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씨, 정국아. 태형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를 맴돌았다. 갑자기 몰려오는 날카로운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던 정국이 소파에 앉아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간신히 찾아내 끼워 맞추려고만 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은 기억들은 더 깊은 곳으로 숨게 만들곤 했다. 끔찍했던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방어기제였다. 그 기억들을 상자에 담아 묻어버린 건 제 자신이었지만 그 상자 속에 함께 들어간 또 다른 기억들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들의 기억, 그사이에 행복한 기억들이 잔재하고 있다고 한들 결국 커다란 액자 속에 포함된 일부분일 뿐이었다.
사방이 불행함으로 가득 차 시커멓게 그을려버린 곳에 새싹이 하나 돋아난다고 희망이 피어나 밝게 빛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어두움의 크기는 갓 돋아난 푸르름이 짊어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정국의 기억도 그랬다. 그래서 암울했던 기억 속에 피어있던 어린 새싹도 함께 상자에 담아 묻어버렸다. 그 작은 기억을 지켜내기엔 너무나 잃을 것이 많았기에, 어린 날의 정국은 차라리 아예 모두 지워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 한심한 새끼, 밥만 축내는 기계도 아니고… 정국이 너는 언제까지 여기 거머리처럼 붙어있을 셈이니? "
나이가 지긋한 여자의 한숨 소리가 아이들이 가득한 집 안, 작은 방 안에서 맴돌았다. 원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패 뒤로 보이는 여자는 겉보기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이게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손을 보면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메마른 손. 심술을 부리는 만큼 주름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자의 손등을 바라보던 정국이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렸다.
" … "
" 이럴 때만 입 다물고 있지. 영악한 것… 쯧쯔. "
정국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생일을 맞이하던 날 들은 말이었다. 영악하다. 여자는 그 말을 정국을 혼낼 때면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영악한 게 아니라 그저 눈치가 빨라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정국은 또래 아이들처럼 사랑이 가득한 보살핌 속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지 못했고, 그래서 더 빨리 자랐다. 따뜻한 품속에 안겨 쉬어갈 수가 없었으니까. 사랑이 필요했던 어린아이는 무관심 속에서 고립되었다. 앳된 얼굴에서는 이렇다 할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다른 애들은 다 입양되어서 나가는데, 왜 너만 이러고 있느냔 말이야. "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채찍을 맞는 건 항상 정국의 몫이었다. 적은 나이었지만 고아원에서의 연차가 꽤 된 정국을 원장이라는 작자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에게 있어서 정국의 상품가치는 점점 떨어져 갔고, 팔리지 않는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다. 알이 큰 보석이 화려하게 빛나는 반지를 돌리던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제 옆에 놓여진 동화책을 정국에게 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손이 아프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손찌검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손버릇이 나쁘던 여자는 손에 집히는 물건을 곧잘 집어 던지곤 했다. 쏟아지는 폭언에도 꿈쩍 안 하고 서 있던 정국이 몸을 빙글 돌려 문밖으로 나갔다. 저 여자한테 맞을 바엔 차라리 물건으로 맞는 게 낫지. 라고 생각하는 정국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무료함을 느끼던 남자가 손을 들어 공중에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 텅 빈 공간이 검은빛과 보랏빛으로 가득 차고,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 길을 수놓았다. 삽시간에 넓어진 공간을 둘러보던 남자가 둥근 구슬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여러 가지 크기의 구슬들이 영롱한 빛을 내는 것을 바라보던 남자가 작지만 아름다운 구슬을 잡아 이리저리 살피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근심 없는 어린아이 같이 맑은 웃음을 짓더니 이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 같이 보인 거지만. 작은 구슬보다 훨씬 작아져 유영하듯 유유히 구슬 표면을 걷던 남자가 푸르른 물을 구슬 표면에 가득 채웠다. 차가운 물이 남자의 발을 간질였다. 참방참방. 혼자 물장구를 치던 남자가 아까와 같은 지루함을 느껴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과 같은 모습의 생명체를 만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눈을 뜨자마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을 만들었고, 추위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태양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런 남자를 신이라 칭하였다. 얼마 동안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챙겼고, 신은 그런 사람들을 챙겼다. 처음과 같이 아무런 변화 없는 신과는 달리 사람들은 변해갔다. 저희가 먹고살 수 있는 식량을 만들어 주세요. 밤에 추위를 버티게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주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신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지던 사람들이 결국 서로의 것을 강탈하였고, 목숨을 앗아갔다. 그 시점에서부터 신의 즐거움은 끊겼다. 완전히 끊어져 버려 다시 매듭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은 시간을 선물했다. 욕심이 가득 찬 인간들에게.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영원할 것만 같은 젊음도, 행복하기만 한 순간도.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억마저도. 시간은 모든 걸 앗아간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초이자, 최후의 벌이다.
