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커피를 내밀던 손이 우뚝 굳었다. 여전히 하얀 얼굴이 날 바라본다. 8년 만에 보는 너는, 반갑다기보다는 아팠다. 젖살이 빠져 조금은 날카로워진 턱선에, 그새 조금쯤은 컸는지 전보다 높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에 가슴이 아릿아릿했다. 머뭇거리던 네가 커피를 다시 내민다. 그것을 받아들며 스친 손끝은, 에어컨 때문인지 잔뜩 식은 채였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언제 끝나냐? 술이나 한 잔 하자.” “나? 어… 조금 있으면 끝나. 잠깐 앉아 있을 수 있냐?”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뒤 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관심 없는 척 책을 펴놓고, 금세 다른 손님을 받고 있는 너를 힐끔거린다. 뒤늦게 가슴이 뛰었다. 널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자그마치 8년 전,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잊을 만도 한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너는, 야속하게도 웃고 있었다. * 운 좋게도 바로 대학에 붙은 나와 달리 너는 수능을 망쳐 재수를 하게 됐다. 재수라니, 미안해서 공부하고 있는 널 불러낼 수조차 없다. 차라리 나도 재수나 할 것을. 너는 재수를 결정한 것을 내게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줬다. 난 이미 등록금까지 낸 후였을 때. 다른 아이들은 벌써 알고 있던 채로, 너에게 입단속을 당해 내게만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자괴지심에 몸부림쳤다. 네게 있어 나는, 대체 어떤 의미기에 재수를 숨기다 숨기다 마지막에 알려주는 걸까? 재수를 할지 말지 상담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가장 먼저 알려줬으면 했는데. 내심 너와 가장 친하다며 우쭐했던 내가 우스웠다. “어, 박찬열! 사진 찍자!” 힘겨운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주제에 너는 평소보다 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졸업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방금 전까지 널 원망하던 나는 또 바보처럼, 네가 그 언젠가 내가 바보라고 했던 그 밤처럼, 너를 보고 웃었다. 도도도 달려오는 네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내게로 빨리 오기 위해 뛰는 너란, 참으로 행복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웃어, 인마. 이제 못 볼 텐데 웃는 사진 찍어야지.” 작은 카메라 안에 너와 나를 한꺼번에 담기 위해 내게 가깝게 기대어 한 너의 말은, 내 심장을 떨어지게 하기 충분했다. ‘자주’ 보지 못한다는, 그런 어투가 아니었다. 이제 얼굴을 보지 않을 사이가 되니 사진이라도 남기자는 뉘앙스였다. 아무리 네가 재수를 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힘을 내라는 명분으로 불러낼 궁리를 하고 있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하기사 그렇기도 했다. 재수 사실조차 알려주길 고사한 상대를 그 중요한 시기에 구태여 시간을 내 만나줄 리가 없었다. 씁쓸함에 자꾸만 가라앉는 입가를 간신히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키를 맞춰주려 무릎을 살짝 굽히자 내 볼에 네 머리칼이 닿는다. 겨울 바람에 서늘해진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였지만 몸을 펴진 않았다. 이렇게라도 너와 닿아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좀 더 웃어 봐. 그렇지!”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나도 내 사진기를 들어 팔을 뻗었다. 화면에 맺힌 우리는 네가 팔을 뻗었을 때보다 조금 더 작았다. 귀엽게 브이 표시를 하는 화면의 널 보다가 확인 버튼을 눌렀다. “야.” “어? 왜?” 사진이 잘 나왔는지 보려는 듯 사진기를 만지작대는 널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너를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한 번쯤은. “오늘은 라면 먹으러 안 오냐?” “아, 어. 나 재수하잖냐. 오늘 놀면 마음 못 잡을 것 같아서.”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이 선 듯한 네 말에, 나는 그저 알았다며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또다시 네가 온다면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게 너와 나의 인연인가 보다. 또다시 사진을 찍으러 팔랑팔랑 뛰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이젠 쫓아갈 수가 없다. *** 억지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졸업식이 끝나고, 너 없이 집에 가는 길은 멀었다. 언제나 너와 나의 대화 소리가 가득하던 길에서 내 걸음 소리밖에 나지 않으니 이상했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이제 너는 내 곁에서 사라질 테니까. 재수를 결정하고 그걸 네게 말하지 않은 건 일부러였 다. 너와 더 이상 같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재수 한다는 걸 알면 혹시나, 너도 따라서 대학을 포기할까 봐 애들 입단속도 시켰다. 물론 재수를 한다고 알렸음에도 네가 그대로 대학을 간다고 결정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속상했을 거다. 어쨌든 나는 내 이기심에 너를 끊어내고자 재수를 선택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 안 놀러가니?” “이제 다시 공부해야 되는데, 뭘. 내년에 놀면 되지.” 