른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힘껏 손을 뻗어 슈가가 정키에게 전해주라고 두고 간 작은 철제 상자를 열어 흰 가루를 손등에 쏟았다. 코를 짓이기다시피 손등에 눌러 가루를 흡입한다. 한번, 두번, 세번. 남은 가루는 남김없이 핥는다. 움찔거리던 놈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자꾸 웃음이 나서 소리 내어 웃었다.
피부가 자꾸 가렵다. 며칠간 씻지 못해 그런가. 손톱을 세워 긁었다. 괴물들이 사라지니 이젠 몸이 가려워.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
한참 동안을 미끄럼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슈가?”
작은 목소리로 불러봤지만, 입을 떼자마자 그의 발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왼발을 끄는 소리가 나지 않는데다, 훨씬 무겁다. 다시금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을 긁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낮추어 주변을 살핀다. 누구지, 누굴까. 짭새면 어떡하지. 아니, 갱단 녀석들 중 하나면 어떡하지. 이름 모를 누군가가 미끄럼틀로 올라오고 있다. 쿵, 쿵. 철제 계단에 울려퍼지는 발소리에 숨을 죽여 흐느꼈다.
“어이. 네가 김화양이지? 민윤기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
“한국말 못해?”
“하,한국인이세요?”
“벙어리는 아닌가 보네. 난 민윤기 친구. 한국계 혼혈이고, 본명은 김남준이다. 보통은 정키라고 부르지.”
“민…윤기?”
런던에서 듣는 모국어는 유난히 낯설었다. 민윤기라. 입안에서 이름을 굴려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이다. 조금씩 맑아지는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김남준이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떠나기 전에 슈가가 분명히 정키라고 했었지. 정키에게 저 철제 통을 전해주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슈가와 정키가 아는 사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또 이 사람은 민윤기의 친구라고 자기소개를 했지. 민윤기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라고.
내 공허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정키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는 듯이 아아,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역시 모르는구나. 슈가 본명이 민윤기거든. 뭐, 너무 섭섭해하진 마. 나도 녀석이 이름을 알려주기까지 삼년이나 걸렸으니까.”
“…”
“뭐, 그건 됐고. 내가 좀 바빠서 빨리 거래를 했으면 좋겠는데. 약속했던 코카인은 어디에 있지?”
“이거…”
거래용이었다니. 당황스러운 얼굴로 반쯤 빈 통을 정키에게 내밀었다. 나 때문에 슈가가 곤란해지면 어떻게 하지. 그 빌어먹을 괴물들만 아니었어도. 빨개진 내 얼굴과 가벼운 통을 번갈아보던 정키가 미간을 찌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없는 꼬마 아가씨네. 슈가와는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지라, 지금 당장 뭐 깽판을 치지는 않겠다만. 다음주까지 새로 코카인 볼을 마련하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러니까, 너 때문에 슈가가 곤란해졌다, 이 말이야.”
"슈가가요?!"
"어떡하지. 화내겠는걸."
화가 난 슈가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떨리는 손을 뻗어보지만 본 체도 하지 않은 정키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어떡하지. 나 어떡해.
살려줘요, 엄마.
*
“…방금 뭐라고 했어?”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미안해, 진짜 미안해. 제발 때리지 마, 슈가, 내가 잘못했어. 응?”
“그니까, 너 혼자 볼 하나를 앉은 자리에서 빨았다고? 이 씨발년이 돌았나. 그거 하나에 가격이 얼만 줄 알고 코에 쑤셔넣어?”
평소에 자상한 슈가는, 화를 낼 때면 마치 악마처럼 변한다. 다리에 힘이 빠진 나는 어두컴컴한 창고 안의 더러운 매트리스에 널부러져 있다. 하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소리를 내어 웃던 그는 왼발에 힘을 실어 내 배를 찬다. 내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들이닥쳐 벌레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고통스러워하던 나를 보던 그가 철제 통을 열어 얼마 남지 않은 코카인을 마신다. 킁,킁.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공포가 밀려왔다. 타앙,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통이 내 발치로 굴러온다. 두려움이 묻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뭘 기다리고 있느냐는 듯 턱짓을 한다.