태형은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닌 자는 벌을 받는다. 흐린 기억이 태형의 머릿속에 휘몰아치지만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섞여 도무지 하나로 합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떠올리려 할수록 더 잘게 부서져 버리는 기억들에 태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을 환히 비추는 형광등을 주시하다 눈을 감았다.
사실, 정국과 태형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웃고, 울고. 서로의 희로애락을 공유했을 정도로 은밀한 관계를 맺었었다. 다만, 신이 내린 벌이 기억을 조각냈을 뿐이다.
" 후어엉, 흐… 할무, 니… 엄마, 아… "
한 남자아이가 보육원이라 쓰여있는 건물 앞에서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귀에 꽂히자 짜증이 확 올라와 잔뜩 찌푸린 무서운 인상을 한 늙은 여자가 건물에서 나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가. 짜증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포근하기만 한 목소리를 내뱉던 여자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빙긋 웃으며 눈물 젖은 뺨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울면 산타할아버지께서 선물을 주지 않으실 거란다. 흐끅, 엄마아… 할무니… 늙은 여자의 다정한 위로에도 엄마와 할머니를 애타게 찾던 아이의 뺨이 오른쪽으로 세게 틀어졌다. 살과 살이 거세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서야 멈춘 울음소리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아이를 바라보던 여자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이제부터 네가 살 곳이란다. "
" 흐윽, 끕… "
" 뷔. "
" 끅, 끄읍… "
" 여기서 지낼 동안의 네 이름이야. 다른 이름을 꺼내면 다리 하나가 부러질 수도 있어요. "
날카로운 울음을 내뱉는 태형의 입을 손으로 꾹 막아내며 늙은 여자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 아, 그리고 원장선생님은 시끄러운 걸 아주 싫어한단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죠? "
예뻐서 값어치가 꽤 나가겠어. 이마에 자리잡힌 주름을 힘껏 펴내며 해사하게 웃던 여자가 방으로 들어갔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 놀란 태형이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커다란 문을 바라봤다. 원장실. 한 글자, 한 글자. 원장실을 입에 담던 태형이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엄마 보고 싶어… 할무니도 보고 싶어… 앙상하게 마른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작게 중얼거리던 태형이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을 여과 없이 내뱉다가 늙은 여자의 험악한 얼굴이 생각이 나 문을 흘끗 바라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켜냈다.
분명 태형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의 뒤를 따라간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 정말 오랜만에 한 외출이었다. 그래서 들뜬 건지도 모르겠다. 한 손에는 반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네모나게 예쁜 웃음을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태형이 갑자기 떨어져 버리는 손에 당황하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숨바꼭질하는 거야, 태형아. 숨바꼭질이라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서는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아. 두울. 혼자 남은 태형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흐… 끅, 흐윽… "
" 시끄러워. "
GO! GO! 신체 속으로!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책을 읽고 있던 정국이 며칠 전부터 들리는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한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책을 올려놓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듯한 태형이 잔뜩 겁먹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가 자그마한 초콜릿을 태형의 발치에 툭, 던졌다.
" 그거 줄 테니까 그만 울어. "
" …진짜 나 주는 거야? "
" 응. "
초콜릿 하나에 언제 울었냐는 듯 마알간 웃음을 지으며 초콜릿을 집어 든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정국의 앞으로 뛰어갔다.
" 저기이. 나는 여덟 살이야. 너는? "
" 일곱 살."
으응. 내가 형이네? 자신이 아무리 울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곳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사람의 온기에 태형이 헤실 웃음을 지으며 금방 긴장감을 풀었다. 잔뜩 젖은 얼굴을 하고, 퉁퉁 부은 눈을 반쯤 휘어 접으며 예쁘게 웃음 짓는 태형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정국도 티 없이 맑은 웃음에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형. "
형이란 말에 까르르 웃음 짓던 태형이 김 태형. 입안에 머무르던 단어를 내뱉으려다 아! 탄성을 내뱉으며 정국의 손을 꼬옥 잡았다.
