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정말 그의 말대로 우리는 같이 사냥을 나갔다.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하, 세자빈 마마는 말을 타시면 아니되옵니다..”
“어찌 세자빈은 말을 탈 수 없다는 것인가? 내 안전하게 내가 태워 갈것이니라.”
“하오나, 보는 눈이 많사오니 그 체통을 지키시어 장차 나라의 어머니가 될 마마의 정숙함을..”
“어허, 말을 타는 여인이 정숙하지 않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되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말을타고 싸운 여장부의 말은 들어보았노라. 지금의 대원수도 여인이 아니더냐.”
“하오나, 원수는 ..”
“듣기 싫다, 부인 이리오시오.”
그는 놀랍도록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내 치맛자락이 혹여 나풀거려 속살이라도 드러날까 전정긍긍해 하는 신하들을 뒤로하고, 내게 얇은 천이 드리우는 화려한 전모를 씌웠다.
전모라.. 옛 조선 기녀들이 쓰던 것이라 배웠는데.. 왕가의 것이어선지 화려함이 말로 이루 다 할 수가 없었다. 하얀 종이를 겹겹이 붙여 단단해진 그 모자위를 수놓은 금빛 수와 보석에 나는 그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제 3장 , 내 마음을 알 수가 없구나.>
파격적인 사냥 사건 이후, 중전마마가 가애관에 찾아왔다.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러 갈 때 외에 다른곳에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주 고고하고, 기품이 있어보이는 분이었으나 동시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아름다운 꼭두각시, 혹은 조용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무서운 사람일까. 그녀는 차분히 녹차를 다 드시곤 질문을 건네셨다.
“세자빈, 혹 이 녹차의 맛을 내기 위해선 어찌해야 하는지 압니까?”
“송구하오나, 잘 모르겠사옵니다 마마.”
“그 떫고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첫 번째로 우려낸 물은,”
다 비워진 녹차잔이 바닥에 내리쳐져 산산히 깨졌다.
“버리는 법이지요.”
옆에 있던 상궁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며 눈치를 보는 듯 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없는 것이 다행인걸까?
“소녀가 녹찻잎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소녀에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아슬아슬한 첫 만남이었다.
그 후, 세자빈을 책봉하기 위해 궁 안은 바쁘게 돌아갔다. 입단속 덕분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정국도 바쁘게 움직이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혹은 맞이하기 위해 초대하는 글을 썼다.
나는 하루 빨리 세자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한 나라의 중전, 백성의 어머니가 될 나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동시에 현재의 중전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감이 들었다. 나는,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꽃 향내음 가득한 물안에서 부드러운 천으로 몸을 닦고, 정갈한 몸으로 세자빈 책봉식에서 해야할 행동, 해서는 안되는 행동 마음가짐 몸가짐 모든 것을 교육받고 또 교육받았다.
형식적인 것은 딱 질색이라며 넌덜머리를 내던 내가 어느새 집중하여 그 말을 듣고 또 적어가며 외우는걸 보며 이따금씩 헛웃음 지었다.
전정국,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한번에 날 휘어잡은걸까?
피곤해진 몸임에도 그가 보고 싶어, 아직은 서툴게 수를 놓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부인, 나 왔소.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소. 근데 이리 보니, 해가 있는 아침보다 되려 달이 있는 밤이 더 좋은것만 같구려.”
뒤에서 나를 따스히 감싸오는 온기와, 그 말에 내 마음이 또 다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이 사내는 여인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법을 아는 것만 같다.
“저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무릇 해는 임금이요, 달은 중전을 뜻하지 않사옵니까. 해 없이는 달도 이 나라도 빛날 수 없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살며시 고개를 들면, 맑게 웃고 있는 그의 용안이 보인다. 전정국, 이 나라의 세자, 그리고 나의
“어허, 부인. 서방님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소?”
“예, 서방님. 피곤하실텐데 어서 침소에 드시지요.”
