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가 바뀌었다는 여자의 기계음에 발을 한걸음 내딛을 때였다. 바퀴가 내는 마찰음이 곧이어 들려왔다.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상황에 혼란이 왔을 때즈음 손목이 붙들려 타의로 횡단보도를 건너게 됐다. 적신호임을 알리는 기계음이 한번 더 들려왔다. 나, 죽을뻔 했구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예요, 조심히 가요"
케인을 앞세워 걸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이미 차가워진 손목을 멋쩍게 쓸었다. 한 블럭을 더 걸어 층계를 오르면 경수의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경수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한 쌍의 발걸음이 뒤를 돌았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않던 경수가 요새 외출이 잦아졌다. 층계를 내려가 한 블럭을 걸어나가면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경수의 귓가를 울린다. 경수가 횡단보도에 섰다. 근처 벤치에 앉아 케인으로 손장난을 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뀐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횡단보도에 서서 기계음을 기다리는 경수의 목덜미에 낯선듯하면서 낯설지 않은 체온이 닿았다. 그 남자구나. 경수가 직감했다.
"또 보네요."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생명의 은인이세요.."
"생명의 은인은 무슨. 그러면 저 민망해요."
경수의 직감이 틀리지않았다. 촉각을 기억해 사람을 그려내고 기억하는 경수의 직감이 틀릴리 없었다. 보이는것을 잃은 대신에 경수가 어쩔수 없이 얻게 된것이었다.
"성함이 어떻게되세요?"
엇갈린 시선이 물었다.
"변백현이예요. 스물 두살."
변백현. 경수와 동갑이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이 근처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 자주 놀러오라는 백현의 농을 뒤로한채 경수가 집으로 발을 돌렸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케인과 땅이 만들어내는 마찰음이 퍽 경쾌했다.
전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문자를 했고, 주머니에 울리는 진동소리에 서툴게 전화를 받자 백현 그였던 것이다. 시시콜콜한 일상얘기를 나눴다. 가족관계가 어떻고 대학은 어디를 다니는 그런 사소한 것들. 주로 백현이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수화를 내려놓는 일이 잦아질수록 통화의 끝이 아쉬워졌다. 집에서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불은 엄두도 못낼 뿐더러 날카로운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히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경수의 생활 패턴은 이랬다. 눈이 뜨이는 대로 몸을 일으켜 하루종일 점자책을 읽었다. 경수는 그렇게 세상을 그려내는 연습을 했다. 문득 백현이 생각났다. 백현이 눈은 어떻게 생겼을까. 코는 높을까. 경수가 슬핏 웃었다. 틀림없이 백현은 잘생겼을 것이다. 경수가 점자책을 내려두곤 손을 뻗어 탁자위를 더듬었다. 핸드폰을 집었다.
"변백현에게 전화"
연결음이 몇번 울렸을때 즈음 이었나. 백현이 전화를 받았다.
"어? 경수씨?"
"네.."
"먼저 전화한거 처음인거알아요? 저 기분 좀 좋아지려 그러는데."
"백현씨 뭐..하고있었어요?"
"경수씨 생각?"
"장난 치지 말구요. 바빠요?"
"장난아닌데. 안바빠요."
"그럼 나 좀 만날 수 있어요?"
"언제든 환영이죠"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니트가 좋을것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설레었다. 신발을 꿰어신고 익숙한 위치를 찾아 현관을 열었다. 콧속으로 스미는 공기가 습했다. 비가, 올것같았다. 경수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그의 케인에서조차 설렘과 다급함이 느껴졌다. 층계를 다내려왔다. 한블럭. 앞으로 한블럭만 더 걸어나가면 백현을 볼 수 있다. 경수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한블럭. 한블럭을 더 걸었다. 익숙한듯한 경적소리들이 경수의 고막을 강타했다.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 신호등. 찰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수가 느낀 습한 공기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깨를 털면 털어지던것이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계음이 신호의 바뀜을 알렸다. 경수가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비가멎었다.
"왜 우산안들고 나왔어요"
비가 멎었던 것이 아니었다. 비와 경수사이를 가로지르는 막이 들어섰던 것이었다. 막이 되어준건 우산일까, 백현일까.
말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백현의 카페라 무언이 가져다주는 어색함을 느낄 새도없이 다다를 수 있었다.
"앉아요"
"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우산도 없이 왔어요."
"..."
"나보려고?"
"..."
"장난인데. 경수씨 지금 표정 되게 심각해요"
"백현씨."
경수씨, 사실 장난 아니예요. 멀리서 경수씨 우산없이 횡단보도에서 서있는데 나때문인가 싶어서 괜히 웃음 나오더라구요. 나 못됐죠. 그래도 경수씨 비맞는건 싫어서 재빨리 우산챙겨나왔잖아요 나. 경수씨 눈이 많이 안좋다는것도, 앞으로 나를 볼 수 조차 없는거 다알아요. 아는데도 포기 할 수가없어서 그래요. 경수씨, 나 정말 진심이예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할게요. 뭐든지 서두르면 안되잖아요. 두서가 없는말이라 멋도 없죠. 그래도 한가지 내가 확신을 줄 수 있는건, 제가 경수씨 많이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나, 눈안보여요. 알잖아요."
경수의 눈물샘이 터졌다. 고장난 눈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도와줄게요.
경수씨가,
나를 그려낼 수 있도록.
항상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 백도나 오백이나 경수와백현이면 다좋아요ㅠㅠ
제목을 블로썸이라고 지은이유는 이 소설의 배경자체를 초봄으로 잡았어요!
한창 가랑비가 많이 내릴시기기도하고, 또 경수의 탄생화인 스윗알리섬이 이쯤 굉장히 예쁘게 개화하더라구요.
백현이를 만남으로써 개화하기를 비는! 그런! 끼워맞추기가! 맞아요!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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