" 내 이름은 뷔야, 뷔. "
" 난 쿠키. 이제 안 울 거지, 형아? "
해사하게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형의 뺨을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문질문질 부비던 정국이 배시시 웃으며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태형의 순백한 모습에 굳게 닫혀있던 정국의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고, 며칠 사이에 정국과 태형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평화롭지만, 불안정한 공간에 남겨진 둘에게 서로는 정신적으로 버티게 할 수 있는 커다란 존재가 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국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고, 태형은 정국의 옆에 꼭 붙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책장이 넘기는 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공간에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쿠키. 따라 오렴. "
태형이 감겼던 눈을 번뜩 뜨고, 불안한지 이리저리 흩어지는 시선을 정국의 다리에 고정했다. 정국이 그런 태형의 머리를 살짝 밀어 자신의 어깨에서 떨어지게 하고, 책을 태형에게 쥐여준 뒤 원장을 따라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태형이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으며 정국의 온기가 남아있는 책을 품에 꼭 안았다.
" 전 정국. 이 초콜릿 네가 다 훔쳐 먹은 게냐? "
원장이라 불리는 늙은 여자가 이마를 볼품없이 구기며 테이블 위를 차지하고 있던 초콜릿 비닐 껍데기들을 정국에게 던졌다. 바스락거리며 눈처럼 내리던 껍데기들이 투둑, 투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바닥만 바라봤다. 빛에 반사된 비닐들이 바닥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창문 틈으로 몰래 훔쳐보던 밤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 같았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정국의 마음을 은은하게 밝혀주던 은하수.
" 내가 도둑 새끼를 키웠구나. "
테이블에 있던 물건을 던지던 원장이 손등에 주름이 그득한 손을 높이 들어 기어코 정국의 뺨을 내리쳤다. 정국의 여린 뺨이 금세 붉게 부어 여자의 손자국을 그대로 찍어냈다. 정국은 눈물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여전히 묵묵하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친 호흡을 내뱉던 여자가 정국만의 작은 은하수를 부숴버렸다. 여자의 발길에 산산조각 나버린 정국의 별들이 바닥 이리 저리에 흩어져 작게 반짝였다. 북극성이네. 저 멀리 떨어진 비닐 조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정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 올리며 원장과 눈을 맞췄다.
" 죄송합니다. "
피가 방울방울 맺혀 있던 자그마한 입술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말을 내뱉곤 정국이 몸을 빙글 돌려 문밖으로 나왔다.
" 쿠키야아. 괜찮아? "
원장실 문이 열리자마자 책을 소파에 올려놓고 태형이 정국에게 달려갔다.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태형이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정국의 뺨을 살짝 그러잡았다. 태형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뜻한 정국의 뺨에 놀라 동그마니 눈을 뜬 태형이 작은 손으로 정국의 뺨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열심히 식혔다. 손바닥으로 식혔다가, 손등으로 식혔다가. 한참을 정국의 뺨을 문지르던 태형이 결국 눈물방울들을 떨구며 정국을 꼬옥 안았다.
" 흐어엉… 미안, 끄윽, 나 때문, 에. 허엉… "
바로 앞이 원장실이라 크게 울음을 터뜨리지도 못하며 어깨를 들썩이는 태형의 등을 토닥이던 정국이 배시시 작게 미소 지으며 태형의 동그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 형이 왜 울어. 형아 울면 이제 그네 안 밀어줄 거야. "
정국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건 안 돼… 작게 말하는 태형이 정국의 어깨를 살짝 밀어 정국과 거리를 뒀다. 잔뜩 젖은 얼굴을 하고서는 입술을 오물거리던 태형이 붉게 부어오른 정국의 뺨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 정국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 우리 할무니가 나 아프면 이렇게 해주셨어. 이제 쿠키도 안 아플 거야. "
태형이 입을 네모나게 만들며 히, 웃었다. 정국도 그런 태형의 순수한 웃음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뺨을 감싼 태형의 손 위로 손을 겹치며 태형의 물기 어린 눈과 마주했다.
" 나중에 내가 의사가 돼서 돈 많이 벌면, 형이랑 같이 살 거야. "
" 진짜? 꼭 이야? 약속. "
정국이 자그마한 손을 들어 태형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위아래로 손을 흔들었다. 응, 약속. 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정국의 뺨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신은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 순수하기만 했던 그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누구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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