제법 철든 척 말하고 방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놨다. 교복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를 향해 웃어주던 네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제 더는 못 볼 사이라고 말하자 어색하게 일그러지던 얼굴. 그건 좋아서였을까, 싫어서였을까? 후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생각할 거다. 어차피 너는 내 안에서 새로운 박찬열로 살아갈 거니까, 이것만은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 너 때문에 재수까지 하는데. 그렇지, 박찬열? “후으…….” 베개에 파묻힌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아까, 네 얼굴을 본 후부터 줄곧 고여있던 눈물이었다. 혹여 이 울음소리가 꼴사납게 밖에까지 들릴까 봐 베개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우으윽,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지만 방에는 나밖에 없으니 상관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차츰 식으며 베개를 적신다. 여태 울어본 것 중 가장 아픈 눈물이었다. 잘 살아, 박찬열. 바보야. 너는 바보인 주제에 대학은 용케 잘 갔다? 나도 시험볼 때 일부러 자지만 않았어도 너 간 대학쯤은 껌이야. 근데, 그런데. 네가 간 대학은 안 갈 거야. 원서에도 안 쓸 거야. 거기 네가 있으니까. 그곳에 가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집에 초대할 너를 볼 테니까. 난 절대로 그런 꼴 못 봐, 절대로 못 봐……. * 톡톡. 백현을 기다리다 지쳐 어느새 턱을 괴고 졸고 있던 찬열의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찬열은 부스스 눈을 떴다. 꽤 잘 어울렸던 유니폼을 갈아입은 백현이 서 있었다. 찬열이 머쓱하게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따라오라는 듯 백현이 앞서 걸어간다. 순순히 그것을 따라가며 찬열은 백현의 뒷모습을 정신없이 훑었다. 여전히 작은 몸이다. 학생 때는 보지 못했던 염색한 연갈색 머리가 귀여웠다. 백현이 가게 문을 잠그고 조금은 어색한 얼굴로 찬열을 올려다본다. “어디 갈래?” “어?” “술 먹자며. 어디 갈래? 이 근처에 술집이 별로 없어서…….” 멍하니 그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멍청하게 되물은 찬열이 민망한 듯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근처에 술집이 없다니, 이건 환영할 일일까?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뜸을 들이던 찬열이 입을 연다. “여기서, 가까운데. 우리집.” “너네… 집?” “우리집 가서 마시자.” 꿀꺽. 제법 호기롭게 내뱉고서는 찬열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백현은 다홍빛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고민하는 듯 했다. 자꾸만 말라오는 입을 다신다. 억겁과도 같던 3분 후에, 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밝아진다. “근처 편의점에서 사가자. 맥주? 소주?” “상관없는데…….” “그럼 둘 다 사지, 뭐.” 찬열은 드물게 들떠 있었다. 벌써 어둑해진 가을 저녁,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둘만 있는 탓일까. 찬열은 제법 대담하게 백현의 손목을 쥔 채 걷고 있었다. 백현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찬열의 뒤를 따랐다. 꽤 쌀쌀해진 날씨에 백현은 몸을 움츠렸다. 일교차를 고려하지 않고 얇게만 입고 나온 탓이었다. 그때였다. 이전처럼 반 발자국 앞서 걷던 찬열이 돌연 걸음을 늦추더니 백현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놀란 백현이 찬열을 올려다봤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한 채였다. 그럼에도 백현은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찬열과 만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란히 걷는 것은. 8년 만에야 비로소 찬열이 자신을 동등한 상대로 봐주는 느낌이 들어 백현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여기 있어 봐. 금방 사올게.”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편의점에 도착하기 무섭게 또다시 자신을 앞서나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찬열에 백현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잠시잠깐의 변덕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찬열을 쫓아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백현은 멀거니 편의점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딸랑, 소리와 함께 찬열이 제법 묵직해 보이는 봉지를 들고 나왔다. 별 생각 없이 백현은 찬열이 봉지를 들고 있는 손 옆에 섰다. 갈색 크로스백을 꼭 쥔 채 걷는 백현을 보며, 찬열은 백현의 손목을 잡지 못한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고 주먹을 쥐었다. 허전하다. 괜히 머쓱해져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찬열이 또다시 반 발자국 앞서 걸었다. 입술을 꾹 말아 깨무는 백현을 미처 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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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응팔 정팔이 전교1등인데 공군사관학교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