“남기면 죽는다.”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통을 집어들고, 남은 내용물을 손등에 쏟았다. 한숨을 한번 쉬고 가루를 세게 들이키자 코 속을 태우는 강렬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는다. 그의 굳은 얼굴에 한번 힐끔 시선을 주고 빈 통을 핥았다.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가 천천히 내 코 앞에 쪼그려앉는다. 망설이다 슈가의 재갈색 눈동자를 쳐다봤다.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동공이 평소보다 두 배 가량 확대되어 있다. 텅 빈 그의 표정에 숨이 턱턱 막힌다. 극도의 두려움에 약기운이 얹히면서 묘한 쾌락이 입혀졌다. 다시,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은 쾌감이 멍든 배를 차고 들어온다.
“우리 예쁜이,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눈을 한껏 접어 웃는 슈가의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는 감정 변화가 심한 편이기 때문에 아직 방심할 수 없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약을 한 그는 늘 벌을 줄 때면 여러가지 옵션을 늘어놓는 주제에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한다. 오른손을 치켜들어 내 뺨을 후려갈긴 슈가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빠르게 부어오르는 왼 볼이 쓰라렸지만 약기운 탓인지 그다지 아프진 않다.
뭘 생각하면 덜 무서울까. 강아지, 고양이. 따뜻한 곰인형, 엄마, 엄마, 엄마.
탈칵, 소리와 함께 그가 벨트의 버클을 푸른다. 채찍질을 할 심산인 걸까. 무릎을 양팔로 껴앉고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줬으면.
“고개 들어, 쌍년아.”
가죽벨트로 얼굴을 갈기려는 걸까. 최대한 울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어라. 벨트는 버클만 풀린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다.
물음표가 그려진 얼굴로 슈가를 쳐다봤지만,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청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브리프의 버튼을 푸른다.
아, 이건 설마.
아무래도 약을 과다복용했는지 눈 앞이 자꾸 흐려졌다 새카매지기를 반복한다. 고개를 털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신었던 노란 컨버스가 유독 선명하게 들어온다.
빗소리와 함께 먼 어디에선가 휘파람처럼 레퀴엠이 들려왔다.
광기 어린 재갈색 눈에서, 하얗게 각질이 뜬 입술로 시선을 옮기자, 네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뒤틀려 올라간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내게 명한다.
“빨아.”
+)브금
알려달라고 하시는 독자분들이 계셔서 알려드립니다! 앞으로도 브금을 듣다가 제목이 궁금해지시면 얼마든지 물어봐주세요 :)
(그렇다고 댓글에 브금만 여쭤보고 가시면 섭섭해요ㅠㅠ)
02편. Troye Sivan - Fools (Filous Remix)
03편. Kiiara - Gold
+)사담
안녕하세요, 봄혹은겨울입니다.
오늘의 소재는 유달리 무겁고 음...미쳤죠ㅋㅋㅋㅋ
(사실 얘도 장편 구성이었어요...)
이번화의 윤기는 나쁜 남자라기보단 미친 남자네요. 윤기야 미안...
소재는 사실 보시다시피 꽤나 간단해요! 런던의 슬럼가에서 험한 일을 하며, 인생을 막 살아가는 마약중독자들의 이야기랄까요.
보니 앤 클라이드 컨셉이라고 해야 하나. 트러블메이커의 현아와 장현승 같은 느낌이에요ㅋㅋ
윤기는 폭력적이고, 여자주인공은 마약에 지나치게 중독되어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 힘들어지죠. 이렇게 망가질대로 망가진 여주를 윤기는 끝까지 안고 갈까요?
화양이가 보는 괴물이라던지, 벌레가 몸을 기어가는 느낌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전부 마약 부작용들이라 하네요.
참, 또 모짜르트가 완성하지 못하고 작곡하다 죽은 <레퀴엠>은 보통 장송곡으로 많이 쓰여요. 죽음을 상징하는 노래라죠.
댓글 남겨주시고 신알신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 일일이 답글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정말 많이 감사드리고, 사랑해요.
다음편은 저번에 약속드린 특별편과 함께해서 두 편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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