[塞翁之馬; 새옹지마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
<제 4장: 인생사 새옹지마>
집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어서 빨리 왕가의 씨를 베라고, 그래야 네가 쫒겨나지 않는다고.
평소 제 규수답지 못함에 호통만 치던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저를 따스히 품어주던 둘째 오라비의 다소 천박하고, 평소 올곧은 오라비답지 않은 내용에 고개를 갸웃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글씨가 정갈하지 못하다. 아직 합방날이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하루 빨리 잡아 볼 터이니 옥체 보전하라는, 그 내용이 어지럽다.
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걸까..
평소와는 다르게, 세자빈 책봉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늘은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시옵소서, 라는 말과 함께 다들 책봉식을 위한 준비에만 한참이었다. 밖에선 벌써 풍악을 울리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온 궁에는 때아닌 꽃들이 줄지어 피어났다.
조금 더 화려히 분칠을 하고 돌아다니는 궁녀까지 모든 궁안은 활기를 머금었다. 그것은 나의 낭군님도 마찬가지였다.
“부인 내일이면 우리가 온 나라에 부부라는 것을 알릴 수 있소. 이 얼마나 기쁜 일이오?”
아이같이 개구지게 웃으며 온 방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제 낭군님께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저하 라고 말해야 하는데, 왜 내 머릿속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마냥 아무 말도 명령치 못하는지.
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 인자한 웃음과, 탐욕스럽지 않은 정숙한 여인의 품에 안기어 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궁에는 입이 많았다. 덕분에 제 귀에도 이런저런 소문이 당연히 들어왔다. 제 둘째 오라비와는 달리 탐욕스러운 첫째 오라비와 아버지는 계속 서신을 보내왔다.
‘중전에게는 제 권세와 부를 먹고 자란 가문이 있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그 아이를 아주 은밀히 그러나 강력하게 세자빈 후보로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자가 예고도 없이 마음대로 세자빈 시험을 치러 너를 데리고 왔으니 그 눈빛이 고울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세자의 눈에 들도록 해라. 그것이 네가 살길이다. 그 집안과 우리 집안이 오랜시간 다투어 온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저는, 제 낭군이 버리는 순간 돌아갈 곳이 없다. 뒤로 밀려난 정실부인, 그래 어쩌면 중전의 자리란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자리이다.
정숙한 여인이란 첫째, 시기를 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그의 눈에서 나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중전이 머무는 월가(月佳: 아름다운 달)관에서 영원히 독수공방한채 지내야 한다는 말이된다.
입이 쓰디 썼다. 그는 어쩌면 내가 중전 세력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집안의 여인임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들 쉬쉬하며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 나라의 왕, 전정국 그의 아버지가 그리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궁안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있는것이었다.
그에 비해 중전은 너무 젊었다. 수렴청정(중전이 조정에 들어앉아 그 의견을 말하며 어린 왕을 위해 대신 정치를 하는 것)을 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나, 확실히 그녀를 견제는 해야하겠지.
왠지 눈물이 차올라,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나는, 나는 이런 권력 싸움에 이용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어린 날, 저와 벚꽃이 흐드러지는 날 만났던 도령이 떠올랐다. 작은 새끼 손가락 꼭꼭 걸고 커서는 꼭 결혼하자던 그 도령은 제가 말을 타는 모습이 좋다고, 같이 시조를 지어 놀 수 있어서 좋다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주던 맑은 사람이었다.
너무 어렸을때라 얼굴도 희미한데 어째서인지 그 약조만은 뚜렷하였는데, 이제 나는 약조도 지킬 수 없구나.
한 모금, 들이킨 녹차가 떫었다.
어머니, 저는 과연 이 곳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요..?
[♥암호닉 신청해주신 예쁜 분들입니다 ♥]
뽑우 꾸기꾸기 꾸꾸까까 우유 띠뚜 오빠미낭낭 하니귤 항암제 비븨뷔 보라도리 막꾹수 퓨아 비림 님 총 13분 감사합니다!!
많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 글을 봐주시는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정말 죄송해요 ㅜㅜ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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